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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지의 비유! (마 13:24-30/36-43)
그 첫째로 여기에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외의 다른 방향에서 본문을 생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사회학적이라든가 정치, 경제, 혹은 심리학적이라는 식의 접근으로 이 비유를 설명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제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하나님의 나라를 알기 위한 마음으로 이 비유를 대하여야 하고,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시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가라지 비유는 씨뿌리는 비유의 연속이라는 점입니다. 앞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비유에서 씨앗을 뿌렸는데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밭에, 더러는 가시덤불에, 더러는 옥토에 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마음 밭 중에서 문제는 옥토에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씨앗이 옥토에 떨어졌다고 해서 이제는 무사히 다 끝나는 것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를 않습니다. 옥토에 무사히 떨어졌으니 이제 시작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또 있습니다. 분명히 좋은 씨앗이 좋은 땅에 뿌려졌지만 가라지라고 하는 만만찮은 장애물이 등장하는 한 문제는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가리지 비유는 씨 뿌리는 비유의 후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의 주제로 돌아가 "하나님의 나라"라 했을 때에 우리가 먼저 총론적으로 생각할 것은 이 가라지 비유를 통하여 설명하는 교리적 배경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의도하는 바의 배경을 놓고 이 비유의 교훈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통하여 말하고 있는 근본적 교훈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과 함께 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밭에서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은 물론 생태계의 진화로 되는 것도 아니며 도덕이나 교양, 수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밖으로부터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서 그 말씀의 임함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되겠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마음 밭에 씨앗이 받아들여져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씨앗이 옥토와 같은 마음 밭에 뿌려져서 깊이 심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길가와 같이 씨앗이 떨어졌으나 새가 와서 곧장 먹어버려서는 안되겠습니다. 옥토와 같이 흙이 부드러운 밭이 되어서 씨앗이 온전히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말씀이 믿어지고, 받아지고, 순종되어져야 합니다. 말씀을 향하여 마음 문이 열려지고 또한 성령이 마음 문을 열게 하셔서 이 씨앗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깊이 심겨지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고 이것이 곧 중생입니다. 이 작은 씨앗이 들어가서 싹을 내고 점점 자라게 되는 것처럼, 곧 생명이 들어가서 시작하는 그것을 우리는 중생이라고 합니다. 중생이라는 말의 원 뜻은 위로부터 출생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 있는 것입니다. 땅에서 나는 것은 땅의 것이고 위에서 나는 것은 위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말씀의 생명 역사가 우리 안에 들어와지고, 받아들여지는 여기에서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미미한 것 같지만 생명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조금은 억지 같은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가끔 서양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이런 말을 해봅니다.
서양 사람들은 나이를 계산할 때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하여 만으로 치고 심지어는 어린아이를 계산할 때는 몇 달 며칠까지 말합니다. 이런 것에 비해 동양 사람들은 태어난 날에다 1년을 더하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이 나이를 물으면 한 살 뺀 후에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 계산을 할 때마다 나는 너희들 계산 방법보다는 우리가 훨씬 과학적이라고 농담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언제부터가 시작인데요? 비록 세상에 나오지 않은 어머니 뱃속의 생명이지만 생명은 생명이니 거기서부터 생일을 계산하는 것은 과학적인 것입니다. 생각하면 중생은 그러한 것입니다. 마치 바람이 불어도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처럼 자신도 잘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생명의 역사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의식하든 의식 못하든 이루어집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간에 가서 싹이 나면서 생명체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의 씨, 그 생명의 역사는 이처럼 신비롭고 소중한 것입니다.
다음 세번째로 생각할 것은 씨앗은 싹을 내는데 머물지 않고 계속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 자람은 주어지는 은총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씨앗은 자라기 위해서는 비가와야 하고 햇볕이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이는 다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농사는 땅에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조화에 달려 있습니다. 한 알의 작은 씨앗이 자라가기에 필요한 이슬과 단비와 바람과 햇빛 등 이 모든 것이 알맞게 주어져서 비로소 성장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자라나는 것입니다. 아주 조금씩 성장을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고 점점 인격적 존재로 성장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성장은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은 아니며 추수 때까지만 자랄 수 있습니다.
