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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공동서신 녹취 13

by 【고동엽】 2022. 11. 29.
오늘은 공동 서신 7번째 시간으로 요한1서를 공부하겠습니다. 요한1서의 주제는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요한1서라는 제목은 2세기 말경부터 불리어진 명칭이고 요한1서를 쓴 사람은 사도 요한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이 대부분 다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순교당하지 않고 자연사 한 제자가 사도 요한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요한은 야고보와 형제인데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가졌습니다. 보아너게가 어떤 뜻입니까? 우레의 아들입니다. 성격이 너무 급해서 이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후에 사도 요한의 별명이 사랑의 사도로 바뀝니다. 그래서 전설에 의하면 만날 때마다 사람들에게 선포한 유일한 메시지가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에서 사랑의 사도로 변화된 회심한 사람이 요한 서신을 쓰고 있는 사도 요한이라는 인물입니다. 요한 서신은 1서와 2서는 이단 사상에 대처하기 위해서 쓰여진 서신입니다. 여기 이단의 대표적인 것이 뭐냐면 초대 교회를 어지럽혔던 영지주의라는 이단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지켜낼 수 있는가, 이단의 공격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할 수 있는가, 이단에 대처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이단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들의 주장을 지적하고 논박하는 것 이것이 이단을 대처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고 또 하나는 진짜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이단을 대처하는 또 하나의 방식입니다. 요한1서 같은 경우에는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믿어야 될 참된 신앙의 모습이 무엇인지 이 두 가지를 함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단을 대처하는 두 가지 방식, 그들의 잘못된 주장을 논박하고 진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것을 통해서 영지주의의 유혹과 영지주의의 위험으로부터 신앙인들을 올바른 진리 안에 보호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요한1서입니다.


그러면 영지주의자들은 뭐를 주장했는가 이것을 살펴 보시면 영지주의는 한 마디로 하자면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시키는 겁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는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이 좀 생소하실 수 있을텐데 이런 겁니다. 예수는 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메시아가 예수에게 임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에게 메시아가 임한 다음에 그 놀라운 사역을 다 행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메시아가 예수를 떠났다는 겁니다. 따라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인 겁니다. 다시 한번,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입니다. 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던 예수에게 세례 요한의 세례 때 메시아가 임했다는 겁니다. 그 메시아가 임한 이후에 놀라운 공생애 사역을 행하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메시아가 떠났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는 누가 죽은 겁니까? 예수가 죽은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와 메시아를 분리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원론적인 사고를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영과 육은 다릅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은 다릅니다. 인간과 신은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이런 이원론적인 사고가 기본적으로 영지주의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구원이라는 것을 뭐라고 이해했냐면 빛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세계는 어둠입니다. 초월의 세계가 바로 빛의 세계인 겁니다. 그 빛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받음인데 그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신비스러운 지식을 소유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영지인 겁니다. 신비스러운 지식을 소유할 때만이 빛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이 영지주의에서는 뭐가 중요한 거냐면 신비스러운 지식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깨달음이 중요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를 어지럽혔던 영지주의입니다. 이 영지주의가 참된 기독교 신앙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때 영지주의에 반박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 바로 요한1서이고 복음서인 겁니다. 마가복음, 마태와 누가복음, 요한복음 모두 AD 70년 이후에 쓰여졌다고 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영지주의에 대한 반박이 복음서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뭡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 합니다. 이것을 계속 강조하는 것이 바로 복음서의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예를 들어 여인의 몸에서 출생하심, 우리와 똑같이 배 고프심, 주무심, 우심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 피를 흘리심을 통해 예수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다 이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결국은 영지주의에 대한 반박이다, 그래서 복음서에 기술된 많은 내용들이 초대 교회를 어지럽혔던 영지주의에 대한 반박적인 주장이라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본문을 한 번 보겠습니다. 요한1서 1장 1절을 보시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여기 보시면 태초, 생명, 말씀 이런 단어가 나옵니다. 어디에 이런 표현이 많이 나오죠? 바로 요한복음 1장입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을 보시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 보시면 요한복음의 앞부분과 요한1서의 앞부분은 똑같습니다. 태초, 말씀, 생명 이런 단어들이 똑같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1서라고 하는 것은 예수가 누구인가 이것을 신학에서 기독론이라고 합니다. 올바른 기독론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요한1서를 기록한 목적입니다. 요한1서 1장 2절입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여기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과 똑같습니다. 요한복음과 공관 복음의 차이가 무엇이죠? 마태, 마가, 누가 공관 복음은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했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했습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이셨고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심, 이것을 강조한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의 앞부분과 요한복음의 앞부분은 너무나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6절을 보시면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장 5~6절을 뭘 얘기하는 거냐면 우리가 빛 된 하나님과 사귀면서 어두움 가운데 거한다면 이것은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하는 거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뭐냐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한다는 겁니다. 2장 10절을 보겠습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어떤 사람이 빛 가운데 거하는 겁니까?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빛 된 하나님과 내가 교제한다, 빛 된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는데 어두움 가운데 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면 빛 된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겁니다. 이것도 누구에 대한 반박이냐면 영지주의에 대한 반박입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영지주의는 깨달음을 중시한다고 했습니다. 신비스러운 지식을 소유함을 통해서 빛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구원으로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영지주의에서는 내가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내가 옆에 있는 형제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들을 배려하는가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는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깨달음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겁니다. 영지주의에서는 각자의 깨달음이 너무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하대하겠죠. 사도 요한은 여기에 대해 뭐라고 반박하는 겁니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네가 오늘도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떤 모습을 통해서 그것이 증거될 수 밖에 없다는 겁니까? 형제를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서 증거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1장 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 하나님은 회개를 기쁘게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언제 우리가 심판을 받는 겁니까? 죄를 지어서 심판을 받는 건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되면 우리가 넘어지면 하나님은 우리가 일어날 수 있는 무수하게 많은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이것을 성경이 뭐라고 했죠?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인자와 긍휼이 충만하시다, 노하기를 더디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되면 돌이킬 수 있는 무수한 기회를 하나님은 허락하십니다. 언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겁니까? 회개의 기회를 끊임없이 허락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회개를 거부할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겁니다. 그래서 회개는 늦은 때가 없는 겁니다. 내가 깨닫게 되는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할 때인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를 기쁘게 보십니다.


