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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다 이루었다 하시고

by 【고동엽】 2022. 11. 17.

요19:16-30

제가 LA에 있을 때 성경 을 많이 연구해서 신학 박사 가 된 목사님 한 분이 꼭 보 여 줄 것이 있다고 하면서 저 를 어떤 곳으로 데리고 갔습 니다. 그곳은 중세기 스페인 에서 카톨릭 교회가 예수 그 리스도를 바로 믿어보겠다고 하는 개신교 신자들을 끌어다 가 고문을 할 때 사용했던 고 문도구들을 진열해 놓은 이상 한 곳이었습니다. 중세기라면 지금부터 수백 년 전이 아닙 니까? 그래서 저는 그곳에 도 착할 때까지만 해도 그 당시 에 쓰던 고문도구들을 모방해 서 만든 대체품을 전시해 놓 았겠지 하고 생각을 했습니 다. 그런데 막상 전시된 고문 도구들을 보니 대체품이 아니 고 진품들이었습니다. 실제로 고문을 하는데 사용되었던 도 구들을 열 몇 가지 전시해 두 고 각각에 설명문까지 붙여 놓았던 것입니다.
침침한 불빛이 비치는 전 시실 안에 들어가서 고문도구 를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또 그 옆에 기록된 설명문을 읽 으면서 저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세상에 인간이 잔인하면 이렇게 잔인 할 수 있을까? 더욱이 그들은 교회라는 이름을 내걸었던 사 람들이 아닌가? 이건 사람도 아니다. 악마다. 악마!' 사람 을 거꾸로 메달아 놓고 사타 구니 사이로 넣어 켜서 죽이 게끔 만든 톱이 두세 개 걸려 있었고, 사람을 끌어다가 기 계 속에 넣으면 국수 가락처 럼 되어서 나오도록 만든 소 름 끼치는 기계도 있었고, 사 람을 집어넣고 자물통을 채우 면 꼼짝달싹도 못한 채 고스 란히 말라죽어 뼈다귀만 남게 만드는 그런 기계도 있었습니 다. 실제로 성도들을 고문을 하는데 사용되었던 도구들이 라고 생각하니까 왠지 그 도 구들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성도들이 죽어가 면서 비명을 지르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정 말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이 런 고문도구들이 잔인하고 흉 측하다한들 멀쩡한 사람을 십 자가 틀에다가 눕혀 놓고 손 발에 철 못을 박는 그것만큼 잔인할 수 있을까요? 톱으로 켜임을 당해 죽는 것은 5분이 나 10분 정도 고통을 당하다 보면 까무러쳐서 그대로 죽을 수라도 있을 지 모릅니다. 그 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절대 그렇게 쉽게 끝나 지 않습니다. 모든 죽음의 고 통을 감수하면서 서서히 죽어 가야 하는 것이 십자가에 달 린 자의 운명입니다. 세상에 이 십자가 형틀만큼 무서운 고문이 어디 있겠습니까? 십 자가의 죽음만큼 잔혹한 죽음 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오죽 하면 로마의 시세로(Cicero) 가 십자가를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죽음'이라고 말했겠습 니까?
저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 람에게 어떤 신체적인 증세가 나타나며, 또 그 고통이 어떻 게 서서히 발전하여 결국 죽 음에 이르게 되는지를 의학적 으로 분석해 놓은 책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너무 끔찍해서 이 자리에서 굳이 자세하게 말씀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 다. 십자가의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주님이 십자가를?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세 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소름끼 치는 그 십자가 죽음을 당하 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저주스럽고, 고통스러운 그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거 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새."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말 합니다. 거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합니까? 예수님을 십 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 다. 그러나 이 간결한 표현 속에 인간의 말할 수 없는 잔 혹함과 고통, 처참함이 고스 란히 다 담겨 있습니다.
