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3:1-12
대강절 둘째 주일을 맞아 저는 여러분에게 한편의 드라마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드라마 제목은 "주의 길을 예비하라"입니다. 그리고 대본을 쓴 사람은 마태, 각색은 임영수입니다. 장소는 약 3백명의 관객이 관람할 수 있는 아늑한 분위기의 부채꼴형의 극장입니다. 부채꼴의 중심부에 아름다운 무대가 설치 되어 있습니다. 극장 안에는 관람객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잠시 후에 드라마의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 음악이 흘러나오고 나서 무대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무대 배경은 사막입니다. 무대 배경이 드러나면서 고대 사회의 군복을 입은 한 무리의 병사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어떤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 지나가는 길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지휘관인 듯한 사람이 이것 저것 명령을 하자 병사들은 일사 불란하게 움직입니다. 드라마의 서막인 이 장면은 거의 무언극으로 진행됩니다.
길 정비가 끝나자 병사들은 퇴장합니다. 그들이 퇴장하자 곧 우렁찬 행진곡이 울리면서 무장한 병사들의 호위에 둘러 싸여 고대 사회의 화려한 복장을 한 왕이 말을 타고 행차합니다. 왕의 모습은 매우 위엄있고 경건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왕의 행차가 지나간 후 폭풍이 지나간 후 처럼 무대에는 불이 꺼지고 정적이 무대를 뒤덮었습니다.
잠시 후 다시 무대 불이 서서히 밝혀지면서 무대 배경이 드러납니다. 무대 배경은 역시 광야입니다. 그러나 왕이 지나가던 광야와는 다릅니다. 광야 한 쪽에는 강이 있고 여기저기 바위와 나무들이 있습니다. 막 뒤에서 나레이터의 낭낭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나레이터의 낭독이 있은 후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룬 매우 야생적인 인상을 풍기는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그가 등장한 후 무대 양편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 그에게 다가갑니다. 그들의 모습은 이 선지자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고 외침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의 앞으로 나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합니다.선지자는 무리들을 강가로 데리고 가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그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얼굴이 모두 밝아지고 그들의 몸 동작은 가벼워 보입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어둠의 속박에서 풀려난 사람들 처럼 보입니다.
그 무리들 가운데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도 끼어 있었습니다. 낙타털 옷을 입은 선지자는 그들을 보자 격렬하게 꾸짓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맞는 열매를 맺어라"
그의 꾸지람을 들은 유대 지도자들은 매우 당혹스러워 하는 표정들이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는 회개하지 않고 단순히 그에게 세례를 받으므로 하나님의 징벌을 면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징벌 면제의 표식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잘못된 태도를 본 이 선지자는 그들의 그릇된 태도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의 설교는 좀더 진지하고 격렬해집니다.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선지자는 자신이 메시야라 든가 모세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자기 뒤에 오시는 그 어떤 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자신은 그 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온 드라마의 처음 부분에 등장한 왕의 행차에 앞서 그 왕의 길을 준비하는 병사들과 같다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분은 선지자 자신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하고 고귀한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선지자는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고 말합니다. 선지자가 선포하는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분이 이제 드디어 오실 것이라는 기대감 가운데서 무대에 모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높이 들고 무대 배경으로 되어 있는 광야의 하늘을 쳐다 봅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희망, 기대 동시에 두려움의 빛이 감돕니다.
무대가 조용해지며 강림절의 찬송 소리가 울려나오면서 무대 불이 꺼지고 무대의 막이 내립니다. 이 무대에 선지자로 등장한 주인공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러나 실제 주인공은 요한이 가리킨 '오시는 그 분' 이였습니다.
드라마 첫번 째 장면 고대 왕의 행차는 본문 3절에 인용되어 있는 이사야 40:3-5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시켜 고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가까이 임하시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왕의 행차가 있을 때 그에 앞서서 왕의 도로를 준비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러한 문화적 배경 가운데서 바벨론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있는 시리아 사막에 하나님께서 임하실 길이 준비 되어야 한다고 알림으로서 이스라엘의 해방을 묘사했습니다.
이 드라마의 작가 마태는 예언자 이사야의 이 예언에서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보고 있습니다. 마태는 세례자 요한을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선지자로 등장시킵니다.
극작가 마태가 쓴 이 드라마는 논픽션입니다. 이 드라마를 통해서 마태가 관객들에게 분명히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오시고 계신다.
다음은 오시고 있는 하나님을 위해 길을 준비해야 한다.
그 다음 암흑으로 뒤덮혀 있는 역사의 무대에 하나님이 오시는데 그 길을 준비하는 길은 곧 회개이다.
