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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욥기 23장1-17 / 나는 털고 또 털어도 순금처럼 깨끗한 자일세

by 【고동엽】 2022. 11. 13.
■2021-11-11(목)■
 
(욥기 23장)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4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5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6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7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15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16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17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


(묵상/욥 23:1-17)


◆ 내가 순금이라는 것을 아실 걸세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0절은 욥기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말씀이다.
고난을 거친 후에는 내가  순금처럼 될 것이라는 욥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이며, 역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역경을 의미 있게 하는 말씀으로 사용된다.  수 많은 설교에서 인용된 구절이다.


그런데 어떤 형제가 이 구절이 다른 성경에서는 판이하게 번역되었음을 알려왔을 때, 나는 이 구절이 욥기를 해석하는 매우 중요한 열쇠임을 알게 되었다. 과거에도 새번역으로 두 번이나 읽으면서 다르게 번역되었음을 알았지만, 그냥 무심코 지나갔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특히 공동번역은 충격을 던졌다.


"그런데도 그는 나의 걸음을 낱낱이 아시다니.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공동번역)


"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표준새번역)


"그래도 하나님은 내 옮겨 놓는 발걸음 다 알고 계시는 분. 내가 어떤 인간인가 알아보시려 하나 내가 깨끗한 인간이란걸 아실걸세."(현대어성경)


"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NIV)


이 번역에 의하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역경을 거쳐서 순금이 될 것이라는 멋진 신앙고백이 아니라, 테스트해보면 자신이 순금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자신만만함이다. 70인역 성경도 동일하게 번역했다.


이처럼 반대되는 두 번역에서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 무척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이어진 11절, 12절을 보라.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고, 그의 길을 치우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문맥에 어울리는 번역은 개역개정이 아니라 공동번역, 표준새번역이다.
사실 나는 공동번역이나 새번역은 의역을 많아서 성경 공부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구절만큼은 의도에 맞게 잘 번역했다고 본다.


즉 10절은 아름다운 신앙고백이 아니라, 오히려 욥이 자신의 의에 대해 자신만만함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10절을 욥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으로 간주하면, 후에 나타나셔서 욥을 호되게 책망하시고 몰아붙이시는 하나님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역경을 믿음으로 이겨낸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시는 것인가?


그렇게 많은, 그렇게 오랜 고난 속에서도 견뎌낸 욥에게 단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한 것만 섭섭해하시고 책망하시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으신가?


그러나 10절이 욥의 무의식 세계 속에 있었던 자만심을 드러낸 것이라면 앞뒤가 제대로 맞아떨어진다.
10절의 바른 번역은 꼬여있는 욥기를 제대로 해석하게 해주는 실마리다.


욥은 자신을 순금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자만심은 주변 사람도 그 누구도 눈치채지도 못했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 조차도 몰랐다. 그런데 고난과 친구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욥에 의하면, 자신이 이렇게 의로운데, 이런 고난을 퍼부으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오해하고 있음이 분명하고, 복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자신이 으뜸일 텐데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가 있다. 이것을 따지고 싶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현실이 속상하다.  


세상의 어떤 교육이 이렇게 겸손이라는 탈을 쓰고 교묘하게 숨어있는 자기 의에 대한 자만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설교가 그런 것을 회개하게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욥의 고난이 생각보다 길어진 이유는 이런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결국 욥기의 맨 마지막을 보면 욥이 자신의 교만과 오해를 회개함으로써 새로운 신앙의 경지에 올라선다. 


결과적으로 보면 욥이 순금같이 되었지만, 그러나 지금 욥의 고백은 전혀 그런 의미는 아니다.


욥기가 구속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것은 욥이 자기 의, 자신의 교만을 회개하고 비로소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며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욥기가 주는 최고의 교훈이다.


욥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따른 삶은 귀감이다.
우리도 본받아야 할 점이다.
그러나 욥의 밑바닥, 무의식 속에 똬리 틀고 있었던 자기 의에 대한 자만심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어느 인간이 이렇게 자기 의를 깨닫고 회개하여 오직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고 살까?
그 깨달음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총이다.


내 친구 목사가 암에 걸렸을 때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쭉 늘어놓은 것이 바로 자기 의였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였으며, 내가 외간 여자 손목 한번 잡아보지도 않은 사람인데....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은 단 한마디다.
너는 진정으로 나를 믿은 적이 없다.


그는 종교 생활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여전히 자기 의에 의지해서 살면서도, 말로는 십자가 운운했던 과거의 삶을 진심으로 회개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진정으로 믿게 되자 비로소 불안에서 벗어나서 평안할 수 있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자.
나의 의, 나의 자만심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십자가의 사랑, 하나님의 의만을 붙잡자.
아마도 우리 삶의 역경과 고난은 이것을 깨닫기 위하는 과정일지 모른다.


성령이여,
오셔서 나의 자랑, 나의 자만심을 태워주십시오.
한편으로는 내 자랑에 몰두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혐오로 좌절하는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감사하고 주님만을 자랑하며, 십자가를 붙잡는 그런 신앙으로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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