왜 주님은 하필이면 그렇 게 저주스럽고 잔혹한 죽음을 당하셔야 했을까요? 아무리 우리의 죄 값이 크다 해도 어 떻게 이런 끔찍한 죽음을 당 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셨을 까요? 우리의 상식과 논리로 는 도저히 이해가 안됩니다.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그 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 이 유를 분명하게 들려줍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보십 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여기서 '저 주를 받았다' 하는 말을 주목 하시기 바랍니다. 왜 예수님 이 저주를 받으셔야 했습니 까?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 을 범하여 율법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우리를 구해내기 위해 예수님으로 우리 대신 저주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저주받은 자 의 죽음에 대한 한 가지 원칙 이 나옵니다. 그것은 나무에 다는 것입니다(신21:23). 예수 님은 우리가 율법을 어김으로 인해 받게 된 율법의 모든 저 주를 한 몸에 다 짊어지시고 저주받은 자가 되셨습니다. 저주받은 자로서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실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 기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면을 읽 을 때면 늘 대제사장들과 빌 라도를 특별히 주목해 봅니 다. 그 당시에 대제사장들이 나 빌라도가 약간의 양심이라 도 가지고 있었더라면, 조금 이라도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더라면, 최소한의 공 정함을 고려할 수 있는 여유 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예수님 을 그와 같이 혹독하고 소름 끼치는 십자가형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재판의 생 명은 공정성과 합법성에 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한사람의 생명을 끊어 놓는 사형을 선 도하는 재판이라고 한다면 다 른 어떤 재판보다 공정하고 합법적이어야 마땅할 것입니 다. 다시 말해 죽일 만한 분 명한 죄목이 있어야 하고 그 죄가 확실하게 입증되어야 하 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 받았던 재판에는 이와 같 은 상식적인 요건들이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먼저 대제사장들을 보십시 오. 그들은 분명한 죄목이 있 고 분명한 증거가 있어 예수 님을 재판 대에 세운 것이 아 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 님을 일단 잡아 놓고는 그를 죽일 구실을 찾느라고 밤새도 록 법석을 떨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재판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죽을죄를 저 질렀기 때문에 잡아와서 재판 하는 것이 정상 아닙니까? 생 사람을 끌어다 놓고 그에게 무슨 죄목을 씌워 죽일 것이 냐를 궁리하느라 밤새도록 법 석을 떠는 그런 재판이 천하 에 어디 있습니까? 또 그들이 들고 나온 죄목도 그렇습니 다. 그들이 만들어낸 예수님 의 죄목은 '행악자'라는 것이 었습니다(요18:30). '행악자' (行惡者)란 말 그대로 '악을 행하는 자'를 뜻합니다. 그것 도 어쩌다가 한두 번 실수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고질 적으로 악을 행하는 흉악범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말만 큼 예수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 또 어디 있습니까? 대제 사장들이 한 푼의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한치의 상식이라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었다면 예수님에게 이런 얼토당토않 은 죄목을 걸어 십자가에 처 형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 다.
빌라도는 또 어떻습니까? 그가 법정을 네 번이나 들락 거리면서 여러 번 반복한 말 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에게 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 라."
그는 아무리 심문을 해 봐도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노라고 자기 입으로 분명 히 시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즉시로 석방했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입으로는 아무 죄도 찾 지 못했다고 떠들면서 군병들 로 하여금 예수님을 채찍질하 게 했습니다. 또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혀 희롱 당하게 했습니다. 그리 고 급기야는 아무 죄도 찾지 못했노라고 말하던 바로 그 입으로 예수님에게 십자가형 이라는 극형을 선고했습니다. 법을 집행한다고 하는 인간 중에 이보다 더 비열하고, 비 양심적인 자가 어디 있겠습니 까? 빌라도가 조금이라도 양 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더 라면, 조금이라도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을 십자 가에 못박도록 선고하지는 않 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에게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들에 게는 선한 구석이라고는 단 한군데도 남아 있지 않습니 다. 양심도 없습니다. 상식도 안 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은 아무 죄가 없으심에도 그 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 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예수 님을 몰랐던 당시의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교양 이 있는 것처럼 꾸미고 사람 들에게 양심적인 것처럼 행동 하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 러나 우리의 깊은 내면을 들 여다보면 우리 역시 악의 화 신으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 을 얼마든지 가지고 있는 죄 인들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빌 라도에게서 우리는 우리 내면 에 뿌리 깊게 감추어져 있는 이와 같은 본질적인 추악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나와 같 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 그리 스도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 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조금 이라도 선한 구석이 남아 있 었다면 주님이 그렇게 십자가 에 죽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 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 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 해야 합니다.

