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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요한계시록 1장9-20 / 밧모섬에 갇힌 요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by 【고동엽】 2022. 11. 17.
■2022년 7월 4일(월)■
 
(요한계시록 1장)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묵상/계 1:9-20)


◆ 밧모섬에 갇힌 요한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요한은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밧모섬에 갇혔다.
밧모섬은 터키에 있는 에베소에서 서남쪽 90km 지점에 있는 작은 섬이다. 우리나라 전라도의 압해도 정도 된다고 한다. 요한 당시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때 잡혀서 여기에 유배되었다고 한다.


잡힐 당시에는 모든 사도가 순교 당하고 요한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당시 90세 즈음 되었던 요한이 신앙 때문에 박해받고 밧모섬에 갇혀있으면서 자신의 고난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으로써 형제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서신서 수신자들에게 자신을 '너희 형제'라고 소개한다.
당시 수십만 명이나 되는 기독교인들에게 사도 요한은 주 예수님의 살아있는 증인이자, 유일한 사도로서, 지극히 존경받는 자였다. 그런데 이러한 요한이 자기보다 나이도 많이 어리고 여러모로 미숙한 신자들에게 자기를 '너희 형제'라고 소개하는 것은 겸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요한의 겸손은 어디로부터 나왔을까?
예수님에게 배운 것이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형제'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마 28:10). 요한은 살아가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를 새삼 새삼 느꼈다. 자기들과 3년간 함께 하신 그분이 알고 보니 엄청난 분이셨음을 알아가면서 그분이 이 땅에 사셨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굉장한 은혜였는지를 깨달았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께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시고, 사람들에게 온갖 조롱을 당하시며,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자신을 '섬기러 오셨다'고 선언하셨다(막 10:45). 겸손이란 이러한 것이다. 알량한 권력을 가졌다고 높은 칭호를 받기 좋아하고, 조금만 무시당해도 필요 이상으로 분노하는 자들과는 아예 다른 세계다.


요한은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스스로가 완전히 낮아졌다. 자기를 드러내기를 싫어하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 자가 되었다.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요한이란 이름이 단 한 번도 드러나지 않는다. 이렇게 신앙이란 점점 신앙하는 대상자를 닮아가게 한다. 그래서 복음이란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이란 이름을 밝힌 것은 편지의 수신자를 분명히 밝히면서 발신자를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10절의 '주의 날'은 오늘날의 주일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주의 날이 재림의 날(살전 5:2), 심판의 날(겔 욜 1:15)을 의미한다. 또한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모든 날을 의미한다(행 2:20).


◆ 예수 그리스도


(17-18)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8절에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셨다. 알파와 오메가는 그리스 알파벳에서 A와 Z다. 즉 하나님은 처음과 마지막이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과 동일하게 표현하셨다.


만일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몹시 교만한 것이며, 감히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게 하는 악한 존재가 될 것이다. 천사가 이렇게 하다가 땅 깊은 곳에 내리꽂히고 마귀라는 존재가 되었다(사 14:12-15).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실 수 있음은 예수께서 당연히 영광 받으실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입에서 잘 벼린 양날 검이 나옴(16)은 예수님의 말씀은 그와 같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힘이 있고 분명한 결과를 가져오는 말씀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 하나도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없다.


불꽃 같은 눈, 불에 달구어진 주석처럼 빛나는 발,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은 얼굴...
예수님께서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시자, 그렇게 대단해 보였던 사도조차 예수님의 발 앞에서 죽은 자처럼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하신 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으로 사시고, 심지어 죽으신 적이 있으셨다. 우주 전체에서 보면 티끌보다 작은 지구다. 거기에 붙어있는 인간은 벌레와 다를 바 없는 미물이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런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죽으셨다. 이것을 보면 온 우주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특별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신앙생활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가는 생활이다.
아, 주님, 주님이 이런 분이셨습니까? 하며 감탄하며 감격하는 삶이다.
대부분 사람이 예수에 대해 교리적으로 외우고 끝낸다. 그러나 삶 속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경험이다.


주님의 겸손, 주님의 사랑, 주님의 자비, 주님의 용서, 주님의 거룩하심...


신앙생활이란 내가 나를 죽여서 극기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을 알아감으로써 그를 닮아가는 삶이다. 그를 본받으려고 몸부림치는 삶이 아니라, 그에게 감격하여 스스로 굴복하고 그를 닮고 싶어 하는 삶이다.


TV나 유튜브, SNS에 수다 떠는 것에는 엄청난 시간을 들이면서 주님을 묵상하는 시간이 제로인 당신이 어떻게 주님을 닮겠는가? 드라마 속의 세속적인 주인공을 닮아가고 있음을 왜 모르는가? 잔인하고 악한 사건들로 가득한 기사를 매일 탐독하면서 당신의 마음도 메마르고 잔인해지고 있음을 왜 모르는가? 세상과 마귀는 착실하게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훔치고 있다.


그런 상황임에도 그냥 기억하고 있는 율법적 명령을 몇 개 행하고는 스스로는 꽤 괜찮은 신앙인이라고 자부할 것이다. 아, 수많은 성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지 않고, 율법으로 살고 있다. 주님, 우리를 율법적인 삶에서 믿음의 삶으로 옮겨주십시오.


그러므로 남을 비판하는 데는 열심이면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안 하는 형제들이여.
주님을 묵상하자. 그리고 주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가를 깨닫자. 그분의 실체를 아는 순간 감격하지 않을 수 없고, 성찬의 떡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주님을 안 만큼 내 생활도 변할 것이다.


나는 30년 간을 율법과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했고, 책도 만들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율법과 복음'이라는 제목을 '율법과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바꾸었다.


전에는 복음이란 명목 하에 율법에서의 자유와 그리스도인들의 권리에 대해서 집중했지만, 그게 오히려 방종과 세속적인 생활로 이끌 수 있음을 보았다. 율법에서의 자유는 성도의 대단한 특권이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지 않으면 그 자유는 오히려 방종으로 이끌 것이다. 우리가 목표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다.


주님,
주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를 알게 해주십시오.
삶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깨달아가면서 점점 주님을 닮게 해주십시오.
세속의 물에 떠내려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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