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 보시면 우리가 사랑해야 될 세상이 있고 사랑해서는 안 되는 세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이 있습니다. 여기 세상은 뭐죠? 그 세상 안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해서는 안 될, 지배받아서는 안 될 세상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이 세상의 지배문화, 이 세상의 지배적인 가치 이런 것들은 우리가 지배 받아서도 안 되고 추종해서도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해야 될 세상의 사람들과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고 있는 세속의 가치를 잘 구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장 18절을 보시면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는 말이 있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를 대신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속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 것처럼 사람들이 붙잡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예수에게 향해야 될 우리의 마음, 예수에게만 있어야 될 우리의 충성심을 가로채고 있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이다, 내가 재림주다 라고 하면서 신앙인들을 어지럽히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1서가 말하는 적그리스도입니다. 2장 19절에 보면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요한1서는 수신자들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2장 19절을 통해서 요한의 편지를 받고 있는 교회가 최근에 큰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사건이요? 영지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뛰쳐나간 겁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를 어지럽혔던 이단적인 사람들을 교회가 이겨낸 겁니다. 그들을 몰아낸 겁니다. 그동안 함께 신앙생활 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 공동체를 떠난 겁니다. 그러니까 남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물론 이단의 공격을 이겨낸 거니까 기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겠지만 그동안 함께 했던 사람들과 단절된다는 것이 얼마나 크게 아쉬웠겠습니까. 그런데 19절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지만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이유가 뭐죠? 그들은 진리 안에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진리 안에 거하고자 하지 않는 자들은 참된 공동체 안에서 버틸 수가 없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떠남을 통해서 그들이 진리 안에 있지 않았음을 드러낸 겁니다. 그래서 요한1서는 최근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교회를 위로하고 권면하기 위해서 쓰여진 편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장 22절에 보면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이것이 영지주의죠. 26절을 보면 요한1서를 저술한 목적이 나옵니다.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적그리스도의 미혹 가운데 시달리는 교인들을 올바른 신앙 안에서 서도록 하기 위한 목회 서신이 바로 요한1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번역이 약간 애매한 것이 27절입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 때문에 내가 오늘날 성경을 누구에게 배울 필요가 없다, 봐라 2장 27절에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라고 되어 있지 않냐 이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여기 ‘아무도’라고 하는 것은 ‘어느 누가’ 이런 말입니다. 여기 어느 누가라는 말은 뭐죠? 지금 수신자들은 사도 요한에게 참된 말씀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와서 사도 요한이 가르치지 않은 이상한 것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영지주의입니다. 예수는 메시아는 아니다, 예수와 메시아는 다른 존재이다 이런 것을 가르칩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 요한이 뭐라고 하는 겁니까?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그 내용과 다른 것을 어느 누가 너희에게 가르칠 필요가 없다, 그 누구의 가르침도 너희가 들을 필요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가르쳤던 참된 진리 안에 거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 바로 2장 27절 말씀입니다. 3장 6절을 보시면 여기도 이제 어려운 말씀이 나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이런 것들이 신앙인들을 부담스럽게 만듭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 열심히 하고 나름대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번에 야고보서 공부할 때도 얘기했지만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도 죄이지만 하나님이 행하라고 명하신 것을 제대로 행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가운데 그 누가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온전히 살고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죄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3장 6절이 뭐라고 말합니까? “그에게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다.” 너무 무서운 말씀 아닙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보시면 여기 범죄한다 라고 할 때 이 범죄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습관적이고 반복적으로 죄를 범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는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꿔 얘기하면 하나님의 백성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넘어진 그 자리에 계속 안주하지 않습니다. 복원력이 빠릅니다. 7~8절을 보시면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한이 뭘 권면하고 있습니까? 죄의 미혹 가운데서 담대하게 승리하라는 겁니다. 한 마디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죄를 짓는다는 것도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죄를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신앙인들이 이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죄 사함 받으셨습니까, 이런 질문 많이 하는데 죄 사함을 받으셨습니까 라는 과거적 질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뭐냐면 오늘도 죄 사함의 은혜 안에서 죄를 이기는 삶을 살아내고 계십니까, 이런 현재적인 질문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4장으로 넘기셔서 요한1서 4장은 별명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사랑장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사랑장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처럼 요한1서 4장도 사랑장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본질이 뭡니까? 자기 비움과 자기 내어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시고 자기를 내어주셨습니다. 교회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그 하나님을 닮아서 무한 사랑 공동체, 무한 돌봄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4장 1~3절을 보시면 영을 다 믿지 말고 시험하라 얘기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는 겁니다.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한1서가 계속 말하는 적그리스도는 뭐죠? 영지주의를 가리키는 겁니다. 예수와 메시아를 분리하는 겁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지 않는 겁니다. 여기서 보면 영을 다 믿지 말고 시험하라는 겁니다. 뭔가 놀랍고 신비스러운 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다 성령의 역사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인에게 가장 요구되는 자질이 뭐냐면 바로 분별력입니다. 이 분별력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죠?