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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38-44)

by 【고동엽】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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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38-44)

 

이러한 재미있는 우화가 있습니다. 생쥐 한마리가 있었습니다. 이 생쥐는 항 상 '발발' 떨며
살았습니다. 왜냐하면은 고양이가 무서워 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어딜 가도 고양이가 나타
나 고 또 저기에 가도 고양이가 나타나는 것 같고 눈을 감아 도 고양이 꿈을 꿉니다. 도 저
히 견딜수가 없어서 발발 떨다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더랍니다.
"하나님 난 고양이가 무서워 못살겠는데 어떻게 좀 나를 고양이로 만 들어 주시기를 바랍니
다."
하나님께서 긍율히 여기셔서 고양이로 만들어 주었답니 다. 그러면은 기뻐하고 당 당해야
되겠는데 또 발발 떱 니다. 무서워서 견딜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너는 또 왜 이렇게 두려워 하느 냐?"
했더니 개가 무서워서 못 살겠습니다.
"어딜가나 개가 '멍멍'거리고 따라다니 는데 못살겠다"고...
"그래 그러면 내가 개로 만들어 주 마."
개가 된 이 생쥐는 또 무서워서 벌벌 떨고 도대체 가 구멍에서 나오지를 못합 니다.
"너 또 이렇게 개가 됐는데 이렇게 무서워하느 냐"
했더니,
"호랑이가 무서 워서 못살겠다"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애야, 내가 아무리
애써 도 네 마음이 생쥐라면 아무 소용도 없겠구나. 뭐 벌벌 떨바에야, 다시 생쥐로 돌 아가
라” 그래 다시 생쥐가 되었더래요. 여러분, 마음의 변화가 없으면 외적 조건이 아무리 달라
진다고 해도 그 매한가지입니다. 그것을 잊 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 은 언제나 모든 책임
을 환경 에 돌리려고 합니다.
"환경 이 이렇기 때문에 내가 이렇 다. 저가 이렇기 때문에 내 가 이렇다."
라고 말합니다 만은 환경과 처지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 에게 있는 것이라 말
입니다. 변화가 바뀌어지기를 바랍니 다. 그러면 내 마음도, 내 성격도, 내 인격도, 달라 질
것이라고 말합니다만은, 이 것은 잘못된 인간의 아주 원 초적 변명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
은 부부싸움을 할 때, 남편이 화를 벌컥 벌컥 내니까
"여보 당신 왜 이렇 게 자꾸 큰 소리를 내는 거 요?"
하니까 남편 하는말이 “난 원래 안 그랬는데 너하 고 살면서 이렇게 나빠졌 다” 이런 사
람은 참 힘든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돼요. 어떤 변화가 바꾸어지기를 바랍니다.
환 경과 나 어느쪽이 먼저입니 까? 내가 환경을 바꾸는 것 입니까? 환경이 나를 이렇 게
만드는 것입니까? 때로 는 우리가 욕망에 대해서도 이 끝없는 욕망, 욕망이 채 워지면 될
것이라고 전제 합 니다. 그래서 집없는 사람 은 집이 있으면, 병든 사람 은 건강만 있으면,
또 직업 이 없는 사람은 직업만 있으 면, 아무 소원도 없을 거라 고 말은 합니다만은 그저
뭐 그것 주어 줘도 마찬가지에 요. 욕심은 점점 더 커져요. 그 채울 수 없는 끝없는 욕 망에
사로 잡혀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근본적으로 이 욕망의 문제를 완전히 제어 하고 자기 자신
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물 질로도 출세로도, 명예로도, 그는 절대로 평안할 수
없습 니다. 자, 이제 우리는 생각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밖 에서 오는 변화 이건 내 힘 으
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이런 것을 우리는 기 적이라고 말합니다. 밖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 지는 이런 큰 역사 이 속에 서 특별한 기적이 나타나기 를 바랍니다. 우리
가 굴을 이렇게 들어다 보면 긴 굴 저 끝에 구멍이 조그만하 게 보입니다. 그리고 아무 것
도 안 보입니다. 그와 같 이 내가 생각하는 세계를 요렇게 꼭 굴을 들여다 보듯이 보고 거
기에다 맞추어 달라는 거에요. 여기에 맞지 않는 것은 뭐든 지 내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
들이지도 않습니다. 바 로 그러한 내 방식, 내 방법 대로, 내 세계관 안에서 하 나님의 세계
