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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공동서신 녹취 7

by 【고동엽】 2022. 11. 29.
오늘은 야고보서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고보서는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신약 성서의 아모스서라는 별명이 있는데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이 있지만 그 예언자들 가운데 가장 정의를 강조했던 예언자가 바로 아모스입니다. 야고보서 안에도 정의에 대한 강조가 많이 나오기에 별명이 신약 성서의 아모스서입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가 흩어진 12지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야고보서의 중요한 주제는 실천하는 믿음의 중요성입니다. 이것은 바꿔 얘기하자면 당시 믿음을 실천과 무관하게 인지적인 동의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첫 시간에도 그런 말씀 드렸습니다. 바울 서신과 공동 서신을 여러분이 공부하실 때 항상 기억하셔야 할 것이 뭐냐면 바울과 공동 서신의 저자들이 목회했던 대상이 달랐다, 바울은 신앙의 초심자들을 대상으로 목회했고 공동 서신의 저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믿어왔던, 신앙 생활을 오랜 세월 동안 해왔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한 겁니다. 어떻게 보면 이제 막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바울 서신을 주로 묵상해야 된다면, 신앙의 연수가 10년 20년 30년 된 사람들은 공동 서신의 메시지를 보다 더 묵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말하는 믿음을 사람들이 오해할까봐 항상 편지를 쓸 때마다 앞부분에는 우리가 믿어야 될 신앙의 교리에 대해 말하고 뒷부분은 이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 삶에 대한 언급을 반드시 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앞부분은 교리, 뒷부분은 신앙에 근거한 삶을 강조했던 이유가 뭐냐면 바울의 메시지를 들었던 사람들이 대부분 다 헬레니즘이 지배한 땅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이방 땅에 살고 있던 신앙의 초심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믿음 하면 당연히 믿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냐면 어떤 문장을 받아들임, 어떤 주장을 인지적으로 동의함, 이것을 믿음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머리와 입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을 뛰어 넘어서 삶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편지를 쓸 때마다 앞부분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될 수용해야 될 신앙의 내용을 말하고 뒷부분은 그런 신앙을 가진 자들이 살아내야 될 삶에 대한 언급을 말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오해한 겁니다. 이런 사람들의 오해를 다시 교정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편지를 기록한 겁니다. 그것이 바로 공동 서신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야고보서인데 야고보서는 실천하는 믿음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꿔 얘기하자면 실천으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은 유신론적인 관념론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 정도의 믿음은 귀신들의 신앙 수준과 똑같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의 강조점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주십시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가 기록했습니다. 재밌는 것이 공동 서신을 보시면 순서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 일이삼서, 유다서입니다. 야고보서로 시작해서 유다서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야고보와 유다의 공통점이 뭐죠? 둘 다 예수님의 동생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와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유다의 편지로 시작하고 끝냅니다. 그리고 중간에 누구의 편지를 배치한 겁니까? 베드로의 편지와 요한의 편지를 배치하고 있는 것이 공동 서신의 순서입니다. 여기서 우리 개신교와 가톨릭의 다른 주장을 하나 기억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야고보와 유다를 예수님의 동생으로 봅니다.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여기 나와 있는 야고보와 유다를 예수님의 친동생이 아니라 사촌 동생 또는 이복 형제로 봅니다. 이것이 개신교와 가톨릭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친동생으로 봅니다.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예수는 동정녀 탄생을 하셨고 첫째이고 그다음 야고보와 유다가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보는데 가톨릭에서는 야고보와 유다를 예수님의 친동생으로 보지 않고 사촌 동생 또는 이복 형제로 봅니다. 왜 이렇게 가톨릭은 다른 주장을 하냐면, 가톨릭 교인들이 마리아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4가지 교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마리아 4대 교리라고 하는데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잖아요. 그러니까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이다 이것이 마리아에 대한 교리이고 두 번째는 마리아는 죽을 때까지 평생 동정녀였다, 세 번째 동정녀인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할 때 마리아는 원죄 없이 예수를 잉태했다, 원죄 없는 잉태 이것이 세 번째이고 네 번째는 마리아는 자연사하지 아니하고 승천했다, 마리아 승천설 이것이 마리아 4대 교리입니다. 