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고자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되면 말씀의 기근에 시달리게 되고 말씀의 기근에 시달리게 되면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의 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의 상을 오랜 세월 붙잡게 되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났을 때 그 진짜 하나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러면 분별력을 갖추기가 너무 어려운 겁니다. 이것이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한 모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제대로 된 분별력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제대로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뭐를 원하시는지 그의 백성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 이것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4장의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뭘 얘기하고 있는 겁니까? 영을 분별하라고 했을 때 그 영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라고 하는 것을 시인하면 그것은 성령의 영인 겁니다. 참된 영인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시인하지 않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영인 겁니다. 뭐죠? 영지주의죠. 4장 7~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따라서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해라 이 이야기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날 사람들이 물어봤다고 합니다. “사도님 왜 사도님은 사람들에게 사랑해라 이 말씀만 하시냐고 우리에게 다르게 말씀하실 것은 없냐고 왜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그 말씀을 계속 하시냐고” 이렇게 사람들이 사도 요한에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이런 애기를 했다고 합니다. “너희들이 행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이 이야기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 왜 사도 요한이 사랑만을 말할 수밖에 없었는가, 사람들이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 삶 속에서 서로 사랑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니까 요한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할 때까지 이 이야기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죠. 누군가가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게 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다 아니까 그만 좀 얘기하라고 할겁니다. 사람들은 뭐를 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머리로 아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진짜 아는 것은 뭐죠? 살아내는 그것이 진짜 아는 겁니다. 살아내는 만큼 진짜 알고 있는 거라는 겁니다. 전설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하라는 이야기를 강조했는데 우리가 사랑해야 될 이유가 뭐냐면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보이셨고 우리가 서로 그렇게 사랑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을 강조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4절에 보시면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에서 예수님을 구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는 여러 신앙적인 타이틀은 원래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사람들이 황제에게 돌렸던 타이틀입니다. 예를 들어 황제는 우리의 주인이다, 황제는 세상의 평화이다, 황제는 신의 아들이다, 황제는 신이다 이렇게 황제에게 돌렸던 것을 초대 교인들은 예수에게 돌린 겁니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이고 예수가 우리의 주인이시고 예수가 세상의 평화이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초대 교인들은 황제에게 돌렸던 무수한 고백들을 예수에게 돌렸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장 20절 보시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겁니다. 바꿔 얘기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뭘 통해 증거되는 겁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형제 사랑을 통해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형제 사랑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깨닫는 것을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영지주의의 한계, 영지주의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가 진짜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하나님이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 지를 제대로 알았을텐데, 하나님을 진짜 알았더라면 하나님이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을텐데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개인주의적인 깨달음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사도 요한이 영지주의의 한계를 사랑이라는 것을 통해서 계속해서 반박하고 있습니다. 5장 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명상과 깨달음을 통해서 신비스러운 지식을 얻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겁니다. 어떤 종교적인 감정의 발산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 착각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뭐가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진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겁니다. 5장 7~8절을 보면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 3개가 있다고 말합니다. 성령과 물과 피라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물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공생애 초기의 세례 사건을 말하고 피는 공생애 마지막의 십자가 죽음을 말하는 겁니다. 이 물과 피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말하는 겁니다. 처음과 끝, 예수가 실제 세례받으셨고 예수가 실제 고난받고 죽임당하셨다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신 겁니다. 예수가 메시아이다 라고 하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3개가 있다, 하나가 예수 공생애 초기의 물세례를 말하는 것이고 또 하나가 예수 공생애 마지막의 십자가의 죽음, 피 그리고 이 물과 피로 이루어진 예수의 사역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심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도록 도와주신 분이 누굽니까? 성령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5장 13절입니다. 여기도 요한1서를 기록한 목적이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함이라.” 이것은 뭐와 똑같냐면 요한복음 20장 31절과 똑같습니다. 요한복음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려주고자 합니다. 그래서 요한1서와 요한복음의 저자가 똑같다는 것을 앞부분과 뒷부분을 통해서 다 알 수 있습니다. 여기 5장 16~17절에 보면 사망에 이르는 자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16절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러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나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는 뭐냐면 적그리스도의 죄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것, 이것이 사망에 이르는 죄이고 그 외의 모든 죄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죄다 이렇게 말하면서 요한1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은 이제 공동 서신 마지막 시간입니다. 요한 2~3서와 유다서를 보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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