를 이해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게 됩니다. 기 적은 있습니다. 어찌 생각 하면 모든 것이 기적
입니다. 기적 아닌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기적이 없다고 합니다. 오 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말합 니다.
"그러하면 믿겠노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십 자가 밑에서 소리 지르는 것 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 못박
아 놓고 자기들이 말 이요, 자기들이 못박아 놓 고는 하는 말이
"뛰어내리 라. 거기에서 덜렁 뛰어내려 그러면 믿겠노라."
그렇습니 까? 정말 믿을까요? 저는 어떤 분을 한 분 아는데 시 아버지가 며느리를 사랑해
요. 병원에 한번 가보니까 그 며느리를 얼마나 사랑하 는지 몰라요. 그런데 이 시 아버지는
예수를 안믿어요. 그 며느리는 예수 믿는데 지 금 죽어가는 며느리를 놓고 요. 그 시아버지
가 하는말 이
"얘가 기도해서 병이 낳 고 얘가 다시 건강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그 다음에 나 는 예수
믿겠습니다."
뭐 그 러더라구요. 정말 기적적으 로 그 며느리가 건강을 회복 했어요. 그 영감탱이 교회 안
나왔어요. 마찬가지더라 구요. 그렇게 장담을 해놓 고, 큰 소리 해놓고, 나하 고 약속했는
데..... 그러니까 마찬가지에요. 마찬가지입 니다. 자, 오늘 십자가 밑에 서 소리 지르는 사람
보세 요.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는
"
뛰어내려! 뛰 어내리면 믿겠노라"
누구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겠노 라. 당신이 하나님이기를 믿 겠노라."
이런 얘기지요. 그 러나 이것은 허구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행 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쳤지 요. 장님의 눈을 뜨게 했지 요. 그리고 죽은 자를 살렸 지요. 5천명을 먹였지요. 예수
님의 생애는 온통 이적 과 기사로 충분합니다만은 바리세인 교인과 서기관들 끈질기게 따라
다니면서 예수 님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괴롭힌게 뭡니까? 하늘로 부터 오는 표적을 보
이라. 표적을 보이라. 또 다른 표 적, 지금 보인 것 말고, 또 다른 뭐 좀 화근한 뭔가 좀 천
지개벽같은 좀 기가 찬 기 적을 보이라고 추구합니다. 재촉합니다. 예수님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친 것 같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십 니다.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것이 없도다."
거기에 암시 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요나가 고래 뱃속에 사흘 동 안 있었지요.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내가 죽고 사흘 만에 부활 할 것이다. 이 부활 사건외에는 아무 표적 도 더 보일
것이 없다. 그 완악한 무리에 대해서 이렇 게 말합니다. 결국은 기적 에 대한 기적을 이해하
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기적을 잊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기적을 기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성
이 필요합니다. 기적 을 해석하는 해석 능력이 필 요합니다. 여러분, 건강만이 기적이 아니
에요. 병드는 것도 기적이에요. 안되던 사업이 잘되는 것만 기적이 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멀 쩡하던 사업이 무너지는 것 도 기적이에요. 문제는 '그 기적, 그 사건을 어떻게 이 해하
느냐?' 하는 해석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아마 도 기적중에 가장 큰 기적은 모름지기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기적이에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 운데 거하신다. 이
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가장 우주적 기적이요. 대표적 기적입니다. 그리고 임마누 엘
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이 보다도 더 큰 기적이 없어 요. 또 예수
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 알고보면 십자가 지시는 것 자체가 기적이요. 왜 예수가 죽어야
