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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기념비의 운명! (삼상 15:10-15)

by 【고동엽】 2024.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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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기념비의 운명! (삼상 15:10-15)

 

깊은 산 속에 고요한 연못이 있었습니다.  아침 햇살이 내려올 때 많은 짐승들은 이 연못으로 물을 마시러 왔습니다.  저마다의 몸짓을 해가며 그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사슴 한 마리가 끼어 있었습니다.  이는 고요하게 드리운 연못 그림자를 보면서 자기 뿔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잘생긴 사슴뿔을 딱 비추고 이리저리 보면서 그는 스스로 만족해했습니다.  다른 짐승들, 대머리처럼 아무 것도 없는 그 머리를 보면서 저것들은 참 불쌍하다 생각하고, 봐라 내 뿔이 얼마나 근사한가.  그 나뭇가지처럼 뻗어 올라간 그 뿔을 물에 비추어 보면서 혼자서 자기 모습에 감동하고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숲에서 사자가 나왔습니다.  으르릉 할 때에 모든 짐승들은 숲 속으로 쏜살같이 빠져 도망을 했지마는 이 사슴도 도망하다가 그 뿔이 수풀에 걸려 가지고 그는 더 도망가지 못하고 사자의 먹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이 사슴은 뿔 때문에 죽었습니다.  저가 자랑하던 그 뿔 때문에 그는 그 아침에 생을 마쳤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그 자랑하는 바로 그것이 나를 망하게 한다는 것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올해 초에 포춘(Fortune)이라고 하는 잡지에서 2001년 100대기업이 채택한 21세기 리더쉽이라고 하는 지도력을 제시했습니다.  그 제시한 리더쉽은 바로 써번트 리더쉽(Servent Leadership)입니다.  사실은 1977년에 로버트 케이 그린리브(Rober K. Greenleaf)라고 하는 분이 AT

C. S. 루이스라고 하는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밑을 내려다보는데 급급한 나머지 위에 계신 분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교만한 사람은 밑에 것만 내려다보면서 바로 위에 계신 분을 못 본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  그게 망조가 든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미국의 제1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  그는 그 옛날에 타자기가 없을 때니까 편지를 꼭 직접 손으로 써야되는데 친필로 편지를 쓰고 편지의 마지막 글은 꼭 이렇게 맺었다고 합니다.  '당신의 보잘것없고 충직한 하인으로부터'  당신의 보잘것없고 충직한 하인이 이 편지를 씁니다.  대통령의 편지였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당신의 보잘것없는 충직한 하인일 뿐입니다.  언제나 이 자세를 잃어버림으로 해서 사회는 시끄러워집니다 본인도 불행해집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울 왕이라고 하는 왕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해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아말렉과 전쟁을 벌입니다.  늘 그랬듯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만이 이길 수 있는 것이요.  이스라엘의 전쟁은 여호와께서 저들을 내 손에 붙였느니라 할 때만이 전쟁은 가능했고 승리도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나아가 싸워서 이겼습니다.  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는 곧장 자기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자기 승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인간은 어차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영웅호걸이든 천한 사람이든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미련해서 자기가 세상 떠난 다음에도 꼭 자기 이름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가만히 생각하면 기억하나마나 별거 아닌데.  나는 기념비를 근본적으로 싫어합니다.  어떤 기념비든.

비근한 얘기입니다마는 여러분 아시는 데로 소망교회에 묘지가 우리 수양관에 있습니다.  그래 거기 큰 비석을 만들어 놓고 이제 거기다가 '소망교회 성도의 묘' 이렇게 썼어요.  그리고 화장을 해서 그걸 거기에 갔다가 뿌리게 이렇게 돼있는데 벌써 수백 명이 들어갔습니다.  가끔 그것을 방문해보고는요 어떤 분은 이렇게 꼭 물어봐요 "목사님 이거 참 좋은 방법이긴 한데 고 비석 뒤에다가 조그맣게 내 이름 하나 쓰면 안될까요?"  그래서 제가 "글쎄올시다.  "그래 그 당신의 이름을 뒤에 사람들이 꼭 기억을 해야되겠소? 무슨 대단한 이름이라고.  '소망교회 성도' 그것가지고 안되겠소?  분명한 것은 이 비석 안에 내가 들어갈텐데 내 이름도 없습니다."  "뭐 하기야 그렇죠 뭐."  세상에 기념비처럼 맹랑한 게 없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얘기입니까?  어쩌면 내가 세상 가거든 빨리 잊어버려다오, 뭐 그런 게 좋은 거지 뭘 기억해달라고 하노.  기억할 사람도 없지만.  이것이 바로 기념비란 말이에요.  그래서 사람마다 문제예요.  그저 이 재산도 나 죽은 다음에 뭔가 좀 어떻게 물려주길 바라고, 이어지길 바라고, 명예도 이어지기를 바라고, 뭐 어차피 죽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에요.  사람들이 그런 것으로 해서 자기의 어떤 생명이 무슨 연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거든요.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올시다.  사울이 기념비를 세웠어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어요.  후세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라, 여기서 내가 승리했느니라.  어떻습니까?  그래 기억됩니까?  세상에 쓸데없는 짓이 바로 이것이거든요.

