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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공동서신 녹취 4

by 【고동엽】 2022. 11. 29.
지난주에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히브리서는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 교부였던 오리겐이라는 사람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만 아신다 라고 애기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히브리서를 바울의 편지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중세 시대 유일한 성경이 바로 벌게이트라는 라틴어 성경입니다. 그다음에 구약과 신약을 영어로 번역한 킹제임스 버전이라는 성경이 있습니다. 이 벌게이트와 킹제임스 버전에서 히브리서의 제목을 뭐라 붙였냐면 사도 바울의 히브리서 이렇게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히브리서 하면 사도 바울이 쓴 편지라 생각한 겁니다. 이유가 뭐라고요? 중세 시대 유일한 성경이었던 벌게이트와 킹제임스 버전에서 히브리서의 제목을 뭐라고 정했습니까? 사도 바울의 히브리서,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히브리서의 저자가 사도 바울이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하는데 오리겐이 이야기 한 것처럼 바울의 저작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 아볼로가 저자야, 바나바가 저자야 다양한 사람들이 히브리서의 저자를 말해왔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만 아신다고 할 정도로 저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는, 그래서 21권의 서신을 어떻게 배치했습니까? 바울의 편지라고 확신하는 것을 앞부분에 배치하고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히브리서를 중간에 배치하고 그리고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쓴 공동 서신을 뒷부분에 배치한 겁니다. 히브리서는 저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서신입니다. 히브리서가 언제쯤 기록되었을까 라고 하는 것과 관련해서 여러 주장이 있긴 한데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뭐냐면 70년 이전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히브리서 안에 제의와 관련된 용어들이 많이 등장한다고 했는데 재밌는 것이 이 제사와 관련된 단어들이 나올 때 이것이 대부분 다 현재형으로 기록되었다는 겁니다. 제사와 관련된 단어들이 현재형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이 언제 무너졌습니까? AD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서 무너진 겁니다. 70년 이후에는 제사라고 하는 것이 현재형으로 기록되는 것은 어려운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안에 제사라는 용어가 현재형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예루살렘 성전이 존재하고 있을 때,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을 때 히브리서가 기록된 것이 아닐까 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히브리서가 70년 이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뭐냐면 96년 경에 로마 교회의 지도자였던 클레멘트라는 사람이 편지를 썼는데 그 클레멘트가 쓴 편지 안에 히브리서에 나와 있는 많은 말씀들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뭐예요? 96년 이전에는 확실히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와 관련된 용어들이 현재형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70년 이전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많고 96년 경에 로마 교회 지도자였던 클레멘트의 편지 안에 히브리서의 많은 말씀들이 인용된 것을 보면 아무리 늦어도 96년 이전에는 히브리서가 기록되었구나 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히브리서라고 부르는 책의 제목은 2세기말 경에 붙여진 겁니다. 처음부터 히브리서라는 제목이 있던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성경이 대부분 그러합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마가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처음부터 마태복음이라는 제목이 있던 것이 아니라 이후의 사람들이 이것은 마태가 쓴 것이야 라고 하면서 제목을 붙여준 겁니다. 히브리서도 2세기말 경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왜 히브리서라고 하는 책의 제목이 붙여진 거냐면 히브리서를 보시면 구약의 말씀이 많이 인용됩니다. 구약의 말씀들이 많이 인용된 것을 보면 구약을 많이 알고 있던 유대인들, 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보내진 편지가 아닐까 그래서 히브리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라고 해서 히브리서라는 책의 제목이 붙여진 겁니다. 학자들은 로마 교회에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편지라고 봅니다. 몇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히브리서 안에 쓰여진 헬라어가 고급 헬라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만약 유대인들에게만 쓰여졌다면 아람어로 쓰여질 가능성이 많았을 겁니다. 그들이 읽을 수도 없는 헬라어로 어떻게 쓰여졌겠습니까. 구약의 말씀이 많이 인용된 것을 보면 유대인들 아니면 디아스포라 유대인일텐데 헬라어로 기록된 것을 보면 아마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 보내진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 쓰여진 헬라어가 고급 헬라어입니다. 마치 오늘날 세계 만방에 흩어져 있는 교포들에게 편지를 보낸다고 했을 때 그들이 한글을 잘 모른다면 영어로 쓰겠죠. 그랬을 때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에게 편지를 보낸다고 한다면 좀 더 영어 가운데 고급 영어로 쓰겠죠. 그런 것과 비슷한 겁니다. 왜 로마에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 기독교인에게 보내진 것이라고 보냐면 히브리서에 기록된 헬라어가 일단 고급 헬라어이다,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고급 헬라어를 그래서 쓴 것이 아닐까 라고 보는 겁니다. 아까 제가 로마의 클레멘트라는 사람이 96년 경에 히브리서의 많은 말씀을 인용했다고 했는데 이 클레멘트라는 사람이 로마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 사람이 히브리서를 인용한 것을 보면 이 히브리서가 로마 교회에 보내진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고 그다음에 이방인들에게 보내진 것이라면 여기 할례라든가 음식 정결법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야 할 텐데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할례나 음식 정결법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는 그래서 아마 디아스포라 유대 기독교인일 것이라고 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13장 24절입니다. 13장 24절에 보시면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누가 문안하고 있는 거냐면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이 문안한다, 이달리야에서 온 교인들이 너희에게 문안한다, 편지를 받는 사람들과 이달리야에서 나온 교인들이 상호 알고 있는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종합해보면 일단 쓰여진 단어가 고급 헬라어이고 율법이나 할례 문제가 전혀 언급되지 않고 96년 경에 로마 교회 지도자였던 클레멘트가 히브리서 말씀을 인용했고 13장 24절을 보시면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이 너희에게 문안한다, 그래서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과 이달리야에서 나온 사람들이 서로 아는 관계였다 라는 것을 우리가 종합해보면 아마 히브리서는 로마 교회에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보내진 편지가 아닐까 이렇게 우리가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결국 뭘 말하려고 한 거냐면 구약과의 비교,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은 선한 싸움이 이뤄지는 현장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배교와 세상과의 타협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라는 겁니다. 