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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공동서신 녹취 15

by 【고동엽】 2022. 11. 29.
오늘 공동서신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 요한 2서와 3서 유다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2서는 13절까지 되어 있습니다. 요한3서는 15절까지입니다. 제가 강의를 할 때 그런 말씀 드렸습니다. 전서와 후서가 있다고 할 때 전서가 후서보다 길다, 그리고 1서, 2서, 3서가 있다고 할 때 1서가 길고 그다음 2서가 길고 3서이다 그런 말씀 드렸는데 2서, 3서 보시면 2서는 13절까지 있고 3서는 15절까지 있어서 3서가 더 긴 것 아닌가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길다라고 하는 것은 절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서신에 사용된 단어를 가지고 판단하는 겁니다. 그래서 보시면 요한2서는 13절까지 있지만 단어는 245개의 단어가 사용됩니다. 3서는 15절까지 있지만 219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은 작지만 요한2서가 요한3서에 비해서 보다 많은 단어가 사용되었고 분량이 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의 27권을 보시면 가장 긴 장은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은 28장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분량으로 보았을 때 가장 긴 본문은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은 24장까지 있지만 어떤 장은 한 장이 80절 이렇습니다. 그래서 장으로 따지면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이 제일 길지만 분량으로 보게 되면 누가복음이 신약에서 가장 긴 본문입니다. 그래서 절로 분량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된 단어 그래서 요한2서가 요한3서 보다 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2서는 요한1서와 유사합니다.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하여 사고했던 영지주의 이것을 배격하고 올바른 진리 안에 거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 요한2서의 목적입니다. 요한2서와 1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이단에 대한 배척, 참된 진리 안에 거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단에 대한 배척과 참된 진리 안에 거할 것을 촉구하다 보니까 1서와 2서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는 단어가 뭐냐면 진리, 사랑, 계명 이런 단어들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요한2서 1장 1절 보시면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2서를 보시면 발신자가 자기를 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장로입니다. 요한은 자기를 장로라고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장로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한 교회만을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를 감독하는 여러 교회를 목회하는 자를 장로라고 불렀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보는 것처럼 여기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담당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시면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나옵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이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자기를 장로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장로는 소아시아 오늘날 터키 지방이죠. 이 터키 지방의 일곱 교회를 담당했을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일곱 교회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수신자가 누구죠?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라 되어 있습니다.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 장로의 편지를 받는 수신인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부녀를 뜻하는 헬라어가 퀴리아라는 단어입니다. 이 퀴리아라는 것은 뭐냐면 주님을 뜻하는 것이 퀴리오스 아닙니까. 퀴리아는 여성형입니다. 주님의 것 이런 겁니다. 뭐가 주님의 것이죠?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도 여성형입니다. 여기 나와 있는 부녀라고 하는 것은 퀴리아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주님의 것을 가리킵니다. 뭐가 주님의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여기 택하심을 받은 부녀, 퀴리아, 주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개교회를 가리키는 것이고 거기 그의 자녀들이라는 것은 그 개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신앙인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겁니다. 여기 나와 있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한다는 것은 주님의 것인 개교회와 그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신앙인 한 명, 한 명에게 편지한다는 말입니다.


1장 7절을 보시면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요한1서와 똑같은 겁니다. 적그리스도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이 영지주의의 주장입니다. 영지주의는 뭐라고 주장했다고 했습니까? 예수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데 예수가 세례 받을 때 메시아가 예수에게 임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메시아가 예수를 떠났다는 겁니다. 예수와 메시아는 전혀 별개의 존재이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영지주의의 주장이었고 초대 교회는 뭐라고 주장하는 겁니까? 예수가 메시아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이다 이것을 주장했던 것이 초대교회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와 2서는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반박, 그래서 영지주의 이단의 미혹에 넘어지지 말고 참된 진리를 붙잡을 것을 촉구하는 것이 바로 요한1서와 2서이고 이제 3서로 넘어가겠습니다.


요한3서 1장 1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 하노라.” 보시면 바울 서신도 처음에는 교회에게 보낸 편지가 앞에 나오고 그다음에 개인에게 보낸 편지가 뒤에 나오죠. 요한 서신도 마찬가지입니다. 1서와 2서는 교회에게 보낸 편지이고 3서는 가이오라는 개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3서는 가이오라는 개인에게 보냈습니다. 핵심은 뭐냐면 으뜸 되기를 좋아하고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았던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디오드레베를 본받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선한 것을 행하는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을 본받아라, 그 데메드리오를 지원해라 이것을 말하는 것이 요한3서입니다. 요한3서를 한 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악한 자를 본 받지 말고 선한 자를 본 받고 선한 자를 지지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요한3서의 중요한 메시지인데 1서와 2서와 3서의 중요한 차이를 먼저 하나 기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서와 2서는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반박입니다. 참된 진리를 붙잡을 것을 촉구합니다. 그런데 3서는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은 아닙니다. 3서에 보시면 가이오라는 사란, 디오드레베, 데메드리오 이런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진리와 비진리의 갈등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다 영지주의 이단을 배격합니다. 참된 진리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디오드레베라는 사람과 데메드리오 또는 디오드레베라는 사람과 장로는 갈등합니다. 무엇 때문에 갈등하냐면 선교 정책이 다른 겁니다. 그래서 1절에 이 가이오라는 사람은 장로의 선교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장로와 가이오와 데메드리오는 한 편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선교 정책을 행하고 있냐면 순회 전도,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순회 전도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지역 교회가 서포트 해야 된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장로, 가이오,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행하고 있는 선교 정책입니다. 여기의 반대편에 누가 있냐면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디오드레베는 뭐냐면 지역 교회의 목회와 지역 교회의 신앙 교육은 지역 교회가 담당해야지 누군가가 순회 전도를 하면서 지역 교회를 관리하고 감독하고 목회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1서와 2서가 진리와 비진리, 정통과 이단이 갈등이었다면 요한3서는 선교 정책의 갈등입니다. 한마디로 하자면 순회 전도자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경고의 서신이 요한3서입니다.


