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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수난자의 간증! (욥 23:10-17)

by 【고동엽】 2024.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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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선희목사/한 수난자의 간증! (욥 23:10-17)

 

유명한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의 "옥중에서 만난 그리스도"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속에 나오는 그가 겪은 실화입니다.  한 그리스도 인이 감옥에서 많은 고생을 하다가 어떤 계기가 되어서 그는 석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생활을 다 정돈하고 그저 하나의 촌부로 평안하게 여생을 농사하면서 살겠다고 시골로 내려갑니다.  이 농부는 '이제 이렇게 조용하게 주님을 섬기며 그렇게 살다가 가리라' 하고 결심을 하고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농사하는 중에 기도할 마음이 있어서 들녘에 서서 그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저를 온전하게 하여주십시오.  저를 더 온전하게 하여주십시오.'  그 때에 하늘로부터 이런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너는 온전하게 되기 위하여 감옥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겠느냐?"하고 묻는 것입니다.  이 농부는 그가 지난날 감옥에 있을 때 너무도 극심한 고생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사정을 했답니다.  "하나님 다른 것은 다 해도 좋은데 감옥에 다시 들어가는 그것만은, 그것만은 제발 금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그러면 온전해지기를 구하지 말라."  온전해지기를 구하지 말라, 깊은 뜻이 있는 응답을 들었습니다.  이 기도 응답이 계속 귓가에 맴돕니다.  네가 온전해지기를 구하지 마라.  다시 감옥으로 가는 고통을 기피하면서 온전해지기를 구하지 마라.  내적으로 큰 갈등에 빠졌습니다.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자나깨나 이 소리가 계속 들려옵니다.  그 마음에 이 갈등과 고뇌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항복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는 다시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어떤 희생을 받든지,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하나님, 저를 온전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 때에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이젠 살았다 싶은데 곧바로 비밀 경찰이 와서 그를 체포해 가더랍니다.  그는 감옥에 들어가서 굶주리고 매맞고 굴욕을 당하고 햇빛도 없는 독방감옥에 갇혀서 고생하는 그런 신세가 되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오직 기도뿐입니다.  그리고 감방 벽에 조금 틈이 있어서 그 조그만 구멍으로 옆방에 있는 사람과 가끔 몰래 몇 마디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답니다.  그것이 유일한 낙이었답니다.  죄수들이 나가고 들어오고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당신 이름이 무엇이오?  당신은 무슨 죄로 왔소?" 이렇게 묻게 되는데 어느 날 "당신은 누구요?" 그랬더니 자신과 같은 이름을 댑니다.  깜짝 놀라서 "이름이 뭐라고?" 계속 물었더니 자기 아들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하기로 했답니다.  "우리 부자로 하여금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 부자는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하자."  둘이 감사의 기도를 열심히 드렸답니다.  이것은 구 소련 공산당 치하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여러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감사하면서 두 가지 능력을 얻습니다.  감사하는 순간 모든 두려운 마음이 사라집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면 모든 고난과 고민과 근심 걱정 두려움이 다 물러갑니다.  그게 감사가 주는 능력이요.  또한 감사하는 순간, 겸손해집니다.  사람 앞에도 하나님 앞에도 "고맙습니다" 하는 순간에 나는 낮아지는 것입니다.  감사, 감사하는 순간에 점점 겸손해지면서 더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더 감사할 일이 생각납니다.  여러분, 감옥에 갇힌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 같은, 그런 감사를 해보세요.  더욱 더욱 알 수 없는 많은 감사거리가 생각납니다.  끝도 없이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로 세상을 이기고 나를 이기고 죄악을 이기는 승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욥을 읽었습니다.  이 욥기라고 하는 것은 그 전 책 전부가 수난자의 고백입니다.  한 수난자가 여기 나타납니다.  욥이라고 하는 사람은 수난받는 사람의 대표입니다.  욥기 전 책의 주제는 몇 마디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고통이 무엇인가?  무엇으로부터 고통이 오는가를 설명해줍니다.  그것은 유명한 서사시입니다.  그 고난의 이 많은 정도를 보세요.  과정이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맨 먼저 재산입니다.  그 다음에 자녀입니다.  그 다음에 건강이요 가정이요 그 다음에 친구요 그 다음에 명예요 마지막으로는 의가 없어집니다.  인간이 당하는 고난을 그 과정을 자세하게 3000년 전에 벌써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욥기의 주제는 먼저 '인간의 고난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고난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왜 고난은 있어야 하나? 그것을 말해줍니다.