저주스러운 무관심
십자가형이 확정되자 네 명이 한 조를 이룬 로마 군인 들이 예수님을 인계 받았습니 다. 이 네 명의 군인들은 예 수님을 골고다까지 호송하고 거기서 십자가 형틀에 예수를 못 박아 사형을 집행하는 책 임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렇 게 함으로써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팁이 있다면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나누는 것입니다. 요즘이야 처형되는 사람의 옷을 벗겨 가지고 나 누어 가진다는 것이 정말 웃 음거리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대량 생산이 불가능해 서 전적으로 수공업에 의존해 서 옷을 만들어야 했던 당시 상황에서는 옷은 중요한 재산 이었습니다. 한 벌을 가지면 평생을 살아야 할만큼 귀한 것이었기에 그 만큼 더 소중 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고 대사의 전쟁 기록을 보십시 오. 양편이 서로 붙어 가지고 싸우면 어느 한쪽이 이기고 어느 한쪽이 지지 않습니까? 그럴 때 이긴 쪽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 까? 전사한 사람의 옷을 전부 벗기는 것입니다. 피가 묻었 든지 창으로 구멍이 났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옷이란 옷 은 모조리 벗겨 가지고 전리 품으로 들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남성 들의 정장은 보통 다섯 가지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머리에 쓰는 터번과 신발, 속 옷 한 벌, 외투 한 벌, 허리띠 가 그것입니다. 네 사람의 군 인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 고 나서 예수님의 옷을 서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외투 같이 좀 더 중요한 옷은 계급 이 제일 높은 사람이 차지했 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발 같 은 것은 아마 계급이 제일 낮 은 사람에게 돌아갔을 것입니 다. 이렇게 서로가 한 가지씩 나누고 보니 하나가 남았습니 다. 속옷입니다. 물론 속옷이 라고 해서 요즈음의 속내의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당 시의 속옷은 무릎까지 혹은 발꿈치까지 오는 통으로 짠 옷입니다. 통으로 짠 옷이기 때문에 네 조각으로 나누게 되면 걸레로도 쓸 수 없게 되 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제의했 습니다.
"이것은 나누지 말고 제비를 뽑아 누군가 한 사람 이 가지기로 하자."
그들은 그 제의를 좋게 여기고 제비 뽑기를 했습니다. 누가 그 옷 을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동 전 던지기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보 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지 아직 10 여분도 채 안된 때입니다. 그러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런데 찢어진 손발에서 핏방 울이 툭툭 떨어지고 십자가의 기둥에는 핏물이 흘러내리는 바로 그 발치에서 로마 군인 넷이 예수님의 옷을 놓고 '이 것은 내 것이고, 저것은 네 것이다' 하면서 옷을 나누고, 심지어 마지막으로 남은 속옷 까지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동전을 던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다윗이 시편 22편 18절에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처 형될 때 십자가 아래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날 것 이라 예언한 바 있긴 하지만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 입니까? 마치 쌍둥이를 힘들 게 낳다가 병을 얻은 어머니 가 한2,3년 동안을 죽을힘을 다해서 이 아이들을 키웠는데 이제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는데 그 앞에서 과자 하나를 놓고 서 로 먹겠다고 싸우는 것하고 비슷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그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있 는 그 현장에서 옷가지 하나 라도 더 차지하려고 눈에 불 을 켜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네 명의 로마 군인들을 측은 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시며 이 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 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 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그렇 습니다. 로마 군인들의 마음 은 칠흑 같은 무지의 어두움 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 들은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분이 누구인지, 또 그분 이 왜 죽으셔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니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자기들과 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주스러 운 무관심이 그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오직 남아 있는 것은 물욕이 요, 다른 사람보다도 하나라 도 더 얻는 것이요, 다른 사 람보다도 한발이라도 더 앞서 는 것입니다. 내가 더 잘 사 는 것, 이것 말고는 아무 것 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 로마 군인들에 게서 우리가 예수님을 몰랐던 때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습니 까? 우리가 예수님을 몰랐을 때, 하나님이 계시는 것도 인 정하지 않으려고 했을 때, 내 가 죄인이라는 것을 추호도 긍정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그 때 우리의 관심사가 무엇 이었습니까? 남보다 하나라도 더 소유하는 것이었지 않습니 까? 남보다 조금이라도 앞서 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십자 가가 도대체 우리와 무슨 상 관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로 마 군인들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 가 이렇게 소망이 없을 만큼 악했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서 그 고결한 피를 흘리며 죽 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내가 목마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여러 시간을 고통 하시다가 드디어 한마디 자기의 고통을 외쳤습 니다. 아니 외쳤다기보다는 들릴까 말까한 소리로 신음처 럼 한 마디 내뱉으셨다고 하 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내 가 목마르다"(요19:28). 시편 69편 21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의 고통을 이 한 마디로 요약 하여 예언했습니다.
