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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누가복음 2장39-52 / 예수님의 십 대 시절

by 【고동엽】 2022. 11. 18.
■2022년 10월15일(토)■
 
(누가복음 2장)
 
39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묵상/눅 2:39-52)


◆ 나사렛에서 사심


누가복음에는 베들레헴에서 나사렛 본 동네로 옮길 때, 마태복음에서 소개된 동방박사 이야기와 애굽으로 잠시 피난 간 이야기가 생략되어있다. 대신 마태복음에는 베들레헴 목자들의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이 서로 보강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셨다. 왜 갈릴리 지방 나사렛에서 사셨을까? 그조차 선지자가 예언한 바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사 9:1-2)


이 예언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오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갈릴리와 나사렛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에 속한 땅이고 동네다. 과연 예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도 갈릴리 사람으로 불렸다. 심지어 천사조차도 제자들을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했다(행 1:11, 2:7).


이렇게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사시게 된 것은 성경 예언의 성취다.


◆ 예수님의 십 대 시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누가복음에 예수님의 십대 시절의 이야기가 짤막하게 기록된 것은 참 감사하다. 다른 복음서에 없기 때문에 더욱더 귀하다.


매년 유월절마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 습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계속되었던 듯하다. 이조차 율법에서 명한 것을 지킨 것이다.


나사렛과 예루살렘은 구글 지도에서 현대 도로상의 거리는 대략 140km다. 당시에 사마리아를 지나지 않고 돌아서 갔다면 수십km 늘어났을 것이다. 당시 걸음으로 빠르면 이틀, 늦으면 삼일 길이라고 본다. 당시에 이동할 때는 친족과 동네 사람들이 함께 움직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부모가 나사렛으로 돌아갈 때 하루가 다 되도록 자기 아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 이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무관심해서라기보다는 무척 신뢰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아마도 매년 치르는 행사라 익숙했겠고, 또한 평소에도 아들을 믿고 상당 부분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인 듯하다. 하긴 예수님처럼 총명한 아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하룻길을 가도록 볼 수 없게 되자, 깜짝 놀랐다. 정말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아무리 천사가 보호해줄 것으로 믿어도 이제 겨우 열두 살이 아닌가? 그들은 예수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다시 하룻길을 걸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거기 성전에서 예수께서 랍비들과 말씀을 나누고 있었다. 


이것은 누구 잘못일까?
인간적으로 보면 6대 4의 비율로 예수님이 좀 더 잘못한 듯하다. 마리아는 자기 아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찾았다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오히려 부모님이 잘못 생각했음을 일깨우셨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


이 말씀을 통해서 이 사건은 무심코 벌어진 실수가 아니라 무언가 교훈하시기 위한 의도적인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부모는 자기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깜박 잊고 있었고, 예수님은 자기 부모에게 자신의 신분을 일깨우셨다. 이 사건을 통해서 부모는 정신이 번쩍 났을 것이다.


◆ 예수님의 아버지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마리아가 요셉을 가리켜 '네 아버지'라고 하자, 예수님은 '내 아버지'가 하나님이심을 일깨우셨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 열두 살 때 이미 자신을 자각하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세상의 모든 종교창시자들은 진리를 찾아 헤매는 구도자로서 많은 고행과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를 찾아 헤매신 적이 없다.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는 순간부터 그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셨다.


오늘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십 대 기록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소중하다.
이로써 오늘날 예수님을 가리켜 인도에 가서 불도를 배웠다느니, 서른 살이 되기까지 도를 닦기 위해서 세계여행을 했다느니 하는 말들이 모두 헛소리임을 알게 된다.


◆ 일상생활로 돌아가심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께서 비록 자신의 신분을 정확하게 아셨어도 계속 성전에서 사시지 않고 일상생활로 돌아가셨다. 예수께서는 사역을 서두르지 않으셨고 때를 기다리셨다. 사역을 시작하신 것은 이로부터 무려 20년쯤 후다. 그동안 일상생활로 돌아가셔서 순종하여 받드셨다는 것은 큰 교훈이다.


예수님도 효도해야 할 때 효도하시고, 공부해야 할 때 공부하시고, 일해야 할 때 일하셨다는 의미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나, 가치 있어 보이는 일에만 매달린다. 그러나 자식을 돌보고, 일상생활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는 예수님처럼 일상생활에 충실해야 한다. 아무리 전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도 직장에서 맡은 일은 소홀히 하면서 전도만 열심히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복음에 손해가 된다. 일상생활도 충실히 할 때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사람에게 칭찬받고 사랑받게 되며 복음 전파는 더욱 힘을 얻게 된다.


주님,
주님께서 매사에 성실하셨듯이 그런 성실을 본받기 원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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