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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누가복음 3장7-14 /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by 【고동엽】 2022. 11. 18.
■2022년 10월18일(화)■
 
(누가복음 3장)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0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묵상/눅 3:7-14)


◆ 독사의 자식 vs 아브라함의 자손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독사의 자식'은 오늘날 한국에서 사용하는 욕설과는 차이가 있다. 이것을 인용해서 욕설을 정당화하는 목사도 있는데, 말도 안 된다.


요한이 사용한 '독사의 자식'은 '아브라함의 자손'과 극명한 대립을 이루는 말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구원은 떼놓은 당상이며, 복 받기에 합당한 자라는 망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자들에게 요한은 정신이 번쩍 나는 말을 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주실 것이라고?
정신 차려라.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다. 불순종과 죄에 찌든 너희는 독사의 자식들일 뿐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는 관심도 두지 않으면서 목사니, 장로니 하는 타이틀에 기대고 있는 자부심, 또는 자신의 벌려놓은 여러 사역에 대한 자만심, 이런 것들에 속아서 자신이 대단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자들에게 실상은 '마귀의 종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은근히 기대고 있는 헛된 자부심, 자신에 대한 환상, 자만심...회개는 이런 것을 깨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욥처럼 대단한 위인도 결국 자기 안에 숨어있는 자만심을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제대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십자가 외에 기대고 있는 모든 자부심을 다 치워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람은커녕 독사의 자식이라는 호된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주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10)
자신들을 자각하고 절망에 빠진 자들이 외치는 말이다. 이런 질문은 회개의 의지를 가진 자가 할 수 있는 말이다.


요한은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행동을 할 것을 요구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나누어줄 것이며, 먹을 것도 그리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나누는 삶을 말한다. 세리도 군인들도 당시 부정한 관행을 따르지 말고 정직한 관료가 될 것을 요구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정당한 요구다.
그러나 절대로 쉽지 않은 요구다. 오늘날에는 옷 한 벌의 가치가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에 옷의 가치는 대단했다. 그런데 여러 벌 있는 자가 남에게 한 벌을 주라는 것이 아니라 두 벌밖에 없는 자에게 한 벌을 남에게 주라는 것은 무척 부담이 되는 요구였다. 대단한 나눔이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자면 집 두 채 있는 자는 한 채를 남에게 주라는 정도의 부담이다.


이런 큰 부담을 지불해야 받는 구원이라면 과연 몇 명이나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런 대가를 치르는 구원이 과연 은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생 얻는 방법을 물어본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요구하자, 그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집으로 돌아갔다(마 19:21-22). 이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이다. 영생을 얻기란 정말 어렵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 이후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는 세례 요한처럼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를 요구했다. "주 예수를 믿으라"(행 2:38, 행 16:31).


그리고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신비한 일이 일어난다. 삭개오처럼 웃으면서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하는 일 같은 것이 일어난다. 그렇게 평소에 반듯한 생활을 했던 부자 청년은 심히 고민하고 주저했던 일이었는데, 오히려 탐욕스러웠던 삭개오는 단숨에 실행해버렸다.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이다. 이게 복음의 능력이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 4:20).


자신의 구원을 돌아보자.
과연 내가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새로운 마음이 된 후에 예수를 믿었는가? 아니면 예수를 믿으니 새 마음이 되고, 새 삶이 되었는가?


우리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강요하지 말고, 믿음을 권면하고, 믿음에 굳게 서서 주 예수께 뿌리를 내려야 함을 강조하자. 믿음은 내 세계관, 내 가치관, 내 인생관을 바꿀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행동이 나오게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만 믿어서는 안 되고 행동을 똑바로 해야 한다는 식의 설교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그렇다. 믿음은 행동을 낳는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도박과 같은 중독에 걸린 자에게 중독에서 벗어난 후에 예수님을 믿을 것을 요구하면 안 된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어서 중독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도박이 재미없어진다. 우리 주님은 지독한 중독에서도 능히 구원하시는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자. 그분을 사랑하자. 그분께서 나를 바꾸시도록 하자. 탕자는 단장하고 아버지께 나아갈 능력이 없다.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것이 회개다.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것과 싸우자.


아무것도 안 하면서 이것저것 등을 해야할텐데라며 푸념하는 것으로 자신이 꽤 믿음이 있는 체하는 위선을 버리고 그냥 예수님께 나아가서 무릎 꿇고 항복하자.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법을 배우자. 믿음이 산을 옮기는 것을 체험하자.


주 예수여,
에수께서 저의 구주이시며, 영원히 찬양받으실 저의 주님이십니다.
저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습니다. 저의 자만심, 열등감 모두 죽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제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이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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