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에서는 9절과 13절입니다.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여러분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이 뭐죠? 바로 시내산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시내산 언약과 같지 아니하다는 겁니다. 여기 언약이라는 것은 뭐냐면 바로 새 언약입니다. 8장은 뭘 이야기하는 거냐면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옛 언약이 폐기되고 새 언약이 체결되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13절입니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라.”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다음에 하나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했습니다. 언약이라는 것이 뭡니까? 피로 맺는 약속입니다. 생명을 담보로 맺는 약속입니다. 언약을 체결할 때 A와 B 두 당사자가 서로 쌍방에게 약속을 한 가지씩 합니다. 그리고 짐승을 쪼개어 죽인 다음에 쪼개어진 짐승의 반반을 양쪽 사이드에 둡니다. 그리고 언약의 당사자인 A와 B가 쪼개진 짐승 사이를 함께 지나갑니다. 그러면 언약이 체결되는 겁니다. 왜 쪼개진 짐승 사이를 언약의 당사자들이 함께 걸어가는 겁니까?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는데 내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경우에는 쪼개어 죽임 당한 저 짐승처럼 나를 죽여도 좋다, 이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생명을 담보로 맺는 약속, 피로 맺는 약속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다음에 시내산에서 하나님만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보시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난 적은 없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은 적은 없지만 하나님만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했죠?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라는 것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을 믿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겸하여 섬기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우상숭배의 핵심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한마디로 하자면 하나님만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과 바울, 하나님과 아세라, 하나님과 다곤, 하나님과 그모스, 하나님과 밀곰 이렇게 하나님과 다른 신을 끊임없이 겸하여 섬겨왔습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겠다고 했던 이스라엘의 언약, 약속이 파기된 겁니다. 하나님이 예언자를 보내셔서 끊임없이 이스라엘이 언약을 위반하고 있다,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돌이킬 것을 끊임없이 깨우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끝내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이 옛 언약이 파기된 겁니다. 하나님이 이제 새로운 언약을 이스라엘과 체결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8장입니다. 중요한 것이 뭐냐면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약속한 언약 백성이다, 이 언약 체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언약을 신실하게 준수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떤 착각에 빠졌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시겠어,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겠어, 이런 자신만만함이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언약 체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언약을 신실하게 준수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9장 4절을 보시면 여기서 구약과 다른 말씀이 하나 나옵니다. 구약에서는 언약궤 안에 언약의 두 돌판만 있다고 말하는데 여기 9장 4절에서는 그 언약궤 안에 언약을 기록한 언약의 두 돌판 뿐만 아니라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그 언약궤 안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절입니다.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다.” 이것이 구약의 말씀과 다른 주장입니다. 그다음에 9장 7절이 중요합니다.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갑니다. 지성소에 대제사장이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속죄일이라고 하는 7월 10일에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9장 7절은 우리에게 뭘 말하는 거냐면 이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언약의 피를 가지고 들어간다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9장을 자세히 보시면 히브리서 저자의 주장에 대한 반박과 그 반박에 대한 대답이 9장에 나오는 겁니다. 이런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다, 이렇게 주장하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질문하냐면 예수가 사역하는 현장이 어디냐 여기에 대한 저자의 답변이 뭐냐면 하늘 성소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가 바치는 제물이 뭐냐 이 질문에 대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는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치신다 그러면 사람들이 또 이렇게 반박합니다. 지금도 예수는 자기의 몸을 끊임없이 제물로 바치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저자는 또 뭐라고 반박하냐면 예수님의 제사는 한번에 완성되어졌다는 겁니다. 더이상 예수는 그 제사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는 지금 뭘 하고 있냐, 그의 백성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고 계신다 이것이 바로 9장의 강조점입니다. 10장에서는 35절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지금 우리가 걸어가는 삶의 여정은 광야길입니다. 배교와 세상과의 타협의 위협이 도사리는 곳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뭐를 강조하고 있습니까?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는 겁니다. 그 담대함 가운데 신앙을 굳게 붙잡아라,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11장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믿음 장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헤브라이즘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머리와 입술로만 고백하는, 인지적인 동의, 어떤 문장에 대한 수용이 아닙니다. 11장이 말하는 믿음은 삶을 통해 증거된 믿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에게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갔던 그 믿음의 길을 보여줌을 통하여서 그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갔던 그 믿음의 길을 담대하게 걸어갈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 11장 믿음 장의 목적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은 뭐와 동의어냐면 신실함과 동의어입니다. 