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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왜 오래된 교인일수록 더 고집이 쎈가?

by 【고동엽】 2022. 11. 19.
<왜 오래된 교인일수록 더 고집이 쎈가?>
 
예수님을 오래 믿으면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데, 오히려 더 고집이 쎄지고 자아가 강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사실 고집쎈 목사가 불륜을 저지른 목사보다 하나님 앞에서는 더 악할 수 있다. 사울왕은 고집으로 버림받았고(삼상 15:23), 다윗은 불륜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고집이 쎄다는 것은 대부분 스스로 하나님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우상숭배는 가장 악한 죄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순수하고 겸손했던 사람이 오랜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히려 교만하고 고집이 세며 메마른 사람이 되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 것인가?
 
성경은 이 증세의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한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즉 그가 율법주의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율법주의는 모세의 율법을 고집하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약의 말씀대로 산다는 사람도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종종 성경 말씀대로 살면된다고 하는 주장하는 자들이 이렇게 말한다.
"성경에서 하라고 하면 하고 말라고 하면 말면 된다."
대단히 그럴싸하다. 그러나 그렇게 설교하는 사람조차도 그렇게 못살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 잘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구주로 이 땅에 오시지도 않았다.
 
윤리설교는 절의 중들에게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문제는 사람들에게는 그럴 능력도 의욕도 없다는 것이다.
육신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다(롬 8:7)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닮을 것인가?
 
먼저 율법적인 신앙을 버려야 한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갈 2:19)
이게 선행되지 않으면 결코 성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암송하는 구절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유명한 구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 앞구절 곧 19절이다.  이 앞구절을 무시하고 20절만 외우다보니 여전히 20절조차도 율법적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복음성가에서도 '예수를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을 '예수 위해 사는 것'으로 바꾸어서 부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한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이다라는 말은 맞다. 그러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율법대로 사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문제다. 말씀은 오히려 율법에 대해서 죽으라고 말한다.
율법주의로는 겉보기에 제법 윤리적 인간은 만들어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 그러나 겸손과 사랑은 만들어내지 못한다.
 
한 때 우리 나라에 제자훈련이 꽤 유행했었다. 나도 제자훈련 세대 출신이다.
성경을 암송하고, 큐티 훈련과 전도 훈련 등 각종 훈련은 마치 그로 하여금 대단한 사람으로 바뀐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선교회에서 활동해본 사람들은 안다. 그들 속에 있는 야망과 경쟁과 암투와 시기를.
겉보기에 좋게 바뀌었을 뿐 그 속은 여전히 육신의 생각으로 가득하다.
 
성경은 말씀을 율법으로 만들어서 살려고 하는 자들이 결국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다고 가르친다.(갈 5:4)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표준이 아니다.
 
도대체 무엇을 표준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사도 바울은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라는 말씀 다음에 바로 이것을 제시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유명한 구절 속에 성도의 성화의 비결이 들어있다. 
놀랍게도 율법주의자들은 이 구절마저 이렇게 해석한다. 
'제는 나를 위해서 살지 말고,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해석이야 말로 19절의 내용과 대치되는 것이다.
20절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천지차이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업으라는 말이고, 하나는 그리스도에게 업히라는 말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성경 해석이 천편일률적이다. 그들은 무조건 자기 생각의 틀로 성경 해석을 찍어낸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예수님께서는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그러자 그 다음날 무화과나무는 말라죽었다(막 11:12-23)
이 사건의 교훈이 무엇인가?
율법주의자들은 지체없이 바로 열매의 중요성을 설교한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그럴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불교의 중들도 그 본문을 자기들의 설교본문으로 삼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 사건을 통해서 열매의 귀중함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믿음이 무엇을 할 수있는가를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3)
 
그리스도인들의 타락의 원인은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의 부재가 아니라, 믿음의 부재다.
십일조, 주일성수, 새벽기도 이런 것들을 믿음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믿음에서 나온 행위가 아니라 행위 자체를 믿음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 주님의 명령 몇 개를 지킨 것을 큰 자기 의로 삼는 자들이 어떻게 성화되겠는가?
 
많은 성경 지식과 신학 교리, 그리고 각종 사역이 나를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럴싸한 종교인들도 얼마든지 흉내낸다.   
심지어 매일 몇 시간씩 기도하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도 예수님을 닮은 흔적이 없는 이유는 그 기도 내용이 온통 자기 필요와 생색내기, 그리고 자기 자랑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주님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매일 주님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주님의 어떠하심을 알아가는 것이며, 주님과의 교제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이 매일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그는 성화되지 않는다.
주님을 먹고 마시려고 하는 간절함이 없는 아무 것도 이루어내지 못한다.
 
더러운 정욕이 나를 짓누를 때, 주님의 깨끗하심을 알게 해달라고 믿음으로 구해보라. 주님의 깨끗하심을 느낄 때 죄를 혐오하게 되며 꿈쩍도 하지 않는 산이 바다로 던지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야고보서를 들이대며 믿음만 가지고는 안된다고 말하지만, 사실 야고보는 진짜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말한 것뿐이다.
 
믿음이란 내가 틀렸고 주님이 옳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내 고집을 내려놓고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강단에서 행위가 따르지 않는 교인들을 야단치면서 율법을 들이댈 것이 아니라, 진짜 예수를 믿으면 어떤 일이 생기는 지를 말하라.
 
우리는 믿은 만큼만 성화될 수 있고 믿은 만큼만 실천할 수 있다.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자가 어떻게 형제를 사랑하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35)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용서를 체험한 자만이 남을 용서할 수 있다. 예수님께 발 씻기움을 받은 자만이 남의 발을 씻길 수 있다.  예수님의 깨끗하심을 체험한 자만이 깨끗하게 살 수 있다. 
그렇지 않고 행동하면, 그는 교만하게 되고 자기 의에 빠지게 되며 결국 바리새인처럼 하나님 자리에 앉게 된다.
 
믿음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자는 집사 자격도 없건만(딤전 3:9), 놀랍게도 믿음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 강단에서 윤리나 도덕을 설교하면서 왜곡된 기독교를 전하고 있다
 
믿음이 없이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 있으며, 믿음이 없이 어떻게 예수님을 배우고 어떻게 예수님을 체험하겠는가?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는 자가 어떻게 예수님을 닮을 수 있겠는가?
 
주 예수님을 배우자.
이것은 설교 듣고 안일하게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치열한 것이다.
매일 묵상하고, 그분을 갈망하며,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분을 구해야 한다.
 
주 예수님, 저를 율법주의적 신앙에서 건져주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시오. 믿음 안에서 만나주시는 주님을 알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율법이 아닌 믿음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2pw/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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