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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로마서 12장 17-21 / 선으로 악을 이기라

by 【고동엽】 2022. 11. 14.
■2022년2월11일(금)■
 
(로마서 12장)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묵상/롬 12:17-21)


◆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정직한 사람이 모든 사람과 화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6)라고 하셨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으려면 진리와 정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움받을 용기도 있어야 한다. 


화목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주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마 5:()
그러나 모든 사람과 화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바울은 화목 앞에 '할 수 있거든(If it is possible)'이란 조건을 붙였다. 할 수 있거든이란 말 '뒤나토스'는 온 힘을 다해서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최선을 다해서 달성해야할 덕목임을 말해준다. 


이꼴 저꼴 다 보기 싫어서 직장을 그만두고 목사가 된 내 친구는 거룩한 성도들과 함께 행복한 생활이 시작될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교회에서 사역하자 그는 교인들의 비판과 무례함 속에 치이고 또 치였다. 지금은 목회를 그만두었다.  어떤 친구는 부목사로 사역해보니 담임목사의 부당함과 횡포에 좌절했다. 강단에서 그렇게 거룩한 말씀을 전하는 모습과 너무나 달랐다. 담임목사로 부임한 어떤 사람은 장로와 교인들의 횡포에 도저히 사역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시기와 분쟁과 불의가 있다. 과연 이런 사람들과 화목하며 살 수 있을까?


화목하게 살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내가 죽어야 한다. 
내 성질대로 살다간 절대로 화목하며 살 수 없다. 나를 함부로 판단하고, 뒤에서 비난하는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들어도 못 들은 체, 보아도 못  본 체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관용을 갖지 못하면 화목하며 살 수 없다.  


또 하나는,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
화목하게 살기 위해서 노란색을 빨간색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맞다고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존중할 필요는 있다. 그는 색맹일수도 있으니까. 그를 무시하고 공격하는 것은 화목하게 사는 법이 아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다. 
정직과 타협의 경계선을 잘 구분하려면 절대적으로 지혜가 필요하다. 화목을 유지하면서 거절하는데도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가 집단 속에서 화목하게 살려면 집단의 불의에 어느 정도 눈감아야 하는 상황이 생기고, 상사의 부당함도 어느 정도는 참아야 한다.  솔로몬은 이렇게 조언한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전 7:16).  지나친 의에 대한 강박은 인간 생활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나 불의와 타협하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그 경계선을 잘 구분해야 한다. 여기에 지혜가 필요하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5)


세상의 모든 불의를 다 뜯어고치려는 것은 지나친 오지랖이며 교만이다.  그렇게 살려면 아마도 우주 밖으로 나가야 할거다(고전 5:10).  그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하실 일이다. 그러나 내가 고칠 수 있는 위치가 된다면 반드시 고쳐야 한다. 


◆ 선으로 악을 이기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 말씀처럼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이 없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복수심으로 들끓고 있다. 나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에게 그 몇 배를 갚아주어야 한다. 항상 우리는  싸가지 없이 행동한 사람들의 버릇을 고쳐주어야 한다는 정의감(?)에 불타있고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죄가 얼마나 큰지 후회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룩한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원수에게 복수하는 특이한 방법을 가르친다.
숯불을 원수의 머리에 올려놓는 방법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이해가 안되면 숯불을 머리에 올려놓아보라. 얼마나 뜨겁겠는가? 원수에게 가장 통쾌한 복수다. 


그런데 그 방법이 묘하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하신다. 이게 숯불을 원수의 머리에 올려놓는 것이라고 한다. 


원수는 우리가 복수할 것을 예상했는데, 오히려 친절과 선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그 양심이 불타는 것 처럼 될 것이다. 설사 양심에 미동조차 없을지라도 상관없다. 그런 양심없는 자는 결국 주님께서 지옥불로 그 전체를 태우실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먹이고 마시우는 것, 딱 거기까지다. 
우리는 원수가 소멸되는 것보다 자기 죄를 깨닫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것이 더 통쾌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선함이며, 세상 사람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은 자의 경지다.
이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주 예수님께 배운 것이다. 
침 뱉고, 머리를 때리며,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다. 


스데반도 예수님을 본받아서 돌에 맞아 죽으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행 7:60)


이 기도의 응답으로 바울이 회개할 기회를 얻었다. 
스데반을 죽인 바울이 벼락맞아 죽는 것이 통쾌할까,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며 회개하고, 평생 스데반을 죽인 것을 후회하며(딤전 1:13), 사도가 되어서 주님을 위해 헌신하게 되는 것이 더 통쾌할까? 


악을 악으로 갚지 말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자. 
그가 악을 행하면 우리는 두 배 선으로 갚는다. 이런 관용의 마음이 이 세상을 바꾼다. 주님으로부터 이런 것을 배워야 한다.


주님, 
주님 안에 있던 관용과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주십시오. 
화목을 위해 인내와 지혜를 허락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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