이제 네번재로 생각할 것은 자라야할 기한이 지나면 추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완성의 단계입니다. 여름 동안에 충실하게 자라면 산들바람이 불 때에 좋은 알곡을 맺을 수가 있고 그렇지 못하면 그래도 계절 따라 불가불 열매는 맺어야 하겠으니 조그맣게 맺힐 수밖에 없습니다.
추수할 때 보면 탐스럽고 참 충실한 이삭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조그마한 것이 가엾게 몇 개 달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쨌든 가을이 되면 여름 동안에 자란 대로 길가에 마른풀도 열매는 맺습니다. 상처 나고 비틀어진 것이라도 열매는 맺게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가을이 되었을 때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며 우연사는 더 더욱 아닙니다. 그 뜨거운 긴긴 여름날에 충실하게 자랐으면 크고 좋은 것으로 맺고, 잘못 자랐으면 보잘것없이 작은 것으로 맺힐지언정 열매는 맺어야 하는, 이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하고 또 거두어 들여야 하는데, 이때가 완성이 되는 때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다시 한 번 정리를 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이루어지고 교회와 함께, 복음 전파와 더불어 확장되어 나가며 마지막 때 주의 재림과 함께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적 의미에서 본 하나님 나라의 과정입니다. 이토록 중요한 교리를 본문 말씀은 간단한 비유를 통하여 아주 쉽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 성서 속에서도 이와 같은 역사적 예표를 찾아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죄악된 세상에서 홍해를 건너며 탈출하는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과 그 많은 시련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장을 합니다. 십계명을 받고, 환난을 당하고 전쟁을 겪으며, 만나를 먹고, 여러 가지 기적을 보는가하면 질병과 죽음을 목격하게 되고,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성장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이제 그 긴 고통의 여정에서 마지막으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이러한 전개는 개인적으로나 우주적으로나 혹은 교회적으로 동일한 입장에서 같은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리를 놓고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여서 추수할 때까지의 성장 과정, 이른바 교회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그 사이에 처해있는 우리는 이 받아들여진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지켜나가야 하는가? 또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한 번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심령으로 이 세상 떠날 때까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 가라지 비유의 주제입니다. 오늘 본문을 대할 때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타난 사실 그대로이지 결코 형이상학적 이론이나 추상적 논리를 말하고자함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비유를 생각할 때에는 언제나 하나의 초점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간혹 탕자의 비유처럼 두 개의 초점이 있는 것도 없지는 않지만 보통은 하나로 집약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외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돌려서 생각하려고 하면 그 비유의 뜻을 잘못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은 마귀가 와서 가라지를 뿌렸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도대체 마귀는 어디에 있으며 그 존재는 무엇이냐?고 생각의 다리를 놓기 시작하면 이원론 사상에 빠지기 쉬울 뿐만 아니라 엉뚱한 함정으로 빠져들어 가게 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런 문제들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가라지를 말씀하고 계시지만 초점은 알곡에 있지 가라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알곡에 중심을 두고 생각할 것이지 가라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는 것은 깊이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 가라지가 곡식처럼 곡식과 함께 자란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뿌려져 계속 같이 자라고, 선과 악이 함께 자란다는 이것은 기독교의 중요한 역사관입니다. 참으로 이 세상은 점점 악해지고만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선해지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밝아지고 있는 것입니까? 혹은 어두워지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이 밝아지고 있다고 보는 관점을 흔히 유토피아니즘(Utopianism) 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낙천적인 세계관에 반해 세상은 더욱 어두워지고 인간의 죄악과 타락상이 극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여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염세적 세계관, 즉 페시미즘(pessimism)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둘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입니까? 이들은 그것이 아니고 이것이라고 말하려 합니다만 기독교의 역사관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는 말씀은 악은 점점 더 악해지고 선은 더욱 선해져서 극과 극의 양상을 띠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 올수록 악은 더욱 극렬해지고, 반면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속에서 더 진실해지며 바른 신앙을 지켜나갈 것입니다. 이처럼 빛과 어두움은 언제나 함께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에도 알곡이 자라고 있는가 하면 가라지가 자라고 그리하여 둘이 함께 자라겠다는 것입니다. 알곡만도 아니고 가라지만도 아닙니다. 뿌리가 다르고 근원이 다르며 본질이 다릅니다. 그런데도 같이 모여 함께 자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어두움이 변하여 빛이 되고 빛이 변하여 어두움이 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씨앗이 다르고 뿌리가 다릅니다. 선은 선대로, 악은 악대로 그러면서도 공존하는 것이 오늘 성경이 말하는 역사관입니다.
