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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로마서 13장8-10 / 사랑하라는 율법이 율법의 완성이냐,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냐?

by 【고동엽】 2022. 11. 14.
■2022년2월15일(화)■


(로마서 13장)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묵상/롬 13:8-10)


◆ 사랑의 빚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사랑의 빚은 다양한 재료로 되어 있다.
그것이 돕는 물질일 수도 있고,
내가 가장 어려울 때 함께 있어 준 시간일 수도 있고,
내가 절박할 때 나를 위해 애써준 도움 기도,
나를 주님께로 인도한 전도의 수고일 수도 있다.


이렇게 사랑의 빚은 다양한 모양으로 내게 주어진다.
사랑의 빚으로 서로 얽혀있을 때 그 공동체는 아름답다.


사랑의 빚은 오직 사랑으로만 갚을 수 있다.
내가 목말라 죽어갈 때, 물 한 그릇을 준 사람에게 다시 물 한 그릇 돌려주는 것이 갚는 것이 아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자가 진 빚이 단지 상처에 사용된 기름과 포도주 약간, 그리고 숙박비 두 데나리온과 하룻 밤 간호의 수고 정도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돈으로 쳐서 갚으면 될까?


주님께서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란 '자비를 베푼 자'(눅 10:37)라고 하셨다.  사랑의 빚을 진 자는 그를 이웃으로 간주하여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사랑의 빚은 갚을 방법이 없다. 그냥 평생 안고 살면서 그에게 감사하고 사랑할 뿐이다. 


빚은 우리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나중에는 빚쟁이의 종이 되게한다. 
우리가 빚을 지지 말아야 할 이유다. 
그러나 사랑의 빚은 우리를 격려하며, 살아갈 힘을 준다.
다른 빚은 거절해야겠지만, 사랑의 빚은 받아들이자. 


우리는 하나님께 이런 사랑의 빚을 진 자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흘려보내야 한다. 


형제들에게 사랑의 빚을 지우자. 
그리고 사랑의 빚은 받아들이자.
그것이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진 자들이 할 의무다.




◆ 사랑은 율법의 완성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한다면 수백가지의 율법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수백 가지의 율법은 사랑하라는 말을 각론화한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다(마 22:40). 


사람들은 말한다. 율법은 육백 가지가 넘지만, 복음은 오직 한가지다. 곧 사랑이다.  
아멘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율법에서는 계명이 육백 가지가 넘었는데, 복음은 사랑이라는 한 가지 계명만 지키면 되니 얼마나 짐이 가벼운가!  
그런데 무언가 찜찜하다.


율법을 주신 이유가 인간이 죄인임을 밝히기 위해서인데, 마치 다른 율법은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사랑하라는 율법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것은 모순이 아닐까? 오히려 그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 아닐까? 


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도 율법에 속해있음을 기억하라(레 19:18). 


율법의 일부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절망하는 중인데 그보다 더 큰 계명인 '사랑하라'는 율법은 가능하단 말인가? 말도 안된다. 


우리는 착각하면 안된다. 
사랑하라는 율법이 율법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이 둘이 무슨 차이일까?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팥쥐 엄마는 콩쥐 아버지와 재혼했다.
팥쥐 엄마에게 못난 팥쥐는 언제나 귀엽게 보이는데, 콩쥐는 잘 났어도 이유 없이 미웠다.
제대로 밥을 주지 않고 학대하는 사실을 고을 원님이 알자, 팥쥐 엄마에게 엄포를 놓았다.
앞으로 밥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 곤장 열 대씩 때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팥쥐 엄마는 곤장 맞는 것이 겁나서 콩쥐에게 밥을 꼬박꼬박 주었다. 이것이 법의 힘이다.
그런데 문제는 콩쥐에게 밥은 주지만, 옷을 제대로 입히지 않았다. 겨울에도 얇은 옷만으로 버티는 콩쥐가 안쓰러운 원님은 다시 팥쥐 엄마를 불러서 옷을 제대로 입힐 것을 명령했다. 팥쥐 엄마는 할 수 없이 팥쥐 옷 몇 벌을 콩쥐에게 입혔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콩쥐에게 너무 많은 노동을 시키는 것이었다. 도대체 법을 몇 가지를 만들어야 이 문제가 깨끗이 해결될까?