합니까? 이보다도 더 큰 기적이 없어 요. 가장 결정적 기적은 예 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예수님 심히 말씀하셨습니 다.
"밀알 한 알이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말씀하실 때 예 수님 뭘 생각했습니까? 내 가 죽어야 열매를 맺느리라. 이 길외에 다른 길
이 없음을 예수님 말씀 하십니다. 저 는 오래전에 시카고 대학에 강연하러 갔을때, 잠깐 쉬
는 시간에 친구하고 같이 박 물관을 방문해 보았습니다. 마침 거기에서 이집트에서 가져온
미라를 특별 전시하 는 시간이었습니다. 거기에 좋은 것을 보았습니다. 미 라를 많이 보았습
니다만은 미라를 해부해 놓은 것은 본 일이 없습니다. 3천년된 미 라를 쪼개서 해부해 놓은
것 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미라에 들어있는 사람은 불 쌍하다고 생각했어요. 꼭 그 저 북
어 같아요. 북어 바짝 말려가지고 말이에요. 그게 뭐 남아 있으면 뭐하고 썩어 있으면 뭐 하
겠습니까? 차 라리 불태워버리는 것만 못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 쨌든 그 미라를 보는
데, 거 기서 들은 얘기는 아닙니만 은 거기서 생각난 것입니다. 오래전에 TIME지에서 읽
었습니다. 3천년전 미라를 해부했더니 그 미라의 손에 밀알 몇 알이 있었답니다. 신기하게
생각해서 그 밀알 을 소중하게 땅에다가 심어 보았더니 싹이 나더랍니다. 믿거나 말거나 입
니다. 책 에 있는 내용이니 그대로 믿 어 봅시다. 여기 중요한 진 리가 있습니다. 믿알이 죽
은 사람의 손에 들려 있으니 까 3천년이 가도 그대로 있 습니다. 이것이 땅속에 들 어가서
썩어야 죽어야 싹이 나고 열매가 맺혀요. 이 중 요한 이치를 잊어서는 안됩 니다. 요새 우리
는 개혁을 원합니다. 새로움을 원하고 새로운 변화를 요구합니다. 옛것의 죽음, 옛 가치관의
매장, 완전히 죽어야 사는 역사가 있어요. 바득바득 안죽으려고 하니까 되는 일 이 없어요.
이것을 잊지 말 아야 합니다. 새로운 변화 란 바로 이 죽음에서 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날 거 기에서 싹이 나는 거에요. 그것이 아니면 한 알 그대로 있
다. 얼마나 기쁜말씀입니 까? 오늘 본문에는 대단히 중요한 만남의 관계가 있습 니다. 보세
요. 바로 이 십 자가를 지시는 이 장면속에 예수님 계시고 예수님 옆에 강도가 있습니다. 참
대조 적이지요. 예수님하고 강도 가 가지런히 만납니다. 또 이야기도 합니다. 죽어가면 서
이야기도 합니다. 하나 님과 인간의 만남입니다. 아주 극적인 만남이요. 믿 음과 불신앙의
만남입니다. 특별히 사랑과 증오의 만남 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극치요. 바로 예수를 죽이
는 사람들의 모습은 증오의 극치입니다. 세상에 사람을 이렇게 미워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이렇게 악해질수 있 습니까? 극단적인 악입니 다. 그리고 믿음과 인간적 이성의 만남입니다.
보세요. 신앙의 사건으로 볼 때는 엄 청난 구원의 사건이요. 합 리적 사건이요. 그러나 불
신앙적 이성으로 볼때는 저 들의 외침에 일리가 있습니 다.
"뛰어내려! 그러면 믿 으리라. 십자가에서 뛰어내 려! 그러면 믿으리라."
가 장 똑똑한 말 같은데 이것은 가장 어리석은 말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 다. 사
람들은 이만큼 잔악 하다는 것입니다. 철학자이 며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알 렝 핑킹 그라
운트'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쓴 책에 '잃어버린 인간성'이라고 하 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주제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동물과 사 람을 구별할라고 합니다. 이것
은 동물적인 것이요, 이것은 인간적인 것이다. 이것은 동물이고 이것은 사 람이라고 말하지
만은 이상하 게도 사람은 동물만 못하다. 왜냐하면은 사람은 유독히 자기 같은 동족인데, 같
은 종자인데, 같은 사람을 사 람으로 인정 하지 않는다. 그것이 동물에 없는 인간만 이 가지
는 악이라는 것이에 요. 보세요. 고양이는 고양 이를 대할때 고양이로만 대 합니다. 고양이
를 쥐로 대 하지도 않고 고양이를 개로 대하지도 않습니다. 각각 모든 동물은 같은 동족은
꼭 같이 대합니다. 그러나 사 람은 이렇게 같은 사람인데 도 사람을 죽입니다. 아프 리카에
가서 선교하는 선교 사님이 계셨는데 거기에 있 는 식인종 추장과 같이 앉아 서 얘기를 하
는데 마침 오래 전에 나온 신문이 있었습니 다. 그 신문을 보면서 선교 사가 걱정을 했습니
다. 전 쟁이 났습니다. 구라파에 전쟁이 났는데, 1차대전이 났는데, 많은 사람들이 죽 었다
고, 많은 사람을 죽인 다고, 걱정을 하니까 그 식 인종 추장이 묻기를
"몇 사 람이나 죽었어요? 열 사람 죽었어요?"
"아니요."