두 번째는 의로운 자의 고난입니다.  우리는 고난이라고 하면 꼭 죄 때문에만 당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저 벌로 당하는 것이고 저주로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욥은 죄 없이 당합니다.  욥은 결코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당합니다.  의로운 사람도 고난을 당한다, 잘못 없이도 고난을 당한다,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는 동방의 의인, 욥도 고난을 당했다, 그것을 잊지 마세요.  내가 무슨 조그만 억울한 일을 당한다고 이것을 못 참아 하는 이 정도 가지고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하겠습니까?  뭐가 그렇게 억울합니까?  욥은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진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또 하나는 자발적으로 당한 고난이 아닙니다.  피동적으로 억지로 당한 것입니다.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이런 고난을 원치 않았어요.  전혀 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불가피하게 고난을 당합니다.

또 하나는 그는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알고 당한 것이 아닙니다.  모르고 당했어요.  왜 재산을 날려야 합니까?  왜 열 남매나 되는 자식이 하루아침에 죽어야 합니까?  왜 내 몸은 병들어 몸에서 구더기가 나게 됩니까?  쑤시고 아프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위로자인 아내마저 그의 깊은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 그러고 가버립니다.  고독이라고 하는 가정을 잃어버린 고독, 그런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 찾아와서 위로한답시고 말하는 것이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위로한다는 말이 오히려 굴욕처럼 들려옵니다.  모욕처럼, 때로는 저주처럼, 가슴을 파고들고 괴롭게 했습니다.  위로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어요.  친구도 잃어버립니다.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그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욥기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맨 끝에 가서 이 고난을 다 겪고 겪고 믿음으로 겪고 신앙으로 잘 이긴 다음에 저 끝에 가서 그 때 가서야 왜 이 고난이 있어야 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간에 불만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재를 무릅쓰고 회개하나이다.  전에는 듣기만 하더니 이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왜 이 고난이 있어야 했는지를 종국에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게 욥기의 총 주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욥이 하나님 앞에 간증을 합니다.  마음이 계시면 집에 돌아가서 오늘 본문을 한 스무번 기도하면서 읽으세요.  또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또 읽어보세요.  욥기를 다 안 읽어도 이 몇 절을 자꾸만 읽고 명상해 보세요.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은 고백합니다.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 말은 무엇입니다.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나는 모르고 살지만 그는 알고 계십니다.  나는 왜 이 고난을 당해야 되는지 모르겠는데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신 바 된 그 속에 내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확실한 지식, 영원한 지혜 속에 내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나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아버지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때로 길에 나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아버지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잘 인도할 줄로 어머니가 좋은 길로 인도할 줄로 알고 마냥 좋아하며 손목을 잡고 따라가는 그 어린아이들을 보세요.  걔들이 뭐 아는 게 아니에요.  오직 믿음이 있을 뿐이죠.  그가 아시니까, 저가 알고 계시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욥은 말합니다.  "그가 알고 계십니다.  당신이 알고 계십니다.  나는 모릅니다."

또 하나는 그에게 정한 바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의 시나리오가 있어요.  그에게 은총적인 뜻이 있어요.  세밀한 경륜이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14절에 보면 내게 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가, 예정하신 바가 있어요.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있어서 의도적으로 목적적으로 계획적으로 섭리적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이죠.  그것을 욥은 믿고 있습니다.