성경 본문을 계속해 읽어나가면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하나님이 높여 왕이 되게 했는데, 이제는 스스로 자기를 높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낮추십니다.  어느 나라든 어느 문명이든 어느 개인이든 스스로 높이는 자를 하나님께서 용납치를 않습니다.  왜요?  높아지고 있는 동안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요.  하나님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사실은 성경을 깊이 연구해 보면은 의롭고, 불의하고, 선하고, 악하고 이것도 문제가 안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겸손하냐 교만하냐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성경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절대로 의인이 아니에요.  우리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야.  딱 기준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교만하고 그것만이 문제더라구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 혹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나는 겸손하다 생각하십니까?  제가 판단을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교만한 사람이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교만하다.  나는 교만하기 쉬운 사람이다.  나는 쉽게 교만한 사람이다.  환난과 고통과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 나와 함께 하지 않으면 나는 곧 교만할 수밖에 없는 못된 놈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에요.

오늘 성경에 보면 사울은 이렇게 교만했습니다.  은혜로 전쟁을 이겼는데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셔서 그 명령대로 따르는 중에 승리한 건데 하나님이 약속해주시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승리인데 이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벨탑적인 자랑을 하게 됩니다.  내가 이겼노라.  여러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얼마나 초라하다는 것을 우리는 한눈에 보았습니다.  인간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명이 아무 것도 아니요.  장담할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인데, 이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영광을 자기가 취하게 됩니다.  내가 이겼노라 내가 이것을 이루었노라.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셨습니다.  또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건 자기자랑을 하려고 자기 명예를 높이고 오래오래 기억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시는 대로 그는 승리자로 기념되려고 했는데 성경이 말하는 대로 가장 부끄러운 사람으로 남았습니다.  그는 당대에 왕위에서 끊어지고 심지어는 온 가족, 가문 전체가 일시에 죽어지고 맙니다.  그대로 대가 끊어집니다.  가문이 망하는 그런 부끄러운 왕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에게 가장 치명적이고 잘못되었던 점은 무엇이냐 하면, 회개할 기회를 얻을 때에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교만한 사람은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먹으면서도 회개 못합니다.  뉘우치면서도 회개 못합니다.  후회하면서도 후회 못합니다.  왜?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가 그를 책망할 때, 주위를 지적할 때 말입니다,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왕처럼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라고 무릎을 꿇지 못하고 어쩌면 이렇게 엉뚱하게 누구 안전인데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변명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인간의 인격은요 변명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평가된답니다.  자기 변명하는 것처럼 미련한 게 없어요.  이것이 교만의 결과요 이것이 진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요 자기 상실이라고 하는 중증이 이렇게 표출되는 것이올시다.  모두가 자기 변명이요 변명하기 급급해요.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교만입니다.

로라 슐레징어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대학교수면서 유명한 카운셀러올시다.  그가 아주 재미있는 책을 몇 권 썼는데, 내가 이제 세권의 책을 소개할 테니깐 알아서 한번쯤은 읽도록 해보세요.  '여자가 인생을 망치는 열 가지 방법'  여자가 왜 망하는지 왜 망쳐지는지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렇게만 쓴 게 아니에요.  '남자가 인생을 망치는 열 가지 방법' 골라서 보세요.  세 번째 책이 있습니다.  '인생을 망치는 일곱 가지 변명' 변명이 망친다는 거예요.  그 순간 진실을 떠나거든요.  은혜도 떠나거든요.  축복이 떠납니다.  변명! 거기는 회개가 없어요.

