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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공동서신 녹취 10

by 【고동엽】 2022. 11. 29.
2장 21절 보시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여기 2장 21절에 보면 신앙인의 정체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 받은 자들이라는 겁니다. 뭘로 부름받은 겁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것이고 예수의 제자로 부름 받은 겁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우리의 모범되신 예수를 따라가야 되는 겁니다. 1장 15절과 2장 21절이 똑같은 말씀입니다. 신앙은 뭡니까? 예수 따름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제대로 따르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이 어떤 길을 걸어가셨는지 예수님이 어떤 사역을 행하셨는지 이것을 명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3장 1~7절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재밌는 것이 뭐냐면 여기 아내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남편은 신앙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아내가 비그리스도인 남편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것을 말하는 것이 3장 1~7절입니다. 당시 아내들은 남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면 남편의 종교를 수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는 신앙을 가진 아내에게 남편을 신앙 안으로 견인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남편과 아내가 함께 살고 있는 가정이 선교지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이것이 길고 험난한 과정이었을까 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고 7절 보시면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하 여기라”라고 말합니다. 여기 아내를 뭐라고 하냐면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말합니다. 아내가 더 연약하다는 말은 남편도 그릇이라는 말입니다. 남편과 아내 모두가 다 깨지기 쉬운 존재라는 겁니다. 이것을 창세기는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흙으로 지음 받았다, 여기 흙이라고 하는 것은 깨지기 쉬운, 부서지기 쉬운, 넘어지기 쉬운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성이 남성에 비해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것이 필요한 겁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서로를 아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3장 15절 보시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대답을 준비하는 신앙을 가지라는 겁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왜 예수를 구원자로 고백하고 있는지, 왜 그런 삶을 살아내고 있는지, 누군가의 질문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는 그 대답을 준비하는 신앙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날 얼마나 잘 준비되어 있는가,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신앙 생활을 몇 십년 한 사람들도 누군가 우리에게 신앙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게 되었을 때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를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안 되죠. 여기 3장 15절이 말하는 것처럼 대답을 준비하는 신앙을 갖추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리고 조금 난해하고 어려운 것이 바로 18~20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라고 했을 때 노아의 방주 사건 때 노아의 전도를 듣지 않았던 그래서 멸망 당해 죽임당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옥에 내려가셨다는 겁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냐면 지옥 전도설 또는 지옥 정복설이라 합니다. 너무 특이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노아 당시 멸망당한 자들에게 전도하셨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사람이 죽음과 동시에 그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가톨릭이나 일부 학자들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그의 운명이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할 때 근거 구절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3장 18~20절 말씀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뭐죠? 연옥입니다. 또는 가톨릭에서 말하는 림보라는 곳입니다. 연옥이라는 것은 뭐냐면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중간적인 장소입니다. 천국으로 직행하지 못한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고 그 연옥은 무엇을 하는 곳이죠? 씻어내지 못한 남은 죄를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곳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이나 일부 학자들은 여기 나와 있는 옥이라고 하는 곳을 가리키면서 우리의 사후 상태가 사람이 죽은 다음에 우리의 운명이 바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다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 구절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여기 3장 18~20절 말씀입니다.


