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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공동서신 녹취 8

by 【고동엽】 2022. 11. 29.
3장은 말에 대한 경계입니다. 오늘날로 이야기 하자면 말과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이것을 자가 점검 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면 말과 글이라는 겁니다. 나의 말과 글을 내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보면 내가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인가 라고 하는 것을 자가 점검 할 수 있다, 그래서 올바른 언어 사용, 누군가를 유익하게 하고 누군가의 생명을 살려내는 그런 말과 글을 하는 것이야 말로 바로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다를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야고보서 3장입니다.


4장 10절을 보겠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여러분 바울도 첫 사람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을 계속 비교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겁니다. 자기를 높이려고 한 겁니다. 거기서 첫 사람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고 자기를 비웠습니다. 자기를 한없이 낮추었습니다. 자기를 한없이 낮추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은 끊임없이 높여 주셨습니다. 4장 12절에 보면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4장 12절은 심판은 우리에게 주어진 권한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에 대해서도 우리는 심판의 언어를 사용하면 안 됩니다. 누군가 잘못된 길을 걸어갈 때 책망할 수는 있습니다. 비판할 수는 있습니다.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군가에 대해서도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책망과 권면과 심판의 중요한 차이가 뭐죠? 책망과 권면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돌이키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에게 건네는 말입니다. 심판은 뭐죠? 그 존재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과 선언이 심판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최종적인 판단은 오직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심판의 언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또 하나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도 구원의 여부에 대해서 함부로 선언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다, 여러분 구원에 대해서는 하나님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가 어떻게 누군가의 구원에 대해서 함부로 선포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입니까?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4장 17절 정말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죄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는 것이 죄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인 겁니다. 여기 4장 17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선을 행할 줄 알고도 뭐가 옳은 건지, 선을 행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겁니다. 살인하지 마라, 도적질 하지 마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는 것이 죄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지만 또 하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신앙인이 신앙인답지 못한 것도 엄청난 죄라고 하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삶이 무엇인지 이것을 우리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앙의 삶을 제대로 걸어가지 않고 그 교회의 모습을 제대로 일궈내지 못하는 것도 죄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죄된 삶을 떨쳐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끊임없이 변화 되어지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5장 1~6절은 부유한 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데 여기서 조심해야 될 것이 뭐냐면 부유함 자체가 죄는 아니죠. 어떤 부유함인가가 중요합니다. 여기 1~6절에서 부유한 자들이 경고를 받는 이유가 뭐냐면 이들의 부유함이 가난한 자들에게 마땅히 주어야 될 것을 주지 않은, 가난한 자들의 것들을 빼앗은 거짓을 행함, 불의를 행함, 불의함을 통해서 쌓아 온 부유함이기 때문에 부유한 자들이 경고를 받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조심해야 될 것이 뭐냐면 부자에 대한 경고, 이것이 부유함 자체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불의한 부유함에 대한 경고인 겁니다. 때로는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다고 했을 때 가난 자체가 무조건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정직하고 진실하고 의롭게 살려고 하다가 가난해졌을 때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게으르고 나태한 결과 가난하게 되었을 때는 성경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고 책망합니다. 부유함 자체를 경고하고 가난함 자체를 복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부유함과 어떤 가난함이 경고와 축복의 선언을 받고 있는가, 이것을 여러분이 잘 기억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5장 4절에 보면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울음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짧게만 설명드리면 그동안 한국 교회는 구속사 신학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구속사 신학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창조 신학입니다. 구속사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하나님이 무엇에 마음아파 하시는가, 구속사 신학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온갖 우상들을 숭배하고 있으면서 흑암의 권세 가운데 있는 자들을 우리 하나님은 가장 마음아파 하신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가장 기뻐하시는가, 그 우상을 숭배하던 자들이 흑암의 권세 가운데 있던 자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다, 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는가, 세계 만방에 나아가서 전도와 선교를 해야 된다, 이것이 바로 구속사 신학입니다. 그동안 우리 한국 교회는 구속사 신학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구속사 신학만큼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뭐냐면 창조 신학입니다. 창조 신학은 이런 겁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마음 아파하시는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귀하게 지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다운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들, 비인간적인 삶에 방치된 사람들, 인간의 존엄성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이들의 삶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너무나 마음 아파 하신다, 하나님은 무엇을 가장 기뻐하시는가, 이런 비인간적인 삶에 방치되었던 자들이 인간다운 존엄한 삶을 회복하는 것을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하신다, 그래서 이 땅의 잘못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통으로 말미암아 여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어린 아이들이 인간다운 존엄성을 누리지 못하고 가난한 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너무나 마음 아파 하시는데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너무 기뻐하신다, 이것이 바로 창조 신학입니다. 여기 야고보서 5장 4절에 보면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않는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노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댓가를 받지 못하는 그래서 울부짖고 있고 신음하는 자들의 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들린다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들이 이런 불의한 왜곡된 삶에 처해 있는 것을 도와줌을 통하여서 그들이 인간다운 존엄한 삶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일이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창조 신학입니다. 이 구속사 신학과 창조 신학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11절에 보면 인내의 모델로 욥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에 5장 15절에 보면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질병으로부터 치유함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5장 15절을 우리가 이렇게 적용하시면 안 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한다, 질병으로부터 치유함을 얻어 낸다 라고 했을 때 누군가의 병이 치유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 사람이 병으로부터 치유함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가 믿음의 기도를 드리지 못했구나 이렇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될 것은 뭐냐면 우리가 믿음의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모든 질병으로부터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어디 나왔습니까? 다니엘서에 나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의 신앙을 지킨 사람들이 사자굴에 던져짐을 당했습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 사자굴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어떤 신앙이 필요한 겁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 필요한 겁니다. 나는 이 수렁에서 구원함을 받고 싶지만 그것이 내가 간절히 원하는 소원이지만 우리의 기도의 마지막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며 하나님이 행하시고자 하는 바를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짜 믿음의 기도라는 겁니다. 여기 나와 있는 5장 15절의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한다”라는 것을 내세에까지 길게 넓게 이해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은 그들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고 죽임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선물로 허락하실 것이다, 이런 넓은 맥락에서 이 말씀을 이해해야 되는 것이지 이것을 지금 당장 믿음의 기도를 드리기만 하면 모든 질병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안 된다는 겁니다. 17절을 보면 여기는 엘리야를 기도의 모델로 제시합니다. 5장을 보시면 욥은 인내의 모델로 나오고 엘리야는 기도의 모델로 나옵니다. 이렇게 오늘 저희가 야고보서를 살펴보았고 다음 주에는 베드로전서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한번 쭉 읽어주시고 다음 주 강의도 잘 경청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야고보서 잘 경청해주셔서 감사드리고 한 주간도 건강하십시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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