악한 자는 점점 더 악해져서 자기의 악한 것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위선을 부리며 선한 척 하여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언젠가는 본색을 드러내고야마는 것입니다. 또한 선한 사람은 비록 악한 사람들 틈바구니에 숨겨져 있는 것 같아도 그 선은 반드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뿌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비록 미약하고 비실 비실한 것 같아도 근본적인 종자는 다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역사관입니다.
이처럼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므로 그 구별이 힘이 듭니다. 벼를 심을 때는 돌피가 있고 조를 심을 때는 가라지가 있는데 이것들을 구분하기가 대단히 힘이 듭니다. 자라는 것은 오히려 돌피와 가라지가 더 잘 자랍니다. 자라는 동안의 구별은 뿌리를 보지 않고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벼의 뿌리는 붉은가 하면 돌피의 뿌리는 하얗습니다. 그러니까 가라지를 제거하려면 뿌리를 보아야 알 수 있고, 뿌리를 보려면 뽑아야 하는데 그러다간 잘못 알곡을 뽑아버리기가 쉽습니다. 이처럼 자라는 동안에는 아슬아슬함이 있습니다.
가라지를 뽑는다는 것이 알곡을 뽑을 정도로 비슷하고 똑같아 보입니다. 오히려 더 보기 좋고 충실하게 자랍니다. 그러니까 양의 탈을 쓴 이리, 이것이 보다 큰 문제입니다. 현상은 비슷한데 본질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의 경우도 충심으로 행하는 선행이 있는가 하면 목적이 다른 데 있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길도 닦아주고 가로등도 달아주고 별 일을 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적이 다른 데 있기 때문에 선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어쨌든 밖으로 보아 좋은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도덕적 향락주의란 말까지 있습니다. 즉 선한 일이 기분이 좋기 때문에 한다는 것인데, 이는 선한 동기보다 자기 만족을 위한 극단적 이기주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좋은 목적도 되고 나쁜 목적도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국이 인디안들의 땅을 빼앗고 난 후 미안한 마음에서 그들에게 얼마나 잘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는 아메리칸 인디안 명부에 등록만 하게 되면 땅을 주고 집을 주며 월급과 생활비 은퇴비 등 그저 가만히 앉아서 놀고먹을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혜택을 주며 잘 해줍니다. 그런데도 똑똑한 인디안들은 이 명부에 등록을 하지 않고 그 편안한 조건들을 다 포기하고 나와 직접 벌어먹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정책은 백인들이 자기들을 죽이는 작업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할 일이 없으니 먹고 마시고 아편하고 그러자니 알콜 중독, 아편 중독, 싸움 등 생활이 엉망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구제하는 일에도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사실은 미운 사람에게 계속 돈을 주면 망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알아야지 준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뿌리, 즉 목적이 다르니 도리가 없습니다. 언제나 가짜는 아름답기 마련이고 위선자는 더 열심을 냅니다. 뿐만 아니라 귀한 일에는 언제나 가짜가 있기 마련이고, 가짜는 진짜보다 더욱 찬란하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구별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정한 시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급히 생각할 것이 없이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배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고전 4:5)고 하였습니다. 시시비비하면서 지나치게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그 누구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진정 잘 믿는다는 것은 죽을 때 보면 안다고들 합니다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보아야 아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판단하실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조급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판단은 나의 주관, 나의 기분에 치우칠 뿐만 아니라 흑백 논리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판단은 언제나 삼가 조심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가라지와 알곡이 공존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당장 벼락이라도 쳐서 악을 멸하지 않고 그대로 봐주시는가요? 계속 벼락을 치면 가능은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같아 걱정입니다. 또한 바꾸어 생각해 볼 때 선한 일을 하였는데도 당장 복을 안 주신다고 원망을 하면 아마 하나님께서는 조건을 거실 것입니다. "그래, 네가 선한 일을 하자마자 내가 복을 주겠다. 대신 잘못 악을 행하면 벼락을 치마." 이렇게 나오시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저 복 받는 것 연기해 주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미련하고 둔한 듯이 선하게 살아가노라면 언젠가는 다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서두르고 원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알곡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 알곡을 뽑아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악마 같은 인간 만 명보다 의인 한 사람 상하는 것을 더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셨습니다. 가라지 열 개를 뽑는다 하더라도 알곡이 하나라도 다쳐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여지는 악인 모두를 그대로 심판해 버리는 동안 선한 사람 하나라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넓고 크신 사랑으로 의인과 악인의 밭에 골고루 비를 내려주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결국은 택한 백성, 구원 얻은 백성이지 가라지 살찌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영양을 빼앗기고 손해를 보는 억울함과 불편이 있지만, 그것을 겪더라도 알곡은 다치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 과정을 통하여 의인을 연단 하셨다는 것입니다. 가라지와 함께 한다는 것은 괴롭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함께 있음으로써 서로 견제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긍정적이고 유익한 면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가라지와 같은 악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순수하게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고 환난을 통하여 강하게 되며 참된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성장입니다.
