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베드로전서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 서신도 마찬가지이고 베드로의 편지도 전서가 후서보다 좀 깁니다. 그래서 전서는 5장까지 있고 후서는 3장까지 있는데 오늘은 전서를 보고 다음 주에는 후서를 공부하겠습니다. 본문을 함께 보면서 오늘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1장 1절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 1장 1~2절에 보시면 발신자가 나오고 수신자가 나오고 그 수신자에 대한 설명이 2절에 나옵니다. 그다음에 문안 인사가 나옵니다. 1장 1절 보시면 베드로는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누구와 비교가 되냐면 사도 바울과 비교됩니다. 바울 서신을 보시면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는 것을 길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단순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다, 사도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았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상으로 파송된 자가 바로 사도인데 베드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3년간의 공생애를 함께 했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는 것을 친히 목격했고 예수님으로부터 마지막 지상 명령을 받았고 성령의 오순절 강림을 경험하는 등 베드로가 사도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아주 간략하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바울은 반대입니다. 바울은 예수 공생애에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보냄 받았다는 것은 증거해 줄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로 부름받았다는 것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베드로가 편지를 보내는 수신자들이 살았던 지역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인데 여기는 오늘날 터키 지역입니다. 소아시아라고 하는데 이 소아시아에 살고 있던 신앙인들에게 베드로가 보낸 편지가 바로 베드로전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절에 보시면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라고 합니다. 여기 14절에 ‘전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사욕을 본받았습니다. 이제는 순종하는 자식처럼 살아가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죄된 삶으로부터 이제 온전히 출애굽 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베드로의 편지를 받았던 수신자들이 이전에는 이방의 우상들을 섬겼던 사람들이었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경우에는 야훼 하나님을 다 신앙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다, 예수도 하나님이다 이런 고백을 하면서 초대 교회로 개종한 겁니다. 그런데 1장 14절에 보면 지금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사욕에 따라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순종하는 자식이 된 겁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전에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었던 이방의 우상들을 숭배하는 이방인이었다가 이제는 하나님을 믿게 된 이방계 기독교인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다음에는 이전에 우리를 지배하던 삶으로부터 온전히 출애굽 해야 된다 이것을 1장 14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15절 보시면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는데 이것이 베드로전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1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신 목적이 뭐냐면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베드로에게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예수의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겁니다. 신앙은 모방입니다. 누구에 대한 모방입니까? 누구에 대한 본받음입니까? 예수에 대한 모방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뭐에요? 예수가 걸어가셨던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겁니다. 신앙은 모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됩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의 삶을 살아가야 되겠죠. 정직하고 진실하고 거룩한 삶, 육신에 지배받지 아니하고 절제된, 이기적인 삶을 뛰어넘어서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결국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모방의 신앙이다, 누구를 모방하고 누구를 따르는 거냐, 예수 따름이 신앙의 핵심이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바로 1장 15절 말씀입니다. 2장으로 넘어가서 2장 4절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가 달랐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이 땅에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이 힘을 합쳐서 예수에 대해 내렸던 마지막 판단이 뭐에요? ‘너 같은 인간은 죽어야 해’ 하면서 이 땅의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이 힘을 합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에게 내렸던 마지막 판단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이 판단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뭐죠?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와 같은 자는 다시 살아나야 된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동일한 예수에 대해서 사람들이 내렸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데 여기 2장 4절에 보시면 “사람에게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택하심을 입었습니다. 사람들과 하나님의 판단이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이 땅에서 신앙인들은 누구의 판단을 염두에 두고 인생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어야 되겠습니까? 사람들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에서 인정받는 자, 하나님의 판단에서 합격하는 자가 되어야 되겠죠? 2장 9절입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신앙인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신앙인의 정체성이 나오는데 이 말씀이 어떤 말씀을 연상하게 만드냐면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고 나서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할 때 시내산 언약에서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규정했던 말씀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출애굽기 19장 5~6절 말씀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신앙인은 어떤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족속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거룩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정체성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중요한 것이 뭐냐면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중세 가톨릭의 중요한 특징이 바로 사제 중심주의입니다. 가톨릭은 사제가 없으면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사제가 없으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일반 백성 사이에 사제라는 중간 매개자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의 주장입니다. 이것을 사제 중심주의라 합니다. 이 가톨릭의 사제 중심주의를 거부하고 만인 사제를 주장한 것이 바로 개신교의 특징입니다. 1517년에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 운동을 일으켰을 때 그리고 루터 이후에 칼뱅이나 쯔빙글리나 멜링히톤이나 부처나 이런 많은 개혁자들이 등장했을 때 개혁자들이 강조했던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영광, 오직 성경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교 개혁가들이 말했던 모든 것들은 어떻게 보면 가톨릭도 강조했던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톨릭도 오직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과 개신교를 완전히 갈라서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차별성이 뭐냐고 했을 때 가톨릭은 사제 중심주의를 강조했다면 개신교는 만인 사제를 강조했다는 겁니다. 