2장 3절입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이것도 바로 영지주의에 대한 반박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깊은 진리를 깨달았다, 자기들이야말로 진리를 깨달은 자들이다 라고 다른 사람들 위에 우월 의식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들이 생각할 때 그런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하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을 진짜 아는 사람들은 그의 계명을 지킴을 통해서 하나님을 진짜 안다 라고 하는 것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뭐가 진짜 하나님을 아는 겁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진짜 하나님에 대한 앎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런 요한1서를 보시게 되면 구절 하나하나가 영지주의에 대한 반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개인의 깨달음을 중시합니다. 그러니까 영지주의 신앙은 개인주의적인 신앙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주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내가 깨달았는가만 중요한 겁니다. 옆에 있는 형제를 돌보고 형제에게 관심을 갖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식을 가졌으면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을 얼마든지 하대할 수 있는 겁니다. 내가 우월한 자의 위치로 격상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뭐라고 반박하는 겁니까? 네가 진짜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다면 하나님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진짜 하나님을 아는 자의 모습은 어떤거죠? 형제를 진심을 다해 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앎의 모습입니다. 2장 4절입니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이것이 전형적인 헬레니즘이 말하는 앎의 한계입니다. 헬레니즘은 뭐를 안다고 합니까? 인지적인 이해를 안다고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보였던 종교적인 한계도 이런 겁니다.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앎과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전형적인 헬레니즘적인 앎과 믿음이었습니다. 영지주의의 한계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진짜 안다라고 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겁니다. 하나님과 하나되는 겁니다. 2장 12~14절 보시면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서 신앙 공동체 안에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가 자녀들입니다. 이 자녀들은 아이들이라고도 되어 있고 또 하나가 청년들입니다. 또 하나가 아비들입니다. 어느 신앙 공동체나 어린 아이 단계의 신앙인이 있고 청년 단계의 신앙인이 있고 그다음에 어른 단계의 신앙인이 있는 겁니다. 어린 아이 단계의 신앙인은 누군가가 돕지 않으면 신앙의 길에 서 있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누군가의 도움과 양육이 필요한 겁니다. 청년 단계의 신앙인은 뭡니까? 1인분의 신앙은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돕지 않아도 자기 신앙은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도울 만한 역량은 없는 겁니다. 어른 단계, 아비 단계에 있는 신앙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내 신앙을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신앙 안에서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아비 단계의 신앙인입니다. 그것이 바로 12~14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다음에 16절을 보시면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 지배받지 말라는 겁니다. 이유가 뭐죠?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땅을 분해하게 되면 세상은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겁니다. 무엇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하나가 육신의 정욕인 겁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런 육신의 정욕으로 세상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가 안목의 정욕입니다. 이 안목의 정욕이라는 말을 풀게 되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갖고 싶은 욕망인 겁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갖고 싶게 만듭니다. 그런 욕망과 탐욕을 부추깁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방식입니다. 또 하나가 뭐죠?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생의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들은 어깨에 힘을 팍 주고 사는 겁니다. 이생의 자랑거리가 없는 사람들은 늘 주눅 들어 있습니다. 학벌, 가문, 자식, 소유 이런 것들을 가지고 사람들은 막 자랑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의 주류 문화와 주류 가치에 동화되거나 지배받지 말아라, 이런 세상의 모습을 사랑하지 말아라 라고 요한은 강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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