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공동서신 여섯 번째 시간으로 베드로후서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공동서신 첫 시간에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서신이 총 21권이 있는데 크게 바울 서신과 공동서신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신앙인들은 바울 서신과 공동서신 가운데서 바울 서신을 더 사랑했습니다. 바울 서신의 말씀들을 더 좋아했습니다. 바울 서신을 더 좋아하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이신칭의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하나 꼽으라면 이신칭의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신앙인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할 때의 믿음을 인지적인 동의, 고백적인 언어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 서신에 대한 오해를 교정시켜 주는 것이 공동 서신입니다. 공동 서신은 참된 믿음 안에는 참된 순종의 행위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합니다. 신앙인들이 바울 서신의 주장은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믿으면 끝나기 때문입니다.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동 서신은 참된 믿음 안에는 참된 순종의 행위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이 자기의 삶을 보면 그런 순종의 행위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동 서신만 보면 왠지 자신은 하나님을 제대로 안 믿는 사람인 것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바울 서신을 보면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이런 연유로 오랜 세월 동안 신앙인들은 공동 서신을 부담스러워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날 한국 교회에 공동 서신이 너무나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울 서신은 이제 막 하나님의 백성이 된 초심자들을 대상으로 선포된 말씀이라면 공동 서신은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어 왔던 신앙인들을 대상으로 선포된 말씀입니다. 바울 서신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되었는가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공동 서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된 이 구원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는가, 두렵고 떨림으로 완성시켜낼 수 있는가를 강조합니다.
지난 시간에 베드로전서를 공부하였고 오늘은 베드로후서를 보겠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베드로전후서의 저자는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수제자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쓴 편지가 이렇게 신약의 뒷부분에 배치되게 된 것일까요? 왠지 예수님의 수제자가 쓴 편지라면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평가를 받았을 것 같지 않습니까? 로마에 의해서 기독교가 국교가 된 것이 392년이고 신약의 27권이 정경으로 확정된 것은 397년에 카르타고 종교 회의입니다. 당시 교회 안에는 로마의 박해로 인해 배교를 했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온 이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배교자들이 볼 때는 뭔가 엄중하고 분명하게 ‘한 번 배교하게 되면 더 이상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참된 믿음에는 참된 순종이 있어야 된다’는 공동 서신의 내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믿기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바울 서신이 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에 신약의 27권이 정경으로 확정이 될 때 공동 서신의 권위는 바울 서신보다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이때 교회 안에 있었던 중요한 논쟁 가운데 하나가 도나투스라는 사람과 어거스틴의 논쟁입니다. 도나투스라는 사람은 교회의 순결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참된 순종 행위를 하지 않으며 배교를 했던 사람들,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내지 않는 범죄자들이 있는 교회는 하나님이 떠나신 교회라고 주장했습니다. 마치 에스겔 8장부터 11장의 내용이 연상됩니다. 에스겔 8~11장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타락한 성전을 점점 떠납니다. 항상 하나님은 성전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성전을 하나님은 떠나가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성전은 건물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범죄자들이 있는 교회에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 그리고 타락한 지도자에게 받은 세례는 무효이다’라고 주장한 사람이 도나투스입니다. 그런데 이 도나투스와 논쟁한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은 ‘세례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 의해 받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이 거룩한 목사인지 타락한 목사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세례는 사람이 베푸는 것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세례를 베풀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타락한 지도자가 베푼 세례도 여전히 유효하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도나투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에서 많은 신앙인들은 어거스틴의 손을 들어줍니다. 만약 교회가 AD 1세기 경에 목숨 걸고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이 대다수였을 때 이런 논쟁이 있었다면 ‘참된 믿음에는 참된 행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공동 서신의 권위가 더 강조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헬레니즘의 시각으로 믿음을 인지적인 동의로 생각한 사람들은 사실은 바울의 주장을 오해한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신앙의 년수가 140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보시면 예수를 믿게 된 지 10년, 20년, 30년 심지어 70년 동안 예수를 믿은 분들도 계십니다. 이런 분들은 바울 서신보다는 공동 서신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에 대해서 좀 더 귀를 활짝 열어 놓고 공동 서신이 우리에게 건네는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난 시간에 베드로전서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모방이다’, ‘예수가 걸어가셨던 그 길을 따르는 것이 신앙이다’라는 것을 강조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베드로후서 본문을 보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5~7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 보시면 믿음에서 출발해서 제일 마지막에는 사랑으로 끝납니다. 핵심은 사랑이라는 겁니다. 믿음에서 시작한 걸음은 신적 성품을 닮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적 성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시작해서 사랑을 더하는 이것이 어떻게 보면 신앙인이 걸어가야 될 신앙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음만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덕을 갖춘 믿음이 중요합니다. 덕에는 뭐가 필요합니까? 참된 지식이 필요합니다. 지식에는 또 절제가 필요합니다. 절제에는 인내가 필요하고 인내에는 경건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이것을 뒤바꾸게 되면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덕이 없는 믿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지식이 없는 덕을 조심해야 합니다. 절제가 없는 지식을 조심해야 합니다. 인내가 없는 절제, 경건이 없는 인내, 형제 우애가 없는 경건, 사랑이 없는 형제 우애를 조심해야 합니다. 