사제 중심주의와 만인 사제라고 하는 것이 가톨릭과 개신교의 가장 중요한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 개개인이 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만인 사제의 중요한 근거 구절이 된 겁니다. 먼저 여기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이 아니라 여기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은 ‘왕을 위한 제사장, 왕을 섬기는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여기 왕은 누굽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제사장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다, 이런 말입니다. 이 정체성을 잘 지켜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서 그리고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잘 지켜내기 위해서는 우리 신앙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열심히 공부해야죠. 그리고 말씀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야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나는 만인 사제야, 내가 바로 제사장이야 이것만을 주장하게 되면 자칫 자기 신격화로 귀착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정체성이 뭐냐,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고 왕을 섬기는, 왕을 위한 제사장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나라이고 그의 소유가 된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 이 정체성을 잘 지켜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나도 제사장이고 너도 제사장이고 따라서 ‘나한테 뭐라고 하지마 내가 알아서 할거야’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이것이 자칫 자기 신격화로 빠질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여기 나와 있는 만인 사제, 왕 같은 제사장이 제대로 현실로 구현되기 위해서라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말 뜨거운 공부, 열심 있는 공부가 필요하고 그리고 내가 깨달아 알게 된 것에 대해서 일상의 삶 속에서 순종하는 삶 이것이 있을 때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위한 제사장,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특히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구분하게 만든 굉장히 중요한 말씀임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2장 10절로 넘어가면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 대다수가 이방계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전에는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디아스포라 유대 기독교인이라면 이들은 전에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제는 더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겁니다. 그런데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었다라는 말 속에서 이들이 이전에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이방인이었구나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을 믿는 이방계 기독교인이 되었구나 라고 하는 것을 2장 10절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2장 13~14절에 보시면 그동안 근본주의자들이 여기 2장 13~14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국가에 대한 순종의 미덕을 강조해 왔습니다. 여기 ‘인간의 모든 제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13장과 다른 겁니다. 로마서 13장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라, 위에 있는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이렇게 말했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권세의 기원이 하나님인 것처럼 말한 것이 로마서 13장이었는데 베드로전서 2장 13절에서는 인간의 모든 제도인 겁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입니다. “이것을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3~14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인간이 만든 정치 제도, 위에 있는 권력자들에 대해서 순종할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 신앙인들이 고민하는 가장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가 이 땅에 있는 권력, 특별히 이 땅에 있는 정치 권력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보시면 신앙인이 이 땅에 있는 정치 권력에 대해 취해야 될 자세에 대해 크게 3군데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가 로마서 13장이고 또 하나가 베드로전서 2장 13~14절이고 또 하나가 요한계시록 13장입니다. 로마서 13장에서는 위에 있는 권세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라 말합니다. 그리고 위에 있는 권세는 권선징악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워두신 질서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로마서 13장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위에 있는 정치 권력이 사탄의 하수인으로 존재할 때도 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정치 권력이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에 대한 충성으로부터 이탈하게 하여 왜곡된 길로 인도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요한계시록 13장입니다. 또 하나가 베드로전서 2장 13~14절인데, 여기에서는 위에 있는 권세에 대해 순종하라는 겁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주를 위하여서요. 그래서 신약 성경 안에 이 땅의 정치 권력에 대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권력이니까 순종하고 복종할 것을 말하는 것도 있고 또는 이 땅의 정치 권력이 때로는 사탄이 세운 정치 권력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철저히 저항할 것을 말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들이 기록된 시점에 따라 다른 겁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나 베드로전서의 경우에는 로마라고 하는 정치 권력으로부터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로마라는 정치 권력으로부터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였습니다. 정치 권력과 교회가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서 이 정치 권력에 대한 성경의 주장이 상이하다 라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고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는 겁니다. 여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고 하는 것이 정치는 정치인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가 종교는 종교인에게 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다음에 ‘그리고’ 또는 ‘그러나’로 번역되는 ‘카이’라고 하는 접속사가 여기 있습니다. 여기서 ‘카이’는 ‘그러나’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할 때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형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가이사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동전은 가이사에게 바쳐라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이것이 뭐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인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바쳐져야 된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주장이었습니다. 가이사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동전은 가이사에게 바치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모든 존재, 여기 누구도 포함됩니까? 가이사도 포함됩니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될 것을 말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정치 권력을 바라보게 될 때 이 땅의 정치 권력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대로 나아갈 때는 우리가 박수를 쳐줘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의 정치 권력이 사탄의 하수인, 악마의 하수인 역할을 할 때는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붙잡고 그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질타해야 하겠죠. 이것이 이 땅의 정치 권력에 대한 신앙인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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