안일 무사하여 평안한 여건이 좋을 것만 같지만 그렇지를 않습니다. 이런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교인의 아들인데 너무 귀하게 자라서 한 번도 매를 맞아본 적이 없고 때려본 적도 없습니다. 게다가 공부도 잘하고 성품도 착하여 주위로부터 칭찬만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군대에 가보니 말이 말이 아니고 거친 욕지거리와 매 맞는 일이 다반사가 되자 급기야는 인생무상이라 하여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습니다. 세상에 이러한 인생이 있는 줄 몰랐다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적당한 욕도 먹고 매도 맞아 보아야 좋은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저도 군대에 처음 갔을 때는 뭐 이런 데가 다 있느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은 밤중에 장교가 내게 담배를 사오라고 하기에 "예" 하고서 있는데 또 다시 "담배 사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주셔야지요" 했더니 "이 놈아, 돈이 있으면 누구는 못 사와"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훈련을 받으면서 처음에는 나쁘게만 생각을 하였고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한 번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총알이 비오듯이 핑핑 하고 쏟아지는데 "돌격"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는 가라면 가야 하는 것이지 왜 가느냐?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 때 가서 "장교님, 지금은 곤란합니다" 했다가는 죽습니다. 뛰라면 뛰어야 하고 후퇴하라면 후퇴하는 것입니다. 명령대로 따를 뿐, 이치 따질 그 무엇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토록 중요하고, 그 모두가 다 훈련입니다.
일제 시대의 일본 군인 수첩에 보면 "군인은 요령을 본분으로 한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것을 다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도 맞아보고, 욕도 먹으며, 배신도 당하고, 누명도 쓰면서 곤욕을 치루어 보아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가라지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강하게 되며 지혜로워지고 또한 성장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하나님의 추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말적이기도 하고 현재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바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현재에도 하나님의 심판은 정한 시간에, 정한 사람에게, 정한 장소에서, 정한 방법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무어라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 종말적 심판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에는 열매가 맺히기 때문입니다. 추수기가 되면 알곡은 고개를 숙이는데, 가라지는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이제야 도리가 없습니다. 뿌리가 다른 결과가 여기에 나타난 것입니다. 교만하게 들고 있는 가라지의 빳빳한 고개가 이제는 잘라 버리기에 편리해진 것입니다. 어느 결정적인 시간에 이르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되면 누가 지옥에 가라고 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가게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모습이 드러나고 그 열매가 다르기 때문에 이제는 함께 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적인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과 모순에 대한 최종 해결은 두 가지의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종말적인 것, 따라서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서 그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선교적 의미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훈련을 받게되고 지혜로워지며 꾸준히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은 보다 더 크고 온전하게 확장되어 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서두르지도 말고 불평도 말 것이며 우리가 당한 이 처지에서 인내하며 바르게 성장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미 우리 마음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잘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야 하며, 그 열매는 추수 때가 오기 전에 충실하고 탐스러운 모습을 갖추게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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