"백사 람 죽었어요?"

"아니요."

"천사람 죽었어요?"

"아니 요."

"그 참 이상하구만. 사 람의 고기도 안먹는다면서 왜 이렇게 많이 죽이노?"
식인종 추장이 이해를 못하 더라는 겁니다. 맞아죠. 사 람의 고기도 안 먹으면서 왜 이렇게
사람을 많이 죽여요. 그 식인종 만큼도 못 한거에 요. 왜 동물만도 못한거요? 동물 가운데는
적어도 자기 동족을 죽이지 않아요. 동 족을 잡아 먹지 않아요. 우 리 사람은 이상하게도 서
로 를 같은 인간 대접을 하지 않아요. 이렇게 죽여요. 나 찌때 보면은 육백만이나 되 는 사
람을 죽여요. 오늘도 남을 죽이고 그렇게 잔악해 요. 오늘 본문에 보는데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어요. 그리고 그 앞에서 소리를 지 릅니다. 뛰어내리라고 못 박아 놓고 무슨 짓입니까?
계속 이같이 모욕을 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놓 은 것은 육체적 고통입니다 만은,
모욕과, 희롱과, 욕 과, 조롱, 이 조롱은 정신적 고통이에요.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이면서 그
를 계속 짖 밟는 거에요. 존재차원에서 그를 짖밟아요.
"네가 하나 님의 아들이냐?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내리라!"
또 그의 능력을 희롱합니다. 남을 구원하고 많은 이적을 행하고 뭐 어쩌고 어쩌고 하면서
"어디 한 번 더 이적 을 해봐라. 뛰어내려!"
그 건 능력을 비방하는 것이지 요. 그 다음에는 관계를 또 비방합니다.
"하나님의 아 들이라며 어디 하나님이 구 원하시나 보자. 하나님이 네 편이냐? 아니면 하나
님이 너를 버렸느냐?"
이러고 또 비난을 합니다. 이 많은 저 주와 이 모욕 그리고 조롱 이 속에서 본문을 보세요.
예수님은 조용히 끝까지 용 서하시고, 사랑하시고, 인 내하시고, 이해하시고 믿습 니다. 보세
요.
"하나님, 저 들의 죄를 사해 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 가 상에서 맨 처음 하신 예 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 은 이 완악한, 이 엄청
난 죄인들을 아주 끝까지 사랑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대로 십자가에 죽어갑니다. 이보 다 더
큰 기적이 어디있습니 까?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 험받으실 때 마귀가 와서 시 험할때의 얘
기와 똑같은 얘 기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해 먹 어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에서 뛰어내려
라. 그러 면 믿겠노라."
오늘도 자기 나름의 조건을 만들어 놓고
"이것이 이루어지면, 내 뜻 대로 되면 그러면 믿겠노 라."고 하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얼마
나 '무서운 악'이라 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 늘도 엄청난 사랑의 계시가 있고, 큰 능력이
있고, 하 나님의 지혜가 여기 있습니 다만은 사람들은 이렇게 끝 끝내 하나님 앞에 대들고
있 습니다. 그러면 믿겠노라고 요. 여러분 잘 아는 유명한 독일에 작곡가 '멘델스존'이 있습
니다. 그 '멘델스존'의 할아버지가 '모세 멘델스존' 인데 이 '모세 멘델스존'은 키가 작고
꼽추였다고 합니 다. 꼽사등이에요. 그런데 어느날 돈 많은 장사하는 집 에 상인의 집에 초
대를 받아 서 갔었는데 그 집에 딸 하 나가 있는데 '프롬체' 라는 딸을 보는 순간 너무너무
이 뻐서 그만 순간적으로 사랑 에 빠집니다. 참을수가 없 어서 그의 방에 조용히 들어 갔습
니다. 물론 그 아가씨 는 본체도 하지 않습니다. 말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는 용 기를 내서 이렇게 물어봤다 는 것입니다.
"아가씨, 아가 씨는 결혼 하는데 있어서 하 나님이 남자와 여자 부부관 계를 이렇게 하나님
이 맺어 주신다고 하나님의 뜻을 믿 습니까?
"
그러니까
"믿고 말고요. 당신은요. 그렇게 말 하는 당신은요?"