뭐가 필요한 겁니까? 믿음의 인내가 필요한 겁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가야 되는 마라톤 경주이다, 한 번 구원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구원을 끊임없이 흔들어대는 사탄의 공격이 있다는 겁니다. 세상의 위협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 받았는데 이것을 지켜내야 된다는 겁니다. 가만히 팔짱 끼고 있어도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선한 싸움이 이뤄지는 현장이고 배교와 타협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광야 여정이다, 믿음의 경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달려야 되는 마라톤 경주이다, 뭐가 필요한 겁니까? 인내가 필요한 겁니다. 그 믿음의 인내를 지켜냈던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아서 우리의 현실 가운데서 이 신앙과 믿음을 지속적으로 지켜내야 된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의 주된 메시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히브리서가 기록된 배경, 제가 짧게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원래 유대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초대 교회로 개종한 사람들이 여러 이유로 인해서 다시 유대교로 역개종을 많이 했습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를 기억하는 것이 필요한데 하나가 로마의 박해였습니다. 재밌는 것은 로마는 유대 교인들은 박해하지 않았습니다. 초대 교회는 박해했습니다. 이때 초대 교회를 박해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뭐냐면 무신론자라는 이유에서입니다. 로마가 볼 때 유대 교인들은 유신론자이고 초대 교회인들은 무신론자입니다. 여기서 유신론, 무신론 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로마 제국이 인정하는 종교를 믿으면 유신론이고 로마 제국이 인정하지 않는 종교를 믿으면 무신론인 겁니다. 로마는 유대인들이 믿었던 야훼 하나님은 신으로 인정해 줬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가 믿었던 예수는 신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야훼 하나님을 믿는 것은 로마 입장에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가 예수를 신으로 믿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왜요? 로마가 인정하지 않는 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인정하는 신을 믿으면 유신론, 로마가 인정하지 않는 신을 믿으면 무신론이었습니다. 이때 로마는 무신론자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유대교 신앙을 가질 때는 로마로부터 핍박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로 개종하고 나서는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게 된 겁니다. 이 박해의 상황 속에서 다시 로마의 박해가 없는 유대교로 역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게 된 겁니다. 두 번째는 유대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 초대 교회로 넘어왔을 때 유대교와 초대 교회의 예배를 비교해 보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면 유대교는 종교 제의 자체가 굉장히 엄숙합니다. 종교 제의 자체가 화려합니다. 그 거대한 성전에 제사를 지내려고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성전에는 하루 종일 레위인들의 화려한 찬양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칠 때 그 모든 절차가 얼마나 엄숙합니까? 거기 가게 되면 거룩한 예복을 입고 있는 제사장들이 거닙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예배는 오늘날로 이야기 하자면 마치 집안에서 드려지는 가정 예배와 같은 겁니다. 몇 명 모이지도 않습니다. 대부분 가정이라고 하는 공간에서 모임을 갖습니다. 거기에 화려한 예복을 입은 제사장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유대교 예배와 초대 교회 예배를 비교해 보자면 마치 초대 교회 예배가 가정에서 드려지는 구역 예배라면 유대교의 예배는 마치 큰 교회에서 드려지는 주일 공예배와 같은 겁니다. 뭔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했을 때 화려함, 엄숙함 이런 것에서 초대 교회가 유대교에 비해서 많이 밀렸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원래 유대교 신앙을 갖고 있다가 초대 교회로 넘어온 사람들이 다시 유대교로 역개종을 많이 한 겁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뭐를 강조하는 겁니까? 유대교가 중시하고 있는 천사, 예언자, 모세, 여호수아, 아론 이 모든 것들이 그림자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이다, 이 모든 것들이 약속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취이다, 예수가 이 모든 것들보다 우위에 있다, 그런데 핍박과 박해로 말미암아 우위에 있는 것을 저버리고 하위에 있는 것을 다시 붙잡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고 너무나 옳지 않은 일이다, 이것을 강조하면서 유대교로 역개종하려는 사람들을 막으려고 했던 변증서가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안에 보시면 굉장히 강력한 경고의 말씀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돌이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유대교로 역개종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그래서 절대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지 마라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굉장히 강력한 경고의 말씀들이 많이 나오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중요한 것이 예수님에 대한 설명 가운데 다른 본문에서는 볼 수 없는 놀라운 특징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대제사장 기독론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뭐라고 설명하고 있냐면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 4~6장입니다. 대제사장 기독론이라는 것은 히브리서에만 나오는 굉장히 놀라운 주장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여기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뭐라 반박합니까? 대제사장이 되려면 레위 지파가 되어야 되는 것 아니야? 그런데 예수가 레위 지파야? 이런 식으로 반박합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뭐라고 반박합니까? 레위 지파는 아니지만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했던 멜기세덱과 같다는 겁니다. 레위 지파는 아니지만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했던 이가 있다, 누구냐,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멜기세덱이라는 겁니다. 그 멜기세덱과 똑같이 예수는 레위 지파가 아니지만 그 레위인으로서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셨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의 주된 메시지입니다. 오늘 저희가 히브리서의 중요한 내용들을 살펴보았고 다음 주에는 1~13장까지 히브리서 내용들을 쭉 보면서 중요한 내용들을 함께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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