'새 우리들의 선생님' 의 저자 존 스토트 목사는 "새가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칠 수 있다면 회개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고 했습니다. 스토트 목사의 관찰에 의하면 "가을에 먼 곳으로 날아가는 철새들은 이듬해 봄에 어김 없이 되돌아 온다" 고 했습니다.
스토트 목사는 "일반적으로 거의 50만 마리의 황새가 매년 봄. 가을에 중동 지방 위로 이동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새들은 갔다가 돌아오는데, 하나님의 백성(인간)의 비극은 하나님을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다는데 있다." 고 했습니다.
스토트 목사는, "새가 육적으로 가지고 있는 강한 귀소 본능 만큼 우리 인간도 영적으로 강한 귀소 본능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나님이야 말로 인간의 영이 쉴 수 있는 진정한 집이며 그 분 없이는 우리가 부랑자요, 미아라는 생각이 강해 질 수 록 우리는 하나님과 약간 떨어져 있는 것도 더 빨리 더 고통스럽게 인식하고 더 간절한 마음으로 그분께 돌아가게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회개의 반대 말은 죄입니다. 죄의 뜻은 과녘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가는 것입니다. 사수가 화살을 활시위에 먹여 과녘을 향해 쏘았을 때 과녘에 맞지 않고 빗나간다는 뜻이 죄의 어원입니다. 빗나간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ㅇ. 무지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
ㅇ. 그릇된 생의 길에서 돌이키지 못하는 것.
ㅇ. 나쁜 습관으로 계속 빠져들어 가는 것.
ㅇ. 유혹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ㅇ. 자기 개선없이 살아가는 삶
ㅇ. 하나님께로부터 계속 멀어지는 것
ㅇ. 죄의 삯은 결국 죽음입니다.
한편 회개의 뜻은 돌이킨다는 것인데, 그 뜻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ㅇ. 깨어나는 것.
ㅇ. 깨달음.
ㅇ. 판단을 더디하고 이해를 신속히 하는 것.
ㅇ. 위기를 알아차리는 것.
ㅇ.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는 것.
ㅇ. 새로운 생의 출발을 하는 것.
ㅇ.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
우리가 대강절을 맞이 할 때마다 생각해 볼 문제는 "내가 오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오시고 계시는 그 분을 맞이할 수 있기 위해 "돌이키라"고 했습니다. 어디로 돌이킬 것인가?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입니다.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켄 가이어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영혼의 창을 제시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분의 다가옴은 말씀으로 시작된다. 우리의 다가감은 들음으로 시작 된다. 그분의 찾음은 자신을 보이심으로 시작되고 우리의 찾음은 봄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을 찾는 우리와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은 일상 생활의 창에서 서로 만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창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계시하시는 곳입니다. 그 곳이 병상, 고난의 자리, 독서하는 시간, 기도, 깊은 좌절과 실의에 빠져있는 순간, 좋은 영화를 감상하는 시간,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켄 가이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햇빛보다 더 밝은 놀라운 순간, 우리가 평생 그토록 듣고 싶었던 그 말씀, 멀리서 메아리처오는 가느다란 메아리까지 놓치지 않으려 가장 가파른 절벽까지 오를 가치가 있는 너무나 소중한 말씀. 영혼의 창은 바로 그 말씀을 듣는 곳이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의 생의 여정은 새롭게 시작된다. "
"그 창은 단순한 깨달음의 순간일 때이기도 하고 판단을 더디하고 이해를 신속히 해야하는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간혹 그 창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에 들려오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잠에서 깨어나 인생의 여정을 준비시키는 말씀, 위기를 알아차리게 하거나, 인식의 장소로 인도하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이며 지금 왜 여기에 있으며 인생의 이 여정의 시점에서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 해주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켄 가이어-
"한편 영혼의 창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해주는 지혜의 안목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안목은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모든 대상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시작됩니다. 존중하는 마음은 다시 보는 눈을 통해 전해집니다. 눈으로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건의 이면을 보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오시고 계시는 그 분을 맞이할 수 있기 위해 "돌이키라"고 했습니다. 어디로 돌이킬 것인가?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입니다.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영혼의 창 즉, 그 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 그리고 하나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해주는 지혜의 안목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너무 멀리 떠나 있습니다. 이렇게 멀리 떠나 있을 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더 꼬이고, 뒤틀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문화, 정치,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역사의 무대에서 요한과 같은 역할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을 하게됩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절대 필요하다.' 입니다. 오늘 이 시대 사람들에게 돌이켜 그들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안내가 필요합니다. 그 어느 때 보다 더욱 필요합니다. 그러한 책임을 오늘의 교회가 담당해야합니다.
출처/임영수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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