"저희가 쓸개로 나의 식물을 주며 갈 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우리 예수님은 손바닥이 아프 다거나, 쥐가 난다거나, 숨이 가쁘다거나, 열이 난다는 따 위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 으셨습니다. 다만 그 모든 고 통을
"내가 목마르다"라는 한 마디에 집약해서 말씀하셨습 니다.
흔히들 목이 탈 때의 고통 을 일컬어 죽음의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한번도 그런 고통을 당해보지 않아서 목이 타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예 수님이 당하셨던 그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힘 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시 22:15). 물이 귀한 광야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이 갈증의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자 주 체험합니다. 우리는 이스 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한번 씩 당하는 이 갈증의 고통으 로 인해서 어느 정도의 위기 사태가 그들에게 엄습했는가 를 성경을 통해 자주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 았습니다. 홍해를 가르는 하 나님의 이적을 보았습니다. 불기둥이 밤낮없이 그들의 눈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 궤가 그들 중에 있습니다. 막 대기를 가지고 어떤 이적 기 사라도 행할 수 있는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그들의 눈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없어 가지고 목이 타 들어가고 혀 가 입천장에 들어 붙을 때가 되자 하나님의 기적도 소용이 없고, 하나님의 불기둥도 소 용이 없고, 과거에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이적 기사를 행했다는 모든 이야기도 소용 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진정 시킬 만한 어떤 것도 없었습 니다. 나중에는 나라의 기초 를 뒤흔들고 모세의 리더십을 완전히 뒤집어엎을 만큼 그들 은 엉뚱한 사람들이 되어 버 렸습니다. 목이 마르는 고통 은 그 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바로 이 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 분, 주님이 일평생 당하신 고 통과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한꺼번에 당하신 그 모든 고 통은 바로 우리의 고통을 친 히 체험하시는 과정이었습니 다. 주님은 세상을 살면서 온 갖 고통을 당하는 우리들과 같이 되시려고 친히 그 고통 을 맛보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지옥에서 영원토록 당 해야 될 고통을 십자가에서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 기에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 가 이 땅 위에 살며 당하는 고통을 이해하십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잘 압니다. 마음의 고통이 끼어 들어 우리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때면 마치 날카로운 칼끝으로 생살을 건드리는 것 같은 무서운 진통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 다. 우리의 육체에 감당할 수 없는 통증이 온다는 것도 우 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에게 찾아가 어린애처럼
"주 여, 나의 고통 아시지요? 나 의 고통 아시지요? 주님이 맛 보셨으니까 내 고통 아시지 요? 도와주세요."하고 기도하 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 다. 주님께서 몸소 우리가 당 하는 모든 고통을 당해 보셨 기 때문에 피 묻은 손으로 우 리의 고통을 치유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시스가 자기 고향 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 는 그가 자기 집 하인이 우물 에서 물을 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인은 밭을 지나서 모퉁이에 있는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왔습니 다. 그런데 그는 물을 길을 때마다 한 가지 이상한 행동 을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깊 지 아니한 우물에다 큰 물통 을 내려 물을 가득히 담은 후 끌어올릴 때면 항상 조그마한 나무토막 하나를 그 물통 안 에 던져 넣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참 신기하다 싶어 그 하인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왜 물을 길어 올릴 때마다 물통 속에 나무 조각을 집어넣어 끌어올 리느냐?"
그랬더니 그 하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을 퍼 올릴 때 나무 조각을 물통 안에 넣으면 물이 요동치 않 게 되어 물이 밖으로 흘러 넘 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 어요. 그래서 가능한 한 많은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이 지요. 나무토막을 안 넣으면 물이 제 마음대로 출렁거려서 나중에 보면 반 통 밖에 안될 때가 많거든요."
하인의 설명을 들은 프란 시스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 어서 자기 친구에게 이런 내 용의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흔들리 는 마음의 물통을 가지고 있 는가?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마음, 고통으로 심하게 요동 하는 마음, 절망으로 부서지 는 마음, 이것은 마치 심하게 흔들리고 출렁거리는 물통과 같은 것이지. 그러나 거기에 십자가라는 막대기를 던져 보 게."
마음이 공포로 짓눌리고 요동할 때는 십자가를 붙들라 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의 십자가에 기대라는 말입니 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 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 엇입니까? 십자가의 주님은 목마름의 고통을 맛보신 분이 시기에, 우리가 그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 의 고통을 함께 져 주시기 때 문입니다. 할렐루야!


