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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창세기 50장1-14 / 야곱의 장례식

by 【고동엽】 2022. 11. 17.
■2022년 6월29일(수)■
 
(창세기 50장)
 
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4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5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6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7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8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9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10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11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
12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13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14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묵상/창 50:1-14)


◆ 야곱의 장례식


야곱의 장례식은 거대하고 화려했다.
시체를 향으로 처리하는데 무려 40일이 걸렸다. 그리고 애굽 사람들은 70일 동안 그를 위해 애곡했다.
요셉이 죽은 것이 아니라 요셉의 아버지가 죽었는데, 온 애굽 사람들이 이렇게 한 것을 보면 애굽 사람들에게 요셉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야곱이 죽은 지 70일 후에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자 요셉은 바로에게 자신이 가나안에 올라가서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바로는 허락했다.


이스라엘이 있는 라암셋에서 헤브론까지는 직선거리로는 340km이지만, 오늘날의 도로로 가면 660km나 된다. 게다가 메마르고 험난한 광야길이다. 낙타로 부지런히 이동해도 열흘 이상이 걸리는 거리다. 그런데 이 피곤하고 험난한 길에 바로의 모든 신하와 원로와 애굽 땅의 모든 원로들이 함께 했다. 물론 이들 중에는 요셉의 눈치를 보느라 억지로 동행한 자도 있겠지만, 상당수가 요셉을 자기 민족을 살린 영웅으로 생각하고 진심으로 함께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동이 어려운 어린아이들만 빼고, 요셉의 온 집과 형제가 모두 가나안에 올라갔다. 


가나안 땅에서 이루어진 이들의 거대한 장례식을 보고 당시 사람들이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고 했는데 그 의미는 '애굽의 목초지'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슬픔을 뜻하는 '에벧'이 아벨로 잘못 붙여진 듯 한 것으로 여겨진다.


야곱의 후손들이 라암셋에서 가나안까지의 길을 걸어본 것은 의미가 깊다. 이들은 미래의 출애굽을 경험한 셈이다. 바로 이 길을 후손들이 걸어서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본향은 절대로 애굽이 아니다.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본향이다. 이것을 새삼 확인하고, 거듭 다짐했을 것이다.


우리도 이 세상이 본향이 아니다.
이곳이 몹시 살기 좋고,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듯 해도 우리의 본향은 저 위에 있다. 때가 되면 갈 준비를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우시기 위해 종종 광야 길을 걷게 하신다. 우리가 죽으면 갈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우리에게 저 하늘에 본향이 있음을 분명히 인식시킨 사건이다.
만일 부활과 승천이 지어낸 허구라면 기독교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더는 믿음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러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승천도 역사적 사실이다.


'벤허'라는 영화가 있다. 1959년 작품인데, 그 당시에 이런 대단한 영화가 제작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온 세계를 열광케 한 영화였고, 우리나라에 나이 든 사람들은 대부분 이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지은 자는 류 윌리스라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미국의 퇴역 장성이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신으로 믿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남은 평생을 예수님은 인간에 불과함을 증명하는 데 바치기로 했다. 그는 유럽의 도서관을 전전하고 여러 자료를 모았다. 그리고 예수님이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증명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연구하면 할수록, 자료를 모으면 모을수록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할 수 없는 지경에 몰렸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며, 예수님은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계속 억지를 부릴 것인가, 아니면 겸손하게 받아들일 것인가?


윌리스는 과감하게 펜을 던져 버렸다. 그리고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류 윌리스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가 그동안 쓴 글들을 모두 없애버리고, 다시 쓴 책이 '벤허'다. 그 책에서 복수하려고 하는 열망에 사로잡힌 벤허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예수님의 은총으로 문둥병이 낫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그들이 믿는 구주가 십자가에 힘없이 못 박혀 있는 것을 통해서 '용서와 사랑'만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깨닫는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 사실은 어떤 논리로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양보하는 순간 기독교는 무너진다. 그리고 부활과 승천이 사실인 이상, 우리의 본향은 분명히 하늘에 있다. 이렇게 본향을 사모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6) 아멘.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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