역사가로서 대가인 토인비라고 하는 분을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그 토인비가 한평생 세계역사를 연구하고 방대한 책을 썼습니다.  그는 노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를 자세히 보면 몇 가지를 알 수가 있다.  사람,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해도 사람의 뜻대로 안되더라.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 철이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철난다는 것이 뭐냐 하면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수고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 그건 철따구니 없는 소리예요.  그런 게 아니에요.  안될 건 안되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지요.  내 맘대로 안되더라.  사람의 뜻대로 안됩니다.  그건 일단 인정을 해야지요.  두 번째는 재미있는 말을 했어요.  하나님 제 마음대로 하더라.  하나님 당신 마음대로요.  그걸 잊지 마세요.  하나님 당신 알아서 당신 마음대로 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세 번째는 현실이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인 고로 의미 없는 사건은 없더라.  잠깐 볼 때에는 의미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뒤늦게, 지나온 뒤에 보세요.  의미가 있어요.  어쩌다가 한 번 듣는 이야기도, 어쩌다가 한 번 부딪히는 사건도 우연은 없어요.  꼭 필연이 있을 뿐이지.  우리는 그것을 알 수 밖에요.  하나님 뜻 안에 모든 것이 엄연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에요.  그는 미래를 산다 하는 논문에서 이렇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어느 시대에나 죄는 있었고 어느 시대에서 부정은 있었다.  그렇습니다.  요새 우리는 부정 때문에 골치가 아파요.  그러나 역사를 보세요.  부정 없는 때가 있었나요?  죄가 없는 때가 있었던가요?  어느 역사 어느 시대나 죄는 있었어요.  그러나 토인비의 충고는 이것입니다.  죄를 되풀이하지 마라.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 지혜를 주었고 총명을 주었으니 만큼은 같은 죄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되풀이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왜요?  역사로부터 배웠으니까.  배웠으면 방향을 틀어야지 반복하지 말 것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역사에 책임을 지라.  천재라고 말하지 맙시다.  모든 것은 인재입니다.  남의 잘못이 아닙니다.  내 잘못입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는 가슴아픈 경험을 늘 생각합니다.  북한에 농사가 안 되요.  저렇게 안 되요.  아무리 해도 안 되요.  때때로 가슴 아픈 생각을 합니다.  예수 믿는 5백만이 6.25 때 남쪽으로 왔어요.  예수 믿는 사람 대부분이 빠져나가고 나니까 그 땅이 황폐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책임이 무겁습니다.  책임을 져라 이거예요.  누구 책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이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질 줄 알아야 됩니다.  책임지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와서 보면은 전부 남의 책임입니다.  그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내가 곧 책임을 질 줄 알고 절대로 원인 귀속을 하던가 원인 전가를 시켜서는 안됩니다.  우리 자신들이 책임을 질 줄 알고요.  또 한가지 충고합니다.  집단 행동을 주의하라.  요새 흔히 여론 조사니 인기니 민주주의니 투표니 이럽니다만은 많은 표를 받았다고 의인이 아니에요.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았다고 선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행동이 집단화 될 때에 대중화되고 여론이 이렇게 몰려질 때에 그 자체가 의요 선인 것처럼 착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 행동을 조심할 것이요.  세계는 바로 이런 집단화되는 행위로 인하여 역사가 곤두박질했거든요.  그것을 잊지 말라 그랬구요.  궁극에는 우리 인간 중심적인 생각에서 하나님 중심적이 것으로, 우리 인간의 생각을 깨끗이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을 알고 그에게 순종해 나가는 것이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는 길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다시 간증을 합니다.  이 고난은 내게 유익한 것이라고.  긍적적으로 생각합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나를 단련하신 후에 금과 같이 나올 것이다.  이 모든 사건을 통해서 단련 받고 훈련을 받아서 금과 같이 나올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여기에 훈련이 있고 여기에 목적이 있고 여기에 내가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있다는 것이죠.  그런고로 이 모든 고난은 나에게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이 엄청난 고난을 당하면서도 유익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아직 이해가 되지 않으나 이것은 유익하다고.  이해가 되는 것은 되고 못되는 것은 못되더라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한, 그가 나와 함께 하시는 한, 이것은 유익하다고 그렇게 수용했습니다.  그리하여 정금과 같이 나올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하여 정금과 같이 나아올 것이다.

빌립보 1장 12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고백합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그는 알 수 없는 고생을 했습니다.  무려 3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썩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될 바울이 침침한 감옥에서 3년을 썩었을 때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만은 "내가 당한 이 모든 일이 마침에 복음의 진보를 이루었다"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난날을 생각해 봅시다.  그 때 그 사건, 내가 억울하게 당했던 그 때 그 사건,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그 때 그 사건이 있음으로 해서 오늘 내가 있는 거예요.  안 그렇습니까?  그것이 있으므로 해서 오늘 내가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도 내가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시 합동하여 선을 이루고 저 앞에서 그 언젠가 오늘을 생각하며 "그날이 있으므로 오늘 내가 있고, 그 사건이 있으므로 오늘같은 축복을 받노라" 하게 될 것이에요.  그것을 믿고 사는 거예요.  나는 모르나 그분은 아시고 나 또한 언젠가는 오늘의 고통의 뜻을 아주 확연하게 시원하게 그것이 유익했다고 하는 것을 간증할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이올시다.  나의 당한 고난은 그런고로 내게 유익한 것입니다.  나에게 당한 고난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납득이 갑니까?  납득이 가는 분은 감사하고 이해가 안 되는 분은 믿으세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믿으세요.  나의 당하는 길을 내 운명을 그가 아십니다.  그가 나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이 고난을 겪은 다음에 정금과 같이 나올 것입니다.  그 아침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오늘을 감사하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은혜 주셔서 부족하고 허물 많은 저희들이지만 큰 은혜 가운데 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때때로 우리는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 지 왜 나만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억울하고 때로는 통분하게 여길 때도 있사오나 어찌 욥의 고난에 비교하겠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인 욥을 생각하며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신다고 고백한 것 같은 수난자의 위대한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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