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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공동서신 녹취 5

by 【고동엽】 2022. 11. 29.
오늘은 히브리서를 본문을 찾아가며 공부하겠습니다. 성경 히브리서 1장을 펴주십시오. 오늘은 본문을 보면서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1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유대교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천사나 예언자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 이것을 강조합니다. 1장 4~5절을 보시면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그다음에 14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이렇게 말합니다. 1장을 보시면 천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입니다. 천사들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목적이 뭡니까? 구원 얻은 백성들을 섬기라고 천사들을 보내십니다. 이 천사가 하나님이 부르신 영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성경에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 또는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이 땅 가운데에서 온전히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말씀, 그분의 행함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라는 것을 말과 행위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밝히 드러나는 것을 뭐라 하죠? 계시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천사, 예언자라는 중간 매개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때 매개자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하신 것은 100인데 80만 전하게 되면 우리는 80만 하나님의 뜻이라 알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제대로 알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려주셨다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예수님은 동영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알려주신 분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천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라고 보낸 존재이고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이고 그래서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천사보다 예수가 우위에 있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1장입니다.


그다음에 3장 15~19절을 보시면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40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3장 15~19절은 출애굽 1세대가 어떻게 실패하게 되었는가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뭐를 강조하고 있는 거냐면 히브리서의 주된 핵심 가운데 하나가 출애굽 1세대의 불순종을 본받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은 어떤 본문의 주제죠? 신명기의 주제입니다. 출애굽 1세대의 불순종을 본받지 말라, 여러분 출애굽 1세대가 어떻게 실패하게 된 거죠? 이들은 출애굽은 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힘 있게 걸어가지 못하고 다시 애굽을 향해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들이 실패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환애굽이었습니다. 바로의 통치,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그 애굽으로 이들은 다시 돌아가려 했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가나안으로 향해 걸어가는 걸음이 너무 힘들고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실패한 현장이 어디죠? 광야였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가 혼재된 곳이 광야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뭡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의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부재는 뭡니까?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신 것 같고 더이상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 것 같은, 이제 하나님과 우리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재 현장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가 혼재된 곳이 어디였습니까? 바로 광야입니다. 출애굽 1세대는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재로 인하여 넘어집니다. 실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힘있게 걸어가지 못하고 그들을 속박하고 노예로 부려먹었던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출애굽 1세대는 실패한 겁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출애굽 1세대의 실패를 강조하면서 수신자들에게 뭐를 말하려고 하는 겁니까? 출애굽 1세대의 실패를 본받지 말라는 겁니다. 이유가 뭐냐면 히브리서의 수신자들도 지금 넘어질 위기에 처해있는 겁니다. 출애굽 1세대와 똑같이 광야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도 경험하지만 하나님의 부재도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처해 있는 상황 자체가 출애굽 1세대가 경험한 광야와 똑같다, 여기서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실패했지만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이 왜 실패하게 되었는가, 그래서 믿음의 인내,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함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부재를 이겨낼 것을 촉구하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 3장 말씀입니다. 19절 보시면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함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머리로는 믿었겠죠. 입으로는 믿었겠죠. 그런데 그것은 진짜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고백을 신앙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고백에 걸맞은 믿음의 삶이 필요하다, 그런데 출애굽 1세대는 고백은 멋들어지게 많이 했지만 그 고백에 걸맞은 믿음의 삶이 없었다, 그들은 그것 때문에 실패했다, 그 실패를 뛰어 넘어서 머리와 입술로서의 고백을 뛰어 넘어서 삶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드러낼 것을 촉구하는 것이 바로 3장 말씀입니다.


그다음에 4장 12절을 보시면 여기 말씀의 능력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이것이 바로 말씀의 능력인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내가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데, 머리로는 말씀을 달달 암기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말씀이 얼마나 능력이 없는가, 그렇게 많은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설교 아무리 많이 들어봤자 성경 아무리 많이 읽어봤자 사람 안 바뀌어, 생각도 안 바뀌고 삶도 안 바뀌어, 결국은 말씀의 능력 없음을 증거하는 부정적인 모델이 되는 겁니다. 내가 말씀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한 구절이라도 그 말씀과 제대로 대면함을 통하여 말씀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은 어떤 능력이 있습니까? 살아있고 활력이 있고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고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합니다. 머리로 얼마나 많은 말씀을 알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의 능력이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증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5장 11절부터 14절을 보시면 이 히브리서를 받고 있는 독자들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벅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마치 뭐와 똑같죠? 고린도 교회와 똑같은 겁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책망하지 않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밥을 먹이려고 했는데 너희에게 젖밖에 먹이지 못했다, 이유가 뭐에요? 너희가 신앙 안에서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똑같죠. 히브리서의 수신자들과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동일한 상황 가운데 처해있는 겁니다. 신앙 안에서 성장을 이뤄내지 못하고 여전히 어린 아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지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는 하지만 내가 원할 때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필요를 채워줘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단계 이것이 바로 신앙 안에서 어린아이 단계입니다. 너무나 자기 중심적인 신앙인 겁니다. 이기적인 신앙인 겁니다. 이 신앙을 뛰어 넘어서 어른 단계가 되면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단계로 성장해 가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고린도 교회와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어린아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13절입니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그다음에 6장 4~6절입니다. 지난주에도 잠깐 보았습니다. 6장 4~6절 이 말씀 때문에 서방 교회가 히브리서의 정경성에 대해서 오랜 세월 동안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정말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말씀을 보실 때 이런 무서운 경고들이 많습니다. 한 번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가 광야 여정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끝장내었다, 이런 잘못을 범한 사람은 다시 회개할 수 없다, 너무나 엄중하고 분명하게 한 번 배교하게 되면 절대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 바로 6장 4~6절 말씀인 겁니다. 정말 그러할까? 우리가 한 번 배교하게 되면 우리가 아무리 회개한다 한들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건가 이렇게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히브리서가 경고의 맥락 가운데 이렇게 엄중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읽을 때 항상 기억하셔야 될 것이 뭐냐면 이 모든 말씀들이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신앙인들을 권고하기 위한 맥락에서 이 말씀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뭔가 경고를 할 때 권면을 할 때 강하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경고의 맥락에서 강하게 말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을 꼭 기억해주셔야 됩니다.


7장을 보시면 7장은 15절을 보겠습니다.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히브리서의 중요한 특징이 예수를 뭐라고 규정했습니까?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다, 이것을 제사장적 기독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서에만 나오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제사장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장하게 되면 당장 사람들이 뭐라 반박합니까? 제사장은 어느 지파에서 나와야 합니까? 레위 지파에서 나와야 되죠. 그런데 예수님은 유다 지파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가 아닌 예수가 어떻게 제사장이 될 수 있냐 바로 이런 반박이 나올 수 있는 겁니다. 이 반박에 대해서 뭐라고 히브리서는 답변을 하냐면 레위 지파가 아니었지만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한 존재가 있다는 겁니다. 누구죠? 바로 멜기세데렉이라는 겁니다. 7장 15절을 보시면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레위 지파가 아니지만 제사장 역할을 담당했던 멜기세덱과 같은 존재가 또 탄생했다는 겁니다. 그가 누굽니까? 바로 예수라는 겁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해 반박하고 있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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