이 마리아는 죽을 때까지 평생 동정녀였다, 여기서 야고보와 유다가 마리아가 낳은 아들이다 라고 한다면 야고보와 유다도 동정녀 탄생을 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은 마리아가 동정녀로 낳은 아들은 예수밖에 없고 죽을 때까지 마리아는 동졍녀성을 유지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야고보와 유다는 예수의 친동생이 아니라 사촌 동생 또는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하기 이전에 요셉과 결혼했던 다른 여인이 낳은 이복 형제라고 봅니다. 이것이 개신교와 가톨릭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예수를 낳을 때만 마리아는 동졍녀로 탄생을 했고 그다음에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로 야고보와 유다로 보는 반면에 가톨릭은 마리아 평생 동정녀설 때문에 마리아는 죽을 때까지 동정녀였다, 따라서 여기 나와 있는 야고보와 유다는 예수의 형제이기는 하지만 친동생은 아니라 사촌 형제이거나 아니면 요셉이 마리아 이전에 결혼했던 다른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이복 형제이다, 이것이 가톨릭과 개신교의 야고보와 유다를 바라보는 중요한 차이라고 하는 것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유세비우스라는 사람의 기록에 의하면 야고보의 별명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의인 야고보입니다. 그리고 낙타 무릎입니다. 야고보는 유대인들의 경건 생활을 너무나 철저하게 지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했던, 너무나 율법을 철저히 준수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야고보를 보면서 의인 야고보이다, 그리고 얼마나 무릎을 꿇고 기도를 많이 했냐면 무릎이 낙타 무릎처럼 될 만큼 정말 열심히 경건 생활에 몰두했던 사람이 야고보이다 라고 하는 것이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총 5장까지 있는데 어떤 스토리가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치 구약의 잠언처럼 다양한 교훈들이 모여있는 이야기가 바로 야고보서입니다.


본문을 우리가 볼까요? 1장 1절입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12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여기 보시면 발신자, 수신자, 인사말로 이뤄져 있습니다. 전형적인 서신의 형식을 그대로 갖추고 있습니다. 1장 13절을 보시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1장 13절의 말씀이 어디와 충돌이 일어나냐면 창세기 22장 1절입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분명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인생의 하루하루가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다운가를 시험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했다, 그다음에 이스라엘이 걸은 광야 길 자체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한가를 드러내는 시험의 현장 아닙니까? 우리의 일상 자체가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시험의 현장 아닌가요? 이 시험의 현장에서 우리는 이겨내야죠. 합격해야죠. 실패하면 안 되죠.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일상 자체가 시험의 연속이라 할 수 있는데 야고보서 1장 13절은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뭔가 성경의 전체 주장과 야고보서 1장 13절이 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여기 ‘시험한다’에 사용된 동사가 바로 ‘페이라조’라는 단어입니다. 이 헬라어 ‘페이라조’는 ‘시험한다’는 뜻도 있고 ‘유혹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 야고보서 1장 13절에서는 ‘시험한다’고 번역하기 보다는 ‘유혹한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합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하나님은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해서 유혹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백성다운가,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가, 이것을 시험하는 분이시죠.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시험에서 이기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길 원한다면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유혹하시는 분은 아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3절은 ‘시험한다’는 번역보다는 ‘유혹한다’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장 15절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하며 하나님을 떠나는 주된 원인이 욕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욕심에서 죄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 죄의 결과가 사망인 겁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는 욕심을 이겨내게 되면 많은 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가 자유할 수 있습니다. 죄의 유혹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많은 죄가 결국 욕심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인간의 원죄라고 할 수 있는 선악과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허락된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허락되지 않은 것을 추구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넘어진 것이 선악과 사건 아닙니까. 1장 15절에서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욕심을 이겨낼 수 있을까, 유혹에 절제할 수 있을까, 이것을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1장 19절에 야고보서의 핵심 구절이 나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이것이 야고보서의 핵심 구절입니다. 듣기는 속히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말하고 성내는 것은 더디 하라는 겁니다. 