요한3서 1장 2절 보시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것은 그 당시에 일반적인 덕담입니다. 요한3서 1장 2절의 말씀을 가지고 조용기 목사님이 3박자 축복이라는 것을 만든 겁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하나님은 3가지 복을 주길 원하신다, 첫째가 뭐죠? 영혼의 축복, 두 번째가 범사에 잘됨, 이 범사에 잘됨이라는 것을 물질의 축복, 세 번째가 강건하기를 이것은 육신의 건강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3가지 복을 주시길 원하신다, 하나가 영혼의 복이고 또 하나가 물질의 복이고 또 하나가 육신의 강건함이다 이것이 소위 3박자 축복입니다. 문제는 뭐냐면 이것을 순서대로 영혼의 복을 받은 사람이 물질의 복과 육신의 건강의 복을 받는거다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러분 만약 영혼의 복을 받은 사람이 이 땅에서 물질적으로도 부유하고 육신적으로도 굉장히 건강하다 라고 말한다면 오늘날 돈이 없는 사람들이나 많은 질병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은 다 영혼의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만약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회심한 이후의 사도 바울이나 예수님이나 마치 하나님께 영혼의 복을 받지 못한 사람처럼 된 겁니다. 바울의 인생을 보십시오. 바울의 인생을 가르는 전환점이 다메섹 도상 사건인데 이 다메섹 도상 이전에 바울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눠 보시면 바울의 전반부, 너무나 화려한 가문이죠. 로마 시민권 있었죠. 부유했죠. 10대 초반에 예루살렘에 와서 유학을 했죠. 승승장구하는 유대 관원이었죠. 얼마나 잘 나갔습니까. 도리어 다메섹 도상 이후에 바울은 사람들이 볼 때는 너무나 비참한 삶을 지속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 이후에 그는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겁니까? 영혼의 복을 받지 못한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요한3서 1장 2절에 나와 있는 말씀을 신앙인이 신앙인에게 건네는 덕담, 이런 말씀으로 이해해야지 이것을 가지고 어떤 하나의 신학적 교리를 만드는 것은 위험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 물질의 복도 받는 것이고 육신의 건강의 복을 받는 것이다 라고 한다면 사실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믿음의 인물들과 맞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가지고 거기서 하나의 정통 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위험한 것처럼 여기 1장 2절에 나오는 하나의 덕담을 가지고 신앙 안에서 우리가 마치 받아들어야 될 어떤 내용을 만드는 것은 비약이 심한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한3서 1장 2절의 말씀을 가지고 조용기 목사님이 3박자 축복이라고 하는 하나의 주장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영혼의 복을 받은 자가 물질의 부유함과 육신의 강건함이라는 복도 받는다, 이것을 순차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지지하기 어려운 우리가 수용하기 어려운 주장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9~10절을 보면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여기 우리가 바로 순회 전도자들을 말합니다.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은 순회 전도자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를 맞아들이지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여기 교회에서 내쫓았다 라는 말을 통해서 아마 디오데르베가 자기의 가정을 교회 예배 처소로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대로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교회 공동체, 가정으로부터 내어 쫓았다는 말입니다. 요한3서는 1서와 2서와 다르다고 했습니다. 요한1~2서는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입니다. 정통과 이단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요한3서는 정통과 이단의 싸움이 아닙니다. 둘 다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선교 정책과 관련해서 이견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장로, 가이오, 데메드리오 이 사람들은 순회 전도자들을 통한 복음 전도, 순회 전도자들을 통한 지역 교회의 신앙 교육 이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디오드레베라는 사람들은 순회 전도자들의 찾아옴을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한 개교회의 목회, 한 개교회의 신앙 교육은 그 개교회가 담당해야지 순회 전도자들을 통해서 관리 감독 받을 필요 없다, 그래서 순회 전도자들을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 9절을 보시면 디오드레베가 이 순회 전도자들을 맞아들이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가 으뜸 되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합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왜 디오드레베가 순회 전도자들을 영접하지 않았는가, 그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이 순회 전도자들이 오게 되면 자신의 리더쉽이 약화될 위험이 있겠죠.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의 리더쉽 만이 중심에 서기를 바랬던 디오드레베, 으뜸되기를 좋아했던 디오드레베는 순회 전도자들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 외에도 왜 디오드레베가 순회 전도자들을 환영하지 않았는가, 몇 가지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 재정적인 부담, 순회 전도자들이 오면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워야 되잖아요. 이런 재정적인 부담이 있을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요즘처럼 도시 문명이 아닌 이상 어떤 동네에 낯선 사람이 오면 동네에 있는 모든 사람이 경계할 것 아닙니까. 이 낯선 사람의 방문으로 인해서 혹시 지역 교회가 주변의 이웃들로부터 핍박을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의 리더쉽이 약화되는 것을 걱정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디오드레베가 이 순회 전도자들을 거부했는데 이런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 요한3서의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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