고을 원님은 고민하다가 갑자기 좋은 깨달음이 떠올랐다.
아,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다. 이것 해라, 저것 해라 일일이 말할 것이 아니라, 콩쥐를 팥쥐와 똑같이 사랑하라고 하면 되겠구나!


원님은 팥쥐 엄마를 불러서 멋진 명령을 내렸다.
"너는 콩쥐를 팥쥐와 똑같이 사랑해라."


자,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모든 것이 해결되었을까?
아니다. 그 뒤에 팥쥐 엄마는 사람들 앞에서는 콩쥐를 사랑하는 척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사람이 없을 때는 말도 못 하게 콩쥐를 구박했다. 


사랑하라는 명령이 팥쥐 엄마를 움직이고, 콩쥐를 사랑하게 했을까?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가식적인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사랑하는 척 하는 사람에게 사랑받아 본 적 있는가? 그것은 아무런 감동도, 기쁨도 주지 못한다. 


과연 팥쥐 엄마는 콩쥐를 사랑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팥쥐 엄마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어느 날 팥쥐 엄마는 우연히 콩쥐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콩쥐 등에 특이한 큰 점이 하나 있는 것이 보였다. 팥쥐 엄마는 몹시 놀랬다. 그 점은 과거에 잃어버린 자기 첫 딸에게 있었던 점이 아닌가? 첫 딸을 세 살 때 시장에서 잃어버렸는데, 얼마나 찾아 헤맸던가? 그 딸에게 있던 특이한 점은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팥쥐 엄마는 덜덜 떨렸다. 그는 즉시 콩쥐 아버지에게 달려가서 물었다.


"콩쥐가 당신 딸 맞소?"
"실은, 콩쥐가 내 친딸은 아니고 시장에서 헤매는 아이를 내가 데려다 키웠소."


맞다. 콩쥐는 팥쥐 언니가 맞다.
팥쥐 엄마는 콩쥐에게 달려가서 대성통곡했다.
"내가 내 딸을 몰라보고 구박했구나. 내가 나쁜 년이다. 너를 몰라본 이 어미를 용서해다오"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원님의 모든 명령, 밥 줘라, 옷 입혀라, 노동을 심하게 시키지 말라 같은 명령이 필요할까?


율법의 완성이 되는 사랑이란, 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의지로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필요가 없이 아예 처음부터 율법으로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율법의 완성이 되는 사랑은 명령으로 생긴 사랑이 아니라, 감동에서 생겨난 사랑이다.  
율법은 사랑하라는 명령을 할 뿐 사랑하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율법 아래서는 사람들이 단지 사랑하는 척을 할 뿐이다. 내 속에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겠는가?


내가 변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 
성도들도 팥쥐 엄마가 그 속마음이 변하듯이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 
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히 10:16)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우리 마음의 변화를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법을 우리 마음에 새기시고, 우리 생각에 기록하셨다.


생각에 기록함은 단지 말씀을 암송해서 기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직 예수를 믿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놀라운 마음의 변화이며, 믿음의 신비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오로지 예수를 믿음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다. 구원 받을 때만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믿음은 끝임없이 현재형이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이 내 속에 흘러들어오는 경험을 한다.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을 느낄 때, 비로소 나와 관계없는 사람까지 사랑할 동기와 의욕이 생긴다. 


믿음에서 발생한 사랑만이 원수에게 복수를 하지 않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며 사랑할 수 있게 한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자.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를 체험하자.


아, 많은 사람이 복음을 지식으로만 알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오는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자기 편견에 휩싸여서 강단에서 율법타령이나 하며, 성도들에게 율법주의적인 삶을 가르친다. 
실은 믿음의 비밀을 모르는 자는 집사 자격도 없다(딤전 3:9). 


우리가 십자가를 묵상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긍휼과 자비를 깨달을 때,  우리 심령은 감동되며, 비로소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음은 노력의 부족이 아니라, 믿음의 부족임을 왜 모르는가? 


사람들은 사랑하려는 결심을 하고는 스스로 만족한다.  항상 마귀는 결심만으로 성취한 것같이 착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 결심이 도대체 얼마나 가는가? 과연 실생활에 제대로 적용 되던가? 설사 그렇게 조금 실천하게 되면, 이제는 자만심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그것이 자기 의의 특징이다.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훌륭하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묵상하라. 그게 진정한 사랑의 비결이다.  


주 예수님!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깨닫게 해주십시오. 
주님에게서 배운 긍휼과 사랑으로 형제들을 대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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