그다음에 4장 3절을 보시면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도 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잘 나옵니다. 이것은 지나간 일로 족하다는 겁니다. 이제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통해서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이 이방 기독교인이었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과 무관했던 이방인이었는데 지금은 신앙을 가진 이방 기독교인이라는 겁니다. 4절,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한다.” 옛날에는 예수를 안 믿은 사람들과 동일하게 살아왔으나 이제는 삶을 바꿔낸 겁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함께 놀던 사람들이 이것을 이상히 여깁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지만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추종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인 겁니다.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삶이 확연히 구분이 되는 겁니다. 마치 여러분 우리 한국 교회사를 보시면 초기의 신앙인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고 담배를 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축첩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술과 담배와 축첩은 그 당시 사람들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를 믿고 나서 보니까 하나님은 자신들이 술과 담배를 하고 축첩을 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하지 않음을 통해서 나는 이제 내 인생의 주인을 바꾸었다, 내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이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이것들을 행하지 않겠다, 이런 것을 통해서 신앙인이 비신앙인과 구별된 삶을 살아낸 겁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과거에 함께 했던 사람들은 변화된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상히 여깁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는 신앙인들이 비신앙인들과 어떤 차별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여전히 술, 담배, 축첩 이런 것들을 안하는 것을 뛰어 넘어서 보다 고차원적인 삶의 영역 속에서 우리가 보다 정직하고 진실하고 거룩하고 절제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살아가는구나 라고 하는 것을 세상에 증거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4장 10절을 보시면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 은사라고 하는 것은 공동체와 지체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겁니다. 이 은사는 무엇을 위한 겁니까? 나에게 이 은사를 주셨다고 할 때 이 은사를 내가 발휘함을 통해서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는 겁니다.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겁니다. 마치 뭐와 같은 거냐면 택배 배달과 같은 겁니다. 은사를 궁극적으로 보내신 분, 주시는 분은 누구죠?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그 은사를 배달하는 겁니다. 전달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 은사를 전달했다고 해서 마치 내가 준 것처럼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준 것처럼 떠벌릴 수 있겠습니까? 모든 은사를 행함에 있어 겸손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5장 1~3절을 보시면 장로들에 대한 권면이 나옵니다. 핵심은 뭐냐면 신앙인들의 모범이 되라는 겁니다. 신앙인들이 장로들의 모습을 보고 따를 수 있도록 모범이 되라는 것이 바로 1~3절의 말씀이고 5장 8절을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삼킬 자를 찾고 있는 훼방자에게 우리가 먹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근신하면서 깨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개인은 너무 연약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서로 만나게 하신 겁니다. 나를 깨어있도록 만드는 관계가 필요합니다. 이런 관계를 뭐라고 했습니까? 돕는 배필이라 했습니다. 5장 12절에 보면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라는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를 쓰고 있는 대필자가 누구냐면 실루아노입니다. 이 실루아노라는 말은 라틴어이고 헬라어로 바꾸면 실라가 됩니다. 실라라는 사람을 통해서 베드로가 지금 베드로전서를 쓰고 있는 겁니다. 쓴 사람은 실루아노이지만 베드로가 쓰게 한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를 실질적인 저자라 말합니다. 쓰게 한 그 사람을 저자라고 보는 겁니다. 13절,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여기 바벨론에 있는 교회는 로마에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보시면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괴롭혔던 제국들이 나옵니다. 제일 처음에 나온 제국이 앗수르이고 그 이후에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입니다. 그런데 다섯 제국 가운데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가운데 성전을 무너뜨린 나라가 어디죠? 바로 바벨론입니다. 나중에 AD 70년에 로마가 또 성전을 무너뜨립니다. 그때부터 로마를 뭐라고 불렀냐면 바벨론이라 했습니다. 바벨론과 로마의 공통점이 뭐냐면 성전 파괴입니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는 로마에 있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후에 요한계시록을 공부할 때 요한계시록에도 큰 성, 바벨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여기서 바벨론이라고 하는 것은 로마를 가리키는 비유적인 언어인 겁니다. 이것을 통해서 베드로전서가 AD 70년 이후에 기록된 것이구나 라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베드로의 믿음의 아들이 누구냐면 바로 마가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가 이후에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베드로의 통역을 담당했던 사람을 마가라고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마가를 믿음의 아들로 여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말하면 마가가 그것을 쓴 겁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마가복음입니다. 왜 초대 교회 때부터 마가가 쓴 복음서를 교인들이 하나님의 영감 받은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던 거냐면 마가는 12제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복음의 권위를 인정한 이유가 뭐냐면 쓰기는 마가가 썼지만 마가로 하여금 그 복음서를 쓰게 한 사람을 베드로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베드로가 쓴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준베드로복음적인 권위를 가지게 된 겁니다. 사도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 디모데와 디도인 것처럼 베드로의 믿음의 아들은 마가이다, 이것이 5장 13절에 나옵니다. 오늘은 우리가 베드로전서를 공부했고 다음 주에는 베드로후서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주간도 강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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