"다 이루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지 약 6 시간이 지나갈 무렵 예수님은 또 한번 짧은 한 마디를 외치 셨습니다.
"다 이루었다"(30 절). 그리고는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마태나 마가는
"크게 소리 지르시고 운명하 셨다"고만 기록하고 있지 소 리 지른 내용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크게 소리 지 른 내용이 바로
"다 이루었 다"는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 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요한이 그렇게 생 생하게 기록할 수 있었을까 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겁이 나서 멀찍하니 군중 속에 숨어 가지고 아마 눈물 을 흘리면서 예수님이 십자가 에 처형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한은 대담하게도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주님 바로 곁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요 안나와 함께 핏방울이 툭툭 떨어지고 신음하시는 주님의 그 음성이 귀에 들어오는 가 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 렇기 때문에 주님이 마지막 호흡을 가다듬어
"다 이루었 다"고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6-7시간을 진액이 빠지도록 고통과 싸우고 이제 초죽음이 되어 마지막 호흡을 몰아 쉬 기 직전에 처한 사람이 소리 를 지르면 얼마나 크게 질렀 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놀 랠 만큼 소리를 크게 질렀겠 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 다. 그러나 예수님 가까이에 있던 요한은 그 소리를 분명 히 알아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힘을 다하여 말씀하신 한 마디 말씀에는 굉장한 힘이 있었습니다. 우 리가 세상을 살 때도 보면 한 마디의 말이 모든 진리를 대 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간 결한 문장 하나가 어떤 사상 을 전부 함축할 때가 자주 있 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사 람을 움직이고, 역사를 흔들 어 놓을 정도로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루터가 '의인은 믿 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 한 마디를 가지고 기치 를 높이 들자 중세기의 그 어 두운 암흑이 물러가기 시작한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 습니까? 링컨이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국민에 의한, 국 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라는 한 마디 속에 담아 외쳤을 때 북 아메리카의 여러 가지 혼 란 상황이 하나하나 수습되었 던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한 마디에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한때 우리 나라의 박정희 대통령도 유명한 한 마디를 내세웠습니다. '잘살아보세'입 니다. 어떻게 보면 어린애 노 래 가사 같은 짧은 구절입니 다. 그러나 그 한 마디는 정 말 무서운 말이었습니다. '잘 살아보세' 라는 이 말 속에는 그 분의 통치 이념이 들어 있 었습니다. 가난에 찌들은 이 나라를 어떻게 하면 잘 살게 만들어 열강 앞에 내노라하고 얼굴을 쳐들고 살 수 있는 나 라로 만들까 하는 집념과 한 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 러니까 엄청난 일을 했지 않 습니까?
사랑의교회에 들어와도 자 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평신 도를 깨운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지만 참 굉장한 말입니다. 사랑의교회 에 몸담고 오래 지내다 보면 '평신도를 깨운다'는 이 말이 얼마나 대단한 말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느끼게 될 것입 니다. 이 한 마디 안에는 옥 한흠 목사라는 사람의 목회 철학이 들어있습니다. 사랑의 교회가 어디로 가며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교회인가 하는 것이 그 한 마디 안에 다 들 어있습니다. 이 교회의 성격 과 특징이 무엇인가 하는 것 이 그 말속에 다 들어있습니 다. 한 마디 말이 가진 위력 은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하시는 말 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 리 성경에는 '다/ 이루었다'로 번역되어 있어 두 마디이지만 헬라어 본문에서는 '테텔레스 타이'(tetelestai)라는 한 마디 말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짧은 한 마디지만 그 안에 엄 청난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있 습니다. 그 높이나 깊이를 우 리는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 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창세 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내용이 그 속에 다 들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십자가 주변에 있던 사람 들에게 이 한 마디는 죽어 가 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지르는 외마디 비명처럼 들렸을지 모 릅니다. 한 맺힌 절규처럼 들 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 수님에게 있어서 그것은 승리 의 외침이었습니다.
"나는 이 겼노라. 나를 해냈노라. 드디 어 나는 완주했노라."하는 승 리의 외침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알고는 감 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길 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 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조차도 피땀을 쏟으며 고민하셨을 정 도로 발을 들여놓기 힘든 길 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 문에 그 길을 향해서 묵묵히 발을 옮겨 놓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여러 시간을 고생하시다가 이제 하 나님 앞에 갈 시간이 다 되었 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셨 습니다. 그 때 주님의 마음에 는 놀라운 기쁨이 솟구쳐 올 랐을 것입니다.
"다 해냈구나. 드디어 해냈구나!"