첫째 변명이 뭐냐 하면 '나도 잘 압니다마는 나도 사람이라고요.'  이 '인간인고로'라고 하는 말로 변명을 합니다.  잘될 때는 저 인간처럼 자기를 내세우지만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꼭 나도 인간인고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까?  당신의 실수가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까?  그 길 외에 선택이 없었습니까?  인간은 반드시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까?  인간인고로 하고 말할 때에 창조주를 모독하는 겁니다.  죄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창조한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문제예요.  다시는 그런 말하지 맙시다.  인간인고로.  아니올시다.  얼마든지 피할 길도 있었고 그리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인 고로'라고 하고 하는, '나도 사람이기 때문에' 아니올시다.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은 넉넉한 힘을 주셨고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지혜도 주었습니다.  인간을 그렇게 창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고로 우리 책임입니다.  하나님께 돌릴 책임이 아닙니다.  또 하나는 '잘못이라는 것은 압니다마는 하지만 그 순간만은' 어떤 이득을 위하여 어떤 순간적 기쁨을 위하여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  잘못인줄 알면서도 그것이 행복인 것처럼 보이고 그것이 즐거웠기 때문에 그런 줄 알고 따라갔노라는 거예요.  착각이었다는 것이죠.  여러분 스스로 이렇게 변명할 때가 많아요.  다윗은 그렇게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죄를 지었습니다" 할 때 '내가 그날 밤 깜빡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 얘기 안 합니다.  실수가 아니었어요.  어쩌면 다윗은 말합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내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그것은 내 잠깐 실수입니다, 다시 한번 진실하게 묻습니다.  그거 실수였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변명이요.  또 하나는 '그것이 옳다는 것은 알고 있지요 마는' 하고서 '용기가 없었습니다.'  알기는 알지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용기와 능력이 어디서 오는 겁니까?  아무 변명거리가 되질 않습니다.  또 하나의 변명이 있습니다.  '나야말로 진짜 불쌍한 사람이라고요' 그럽니다.  이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피해자라는 것이죠. 

어떤 부부가 말다툼을 하는데 부부싸움을 좀 하는데 남편이 화를 내는 거예요.  그러니깐 아내가 견디다 못해 하는 말이 "당신 요즘 점점 더 이상하게 혈기를 내는데 거 왜 그러시냐"고.  남편 뭐라고 한지 아세요?  "나는 본래 그런 남자가 아니다.  너하고 살면서 그래졌다."  제 성격 나빠진 게 누구 책임이요?  꼭 남에게 돌리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피해자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누구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지는 마시고 나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들을 보세요.  내 주변에 나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을 또 한번 좀 직시해보세요.  이제 할말이 있나.  아내가 불행하죠 자식이 불행하죠 남편이 불행하죠.  누구 때문인데요.  나 하나의 잘못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피해가 가고 있는데 가해자라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내가 피해자라고요?  그 내 존재는 어디 갔습니까?

또한 '나도 한때는 가치관이 있는 사람이었다고요' 이렇게 말해요.  과거는 괜찮았다고요.  그런데 현재가 어렵다 그말이요.  이렇게 변명을 하려고 듭니다.  과거를 미워하면서 현재를 비하시키는 것이요.  그리고 현재의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든다고 환경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그건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요.  선한 일을 볼 때 귀한 일을 생각하면서 그건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나 같은 보통사람은 아니라는 거죠.  뭘 잘했을 때는 자기가 특별하다고 그러고, 일이 안되었을 때에는 자기가 보통사람이라고 그럽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내가 해야할 도리를 내가 해야할 뿐이요.  일곱번째는 '하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어쩌다가 그만 어쩌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완전히 남에게 책임을 돌리는 겁니다.  내가 미쳐 생각하지 못했노라.  미쳐 깨달음이 없이 여기까지 왔노라.  어쩌어쩌다보니 밀려서 여기까지 왔다.  이렇게들 환경과 남에게 책임을 전달합니다.  바로 이것이 교만입니다.  그런 고로 가장 진실한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올시다. 

브레인 리(Blain Lee) 라고 하는 유명한 학자께서 '지도력의 원칙'이라고 하는 책을 씁니다.  읽어보신 분이 많을 겁니다.  거기에 보면 지도력이란 강압적 지도력이 있어요.  세금을 물린다.  벌금을 물리라.  감옥에 보낸다.  협박을 해 가지고 이것을 지도력으로 삼아서 인도하려고 하지만 이거는 불가능합니다.  또 하나는 실리적 지도력이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면 실리적으로 당신에게 이로울 것이다.  이것도 오래가진 못합니다.  진정한 지도력은 원칙적 지도력입니다.  내게 이롭고 해롭고가 아닙니다.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을 따라갑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지도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고로 원칙적으로 행할 때, 진리대로 행할 때 많은 사람은 그를 따라주는 것이에요.

사울 왕은 자기 기념비를 세웠으나 가장 부끄러운 사람으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돈과 명예 이 두 가지를 깨끗이 버려야 지도력이 통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양심에 용기가 있습니다.  오직 섬기는 자만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하게 순종하는 자만이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만이 그 마음에 참 평안도 있고 많은 사람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올시다.  오직 진실만이 가장 위대한 힘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습니다마는 어느새 내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가운데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잃어버린 진실을 찾게 하시고 더 이상은 변명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정직하고 겸손한 가운데서 주의 뜻을 받고 주의 뜻에 순종하면서 주님의 거룩한 일꾼들로 쓰여지도록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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