"저요? 저 는 물론 믿지요.
그런데 이런 일이 있습니 다. 내가 어느때 환상에서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하 나님께서 내
게 예쁜 아가씨 를 소개하면서 '이 여자와 네가 앞으로 살아야 되겠는 데 그런데 이제 태어
날때는 네가 한 평생 사랑해야 할 여자는 꼽추로 태어날 것이 다. 너는 꼽추와 살아야 할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 모 세는 대답하기를 '아니올시 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꼽 추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정 그러시다면 내가 꼽추가 되겠습니다. 내가 되신 꼽 추가 되겠습니
다.' 하나님께 서 '그러면 네가 꼽추가 되 라.' 그래서 내가 꼽추가 된 것입니다."
그 때에 이 '프 롬체'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랑을 마음에 가지고 있느 냐?"고 그래서 감동이 되어 서 결혼했데요.
그렇답니다. 여러분, 내가 대신 꼽추가 되겠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지금 우리를 구원 하시기 위 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엄청난 사건 앞 에 이들
이 이렇게 소리를 지 를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랑 은 참는 것이요. 능력을 받 는 것이요. 십
자가요. 그리 고 부활이 있는 것이요. 믿 는자의 마음으로 십자가를 쳐다본다면 이것이 누구
를 위한 것입니까? 나 자신을 위한 것인데 오직 감사와, 감격외에 다른 무슨 생각이 있겠습
니까? 여기서 십자가 에서 내려오라고 할 수 있겠 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합 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 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 렇습니다. 나를 위한 십자 가요. 내 자신을 위한 십자 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쳐다보
면서 그 사랑의 엄청 난 계시 앞에 전혀 다른 이 의를 제기하지 맙시다. 이대 로 사랑으로
받고, 이대로 감사· 감격하고,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하여 사랑과 믿음 으로 응답하는 그런
생을 살 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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