굉장히 우애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한 존재에 대해서 사랑이 없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5~7절의 말씀은 우리가 신앙 안에서 어떤 성장을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것을 뒤바꾸었을 때 나오는 ‘덕이 없는 믿음, 지식이 없는 덕’ 등을 조심해야 합니다. 1장 9절을 보시면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맹인’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맹인이라는 단어는 ‘시각 장애인’으로 고쳐야 합니다. 대부분의 한국 교인들이 개역개정 성경을 보고 있는데 개역개정은 개역 성경을 약간 개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개역이라는 것은 구역성경을 수정한 것입니다. 구역 성경을 약간 바꾼 것이 개역이고 개역 성경을 약간 바꾼 것이 개역 개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뭘 기억하셔야 되냐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한글 번역 성경은 기본적으로 1937~1938년도에 번역된 것입니다. 1937~38년도의 번역을 구역이라고 하고 그것을 약간 바꾼 것을 개역이라고 하고 개역을 약간 바꾼 것을 개역개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2022년에 이 성경 본문을 보고 있지만 사실 이 성경 본문이 번역된 것은 1930년대입니다. 그래서 개역개정 성경에는 뭐가 많이 있냐면 1930년대의 한자투가 많이 나오고 장애인들에 대한 비하적인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맹인, 절뚝발이, 눈먼 자, 병신, 저는 자와 같은 표현들이 있습니다. 왜 이런 식의 번역이 탄생한 거냐면 1930년대에는 대한민국 사회 안에서 장애인들에 대한 인권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한국 사회 안에서 장애인들을 다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런데 1988년에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해서 장애인에 대한 표현이 확 달라지게 됩니다. 요즘은 누구도 소경, 맹인 이런 식의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시각 장애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전히 한글 번역 성경은 1930년대의 번역을 사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 10분의 1정도의 신체적 또는 정서적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그분들을 생각해서라도 장애인들에 대한 비하적인 표현이 속히 수정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1930년대의 이런 한문투 성경을 가지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성경을 읽으라고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자라나는 세대가 자신들의 언어로 읽을 수 있는 한글 번역 성경이 빨리 출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타까운 것은 여전히 교회 안에 봉건적인 인식을 가진 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조선시대의 사서삼경처럼 뭔가 경전이라고 한다면 읽자마자 바로 이해되는 것보다는 좀 어려워야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뜻을 알기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는 것이 경전을 대하는 자세이지 읽자마자 바로 이해되는 것은 좀 경전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미래 세대는 점점 말씀으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1장 14절 보시면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한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신약 성경에서 ‘장막을 벗어난다’는 말은 육체의 죽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1장 14절에 통해서 베드로후서가 베드로의 유언적인 설교와 권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구약의 뭐가 연상되죠? 신명기가 연상됩니다. 신명기는 모세의 유언적인 설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남아 있는 출애굽 2세대를 향해서 모세가 선포했던 유언적인 설교가 신명기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베드로후서도 베드로가 하나님의 부르심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남아 있는 당신의 교인들을 위해서 건넨 유언적인 설교와 권면입니다. 1장 17절을 보시면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1장 17절은 변화산 사건에 대한 회상입니다. 복음서를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가 12명이지만 정말 중요한 사건의 현장에는 예수님이 3명의 제자들을 주로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누구죠?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이 변화산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을 베드로가 회상하고 있습니다. 2장 1~3절을 보시면 여기에는 거짓 교사들의 특징이 나옵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된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흔들기 위해서 심어놓은 가라지가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거짓 교사들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한 마디로 소비자 중심의 사역을 행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후계자입니까? 우리가 구약의 예언서를 공부할 때 예언자가 크게 두 부류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참 예언자가 있고 거짓 예언자가 있습니다. 참 예언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을 예언자로 부르신, 그리고 자기를 예언자로 파송하신 하나님 중심의 사역을 행하는 자가 바로 참 예언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이 뭐라고 했죠?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 예언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참 예언자입니까?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사람이 참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참 예언자는 항상 소수입니다. 대다수는 거짓 예언을 했습니다. 거짓 예언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예언자로 부르시고 파송하신 하나님 중심의 사역이 아니라 자기의 메시지를 듣고 있는 소비자 중심의 사역을 했던 자들이 바로 거짓 예언자입니다. 청중들이 듣기 원하는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그들로부터 물질적인 혜택을 공급 받았습니다. 이런 거짓 예언자들의 후예가 바로 2장 1~3절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입니다. 2장 1절을 보시면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흥미로운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바로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단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려면 정통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올바른가에 대한 고민 속에서 정통이 있어야만이 정통과 다른 이단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2장 1절에서 이단이라는 말을 통해서 뭘 알 수 있냐면 베드로후서가 기록된 이 당시에 신앙인들이 알아야 될 올바른 것, 정통이 무엇인가라는 것이 조금씩 확립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정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죠? 바로 예수에 대한 참된 인식입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예수를 예언자 중의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다음에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난 다음에는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들을 하나씩 확립되어 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정통에 대해서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이단인 된 것입니다. 여기 2장 1절에 이단이라는 단어가 쓰인 것을 통해서 베드로후서가 기록될 당시에 정통이라는 것이 하나둘 확립되어 가고 있었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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