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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로마서 12장1-2 / 로마서에서 해석하는 십계명과 율법

by 【고동엽】 2022. 11. 14.
■2022년2월7일(월)■
 
(로마서 12장)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묵상/롬 12:1-2)


로마서는 놀랍도록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 
1장부터 8장까지 복음을 설명하고, 
9장부터 11장까지는 유대인을 언급함으로써, 구약의 예언이 교회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린다.
그리고 12장부터 14장까지는 그림자였던 십계명과 율법이 복음 안에서 어떻게 실체화되는지를 밝힌다.


십계명은 하나님 사랑, 부모 공경, 이웃 사랑으로 되어있다.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났지만, 이러한 선하신 하나님의 의도까지 벗어난 것은 아니다. 
십계명과 율법은 복음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지, 13장에서 권위에 대한 바른 태도, 그리고 나머지 계명들, 14장에서 안식일과 절기, 그리고 음식 문제 등을 복음의 입장에서 놀라운 방법으로 다룬다. 


나는 오랫동안 복음은 율법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율법과 복음이 그림자와 실체로 연결됨을 깨닫게 되면서 내가 오랫동안 강의했던 '율법과 복음'을 '율법과 그리스도의 법'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로마서의 12,13,14장이 십계명과 율법을 복음 안에서 실체화하고 복음의 입장에서 적용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림자인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화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가능한가? 


복음의 진리와 믿음과 성령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셋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결국 그는 율법주의로 전락한다. 예외가 없다. 


그렇게 믿음이 충만하고 성령으로 충만했던 형제도 복음의 진리를 모르니까 결국은 율법주의로 전락했으며, 그렇게 복음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형제도 믿음의 신비와 성령의 능력을 모르니까, 결국 율법주의로 전락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지식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삶이 아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어떤 것일까?


십계명의 앞부분, 하나님을 섬김에 대해서 로마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한다고 했다. 
이 말은 지극히 자비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권하는 말씀이다. 


인간의 자비는 보잘 것 없다. 인간의 자비에는 자기 욕심도 살짝 끼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지극히 순수하다. 전적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자비하심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신 그 하나님의 자비, 그 자비로 권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라는 권면에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간곡히 권하는 아비의 심정을 느낀다. 이 약만 먹으면 죽어가는 아들이 살 수 있을 뿐더러 더 건강해질 수 있다. 그런데 아들이 먹기 싫다고 버티고 있다. 이럴 때 아비의 심정은 어떨까? 


바울은 성도들에게 우리에게 최고로 보람되고, 의미있는 삶을 권하고 있다.
그것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동물 제사를 드릴 때, 그들을 죽여서 제단에 올렸다. 제단에 올려진 동물은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진 모습이다.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다만 살아있는 제물(living sacrifice)로 드려져야 한다. 그것은 수동적인 헌신이 아니라, 능동적인 헌신이다.  


헌심이 아니라 헌신이다. 
'마음'이 아니라 '몸'을 드리라고 한다. 
많은 사람이 마음은 온 세계를 두루 다니면 복음을 전하지만, 정작 몸은 자기 직장 동료에게조차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마음은 이웃을 위해 불사르고 있지만, 정작 이웃을 도울 때는 지극히 인색하다. 마귀는 그들의 마음에 늘 속삭인다. "미래에 돈을 많이 벌면...", "미래에 여유가 생기면..." 그리고 자신이 이런 미래의 헌신을 상상하고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훌륭한 헌신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한다. 


몸을 주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율법적인 강요에 의할 때 그는 비참한 종의 모습이 된다. 


반면에 믿음과 성령에 의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임을 깨닫게 되고 기쁨으로 헌신하게 한다. 
사도들은 채찍에 맞자 오히려 자신들이 주님의 이름때문에 고난 받는 것을 기뻐했다(행 5:41). 이게 율법적인 강요로 될 일인가?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주일에 공동체가 모여서 드리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다. 
공동체가 모여서 드려지는 '경배(worship)'를 예배라고 한다면 일상 생활에서 주님을 경외하며 봉사하는  '섬김(Service)'도 예배다. 이 둘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경배는 섬김이 되고, 섬김은 경배가 된다. 한쪽이 생략된 삶은 문제있는 삶이다.  어떤 것도 약화시키지 말자. 




◆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많은 성도들이 TV와 인터넷과 각종 매체에 노출되어 있다. 
이제 이런 것들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물론 유익한 것도 제법 많다.
문제는 성도들이 그것을 통해 언어를 배우고, 세속화된 가치관에 물드는 것이다. 
하긴 하루종일 보고 있는데, 어떻게 영향을 받지 않겠는가? 드라마에 빠져서 주인공을 맹목적으로 좋아할 때 그의 행동을 나도 모르게 본받고 있으며, 그들이 툭툭 던지는 세속화된 가치관이 내 뇌리에 깊에 박힐 때 내 속의 믿음도 함께 소멸되고 있음을 왜 모르는가? 


지금은 날카로운 분별력이 필요할 때다. 
말씀을 묵상하고, 외우고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믿음을 지킨다.
이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애쓰고 힘써야 할 영역이다. 왜 믿음을 지키는 싸움을 하지 않는가? 


모든 것의 원천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다. 이것을 잃으면 모두 끝난다. 성도의 삶은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삶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려고 애쓰는 삶이어야 한다. 믿음만 잃지 않으면 모두 지킬 수 있다. 


주님,
이 세대에 물들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 세대를 제대로 분별하게 해주십시오. 
제 몸이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려지기를 원합니다.
이 복된 삶을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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