한 마디로 회심한 이후에 성화의 문제에 관심이 있는 겁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 자답게 뭔가 변화된 삶, 그 변화된 삶 가운데 하나가 뭡니까? 듣기는 속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들이 진심을 다해 권하는 말은 듣는 것은 속히 하고 말하는 것, 성내는 것 이런 것은 더디 하라는 겁니다. 1장 27절에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 잘 나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여러분 우리가 경건한 예배, 경건한 삶 이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여러분 경건하다는 것이 뭡니까? 성경은 이것을 경건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는 겁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신앙의 행위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 보다 내가 행하는 신앙의 행위로 말미암아 누군가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 이사야 58장 6~7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금식은 뭐였습니까? 여러분 사람들은 금식을 뭐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음식을 굶는 것, 밥을 먹지 않는 것 이것을 금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짜 금식은 뭐였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잠잘 곳이 없는 자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것, 헐벗은 자에게 입을 옷을 주는 것, 이것을 하나님은 금식이라 말씀하십니다. 참된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경건은 뭐죠?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짜 경건입니다. 그다음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 세상은 나의 이득을 위해서 사람들을 도구와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합니다. 그런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겁니다. 사람들을 도구와 수단으로 악용하지 않고 이용하지 않고 욕망 추구적인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경건입니다.


그리고 2장 1~13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의 한 실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겁니다. 여기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직업, 그가 가지고 있는 학벌, 그의 경제력, 그의 집안 이런 것들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의 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굴종하고 돈이 없는 사람들을 하대하고 백인들 앞에서는 굴종적인 자세를 취하고 흑인들 앞에서는 군림하려 하고 이것을 한 마디로 하자면 외모로 사람들을 취하는 것이죠.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의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2장 1절부터 13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은 이런 것이다 라는 하나의 실례를 제시하고 있고 2장 2절에 보면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에서 여기 회당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모임의 장소로 회당이 언급된 것을 보면서 우리는 야고보서가 초기의 문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전쟁, AD 66년의 유대 전쟁 이후부터는 초대 교인들은 회당에 출입이 금지됩니다. 그런데 여전히 모임의 장소가 회당이라 언급된 것을 보면 이것은 유대 전쟁 이전이구나, 66년 이전이구나 야고보가 순교당했을 때가 AD 62년 경으로 봅니다. 이 야고보서는 AD 62년 이전에 기록된 서신이다 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믿음을 헬레니즘이 말하는 믿음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여러분, 여기 보시면 이 사람은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는 믿음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참된 믿음이 없는 겁니다. 이럴 수는 없는 겁니다. 나는 믿음은 있지만 행함이 부족해,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겁니다. 모든 참된 믿음 안에는 참된 행함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다는 것은 바꿔 얘기하자면 자기 스스로는 믿음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실제 이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겁니다. 그다음 2장 19절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여러분 보십시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압니다. 그것을 믿고 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관념론적인 믿음의 한 실례를 귀신을 가지고 비판하고 있는 겁니다. 진짜 믿음에는 참된 행위, 여기 참된 행위라는 것은 뭡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살아내는 순종의 삶이 있을 수밖에 없다, 머리로는 믿지만 삶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은 귀신 수준의 신앙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2장 21절부터 26절에서는 참된 믿음의 두 모델로 아브라함과 라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 뭐냐면 믿음과 행위를 구별하면 안 됩니다. 믿음을 통한 순종의 행위와 불신을 통한 불순종의 행위를 구별하셔야 됩니다. 믿음이냐 행위냐 이것이 아니라 진짜 믿는 자는 하나님께 참된 순종의 행위를 할수 밖에 없는 것이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불순종의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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