믿음은 인내와 동의어입니다. 신실하게 인내함 가운데 그 믿음을 지켜낼 것을 촉구하는 것이 11장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믿음을 갖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뭡니까? 그 믿음을 신실하게 지켜내는 겁니다. 1절 보시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라는 것들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신앙인들은 뭐를 바랍니까?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완성을 바랍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구현되는 것을 바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여기서 바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실상이라는 것은 뭡니까?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지금 살아내는 것, 현실로 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진짜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다음에 29~30절을 보시면 여기 재밌는 말씀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11장 29절과 30절을 보시면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이 쭉 언급되는데 누구도 믿음의 사람으로 언급되냐면 출애굽 1세대가 믿음의 사람으로 언급됩니다. 여기서 이제 우리가 뭘 알 수 있냐면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그 개인의 삶 전체에 대한 평가가 아 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 전체가 믿음의 사람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건 안에서 그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드러낸 것이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여기 보시면 입다, 삼손 이런 사람들도 믿음의 사람으로 언급됩니다. 여러분 입다의 삶 전체가 믿음입니까? 삼손의 삶 전체가 믿음인 건가요?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면 11장 29~30절을 보면 출애굽 1세대가 홍해를 건넌 것, 여리고 성을 정복한 것 이것도 믿음의 사건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는 출애굽 1세대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드러냈던 겁니다. 그런데 출애굽 1세대의 삶 전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삶은 아니었던 겁니다. 여기서 뭘 알 수 있는 거냐면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된 이 믿음의 사람들의, 이들의 삶 전체를 하나님은 믿음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건 속에서 이들이 자신의 믿음을 드러낸 것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9절 보시면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라고 하여 출애굽 1세대가 홍해를 건너고 여리고 성을 정복한 것을 믿음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1세대의 삶 전체가 믿음의 삶은 아니었다, 이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12장 16절입니다. 여기 망령된 자의 모델로 에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에서라고 하는 사람은 장자의 명분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을 존귀하게 붙잡지 못했습니다. 이런 에서를 예로 들면서 히브리서 저자는 뭐를 말하려고 하는 겁니까?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자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12장 16절입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는 겁니다.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나는 구원은 따놓았어 이렇게 착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결국은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것처럼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자들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는 것이 바로 12장 16절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아파트 분양권을 당첨 받는, 로또를 얻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옴, 하나님의 백성이 됨, 그러니까 어떤 자들이 구원 안에 계속 머무는 겁니까? 오늘도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고자 하는 자들,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 안에 머무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은 받았지만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통치 바깥으로 뛰쳐 나가고자 하는 자들은 현재적 구원에서 실패한 겁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출애굽 1세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을 이미 따놓은 당상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누구를 모델로 제시했습니까? 에서입니다. 13장 13절입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여러분 영문 밖 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영문 밖이 있으면 영문 안도 있겠죠. 여기 영문 안이라는 것은 예루살렘으로서 유대교를 상징하는 겁니다. 영문 밖이라고 하는 것은 골고다 언덕으로서 기독교를 상징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이 나아가야 할 곳이 어딥니까? 신앙인들이 있어야 될 곳이 어딥니까? 바로 예루살렘 성전, 유대교가 아니라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골고다 언덕, 영문 밖이라는 겁니다. 이미 수신자들에게 예수의 그 길을 신실하게 따라가자 라고 저자는 권면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22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히브리서의 중요한 특징은 권면의 말씀이다, 이 권면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설교이고 히브리서는 편지로 보내진 설교문이다, 목적은 뭐였습니까? 유대교로 역개종하는 자들에게 새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 머물 것과 예수의 길을 끝까지 신실하게 인내함으로 걸어갈 것을 촉구하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를 기록한 목적입니다. 오늘 우리가 1~13장까지 본문을 살펴보면서 히브리서의 중요한 내용을 살펴보았고 다음 주에는 신약 성경의 아모스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야고보서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고보서를 미리 한 번 읽어주시고 제 강의를 들으시면 더 유익할 것 같습니다. 한 주간도 강건하십시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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