'테텔레스 타이'라는 외침 속에는 이런 기쁨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 이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지 만 예수님에게는 분명 그런 기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게 가장 큰 기쁨이 무엇이었 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 는 것이었습니다(요4:24,6:40). 할렐루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몇 시간 전에도 자기 마음에 기쁨이 있다고 제자들에게 고 백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 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 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 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 십자가 처형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 무슨 기쁨이 있 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에게 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것 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만이 아는 기쁨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전에도 마음속 에 이 기쁨이 있었지만 이제 십자가의 고통이 거의 막바지 에 이른 순간에도 자기가 그 렇게 피 흘려 죽음으로써 전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 이 드디어 활짝 열리게 되었 다는 생각에 그의 마음속에 기쁨이 샘솟았던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 습니다. 먼저는, 구약에 예언 한 모든 예언의 말씀이 예수 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뜻입 니다. (눅24:25이하). 둘째로 는,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려 고 하신 하나님의 영원하고 장대한 계획이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 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길 을 활짝 열리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주님이
"다 이루었 다"고 외치는 순간 아무도 접 근할 수 없게 막아 두었던 지 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져 내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된 것입니 다. 셋째로는, 예수님께서 십 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는데 성공하셨다 는 뜻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 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 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 라."
'다 이루었다'는 말은 주 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 나님의 희생적이고 무조건적 이고 영원한 사랑이 어떤 것 인가를 분명히 보여주게 되었 다는 말인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6-7시간 동 안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고 통을 감수하면서도 비명 한마 디 안 지르셨을까? 도대체 무 엇이 그로 하여금 비명을 지 르지 못하도록 꽉 붙들고 있 었을까? 어떻게 6-7시간 동 안 그처럼 죽음에 죽음을 거 듭하는 고통을 당하면서 돌아 버리지 않고 제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 렇게 장시간 동안 몸이 부스 러져 내리는 고뇌를 당하면서 도 까무러치지 않고 견딜 수 있었을까?'하는 것입니다. 정 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닙 니까? 필리핀에 있는 어떤 사 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 을 직접 체험해 보겠다고 자 기 손에 못을 박았다고 합니 다. 발에는 박지 않고 양손에 만 박았는데 그는 못을 다 박 기도 전에 그만 까무러쳐 버 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 님은 마지막까지 정신을 흐려 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명 한 마디 지르지 않으셨습니 다. 그 모든 고통을 안으로 흡수하면서 홀로 그 모든 고 통을 견디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모든 고통을 그렇게 감내할 수 있게 만든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 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 랑은 강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고통 할 때 비명을 지 를 수 있지만 사랑 때문에 고 통 당하는 사람은 비명을 지 르지 않습니다. 사랑 없이 고 통을 당하는 사람은 까무러칠 수 있지만 사랑 때문에 고통 당하는 사람은 까무러치지 않 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려 있게 한 것은 철 못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 가를 통해 하나님의 이 놀라 운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주 시는데 성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 신 것입니다. 숨이 끊어지는 마당에도 '아, 이 죄인들이 하 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구 나. 이 죄인들이 드디어 하나 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되 었구나. 이 사랑 때문에 이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의인으 로 인정받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서 마음속에 기쁨이 샘 솟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 분, 우리 모두는
"다 이루었 다"고 하시는 이 승리의 외침 때문에 엄청난 은혜를 입게 된 자들입니다.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 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 에게서 장차 주님과 함께 누 리게 될 그 영광을 빼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의 입에서 그리스도의 찬송을 앗 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 이루었다"고 하는 이 외 침 속에 하늘에 있는 모든 축 복과 특권이 우리에게 다 주 어졌기 때문입니다. 할렐루 야!
그러므로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십자가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 우리 가 십자가에 가까이 나가면 나갈수록
"다 이루었다"고 외 치시는 주님의 음성이 더 분 명하고 또렷하게 들릴 것입니 다. 주님의 그 힘찬 외침 속 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 외침 속에 우리의 환상이 있습니다. 그 외침 속에 넘어 지는 자 같으나 일어서는 힘 이 있습니다. 그 외침 속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의 긍지와 만족이 있습니다. 여 러분, 날마다
"다 이루었다"
고 하는 주의 음성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 쳐 봅시다. 그 음성에 우리의 능력과 소망과 꿈이 있습니 다. 주님께서 이와 같은 은혜 를 우리 모두에게 허락해 주 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 니다.

출처/처치포유넷 설교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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