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 새소망, 새사람 디모데전서 1:1~2 /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그렇게도 떠들석하던 새천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달라진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해가 서쪽에서 뜬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20평아파 트가 60평으로 뒤바뀐 것도 아니고 서울의 부산으로 변한 것도 아닙니 다. 모든것이 어제 그대로입니다. 달라진것이 있다면 달력의 큰 글자가 바뀐 것 뿐입니다. 1999년이 2000년으로 바뀐것입니다. 21세기 사전이라는 책을 쓴 자크아탈리는 21세기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 했습니다. "찬란하고, 환희에 차 있으며, 야만스럽고, 행복하고, 기상 천외하며, 기괴하고, 도저히 살 수 없고, 인간을 해방시키며, 끔찍하 고, 종교적이면서도 종교 중립적인 사회가 21C기의 모습이 될것이라"고. 과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은 21세기에 일어날 사건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 하고 있습니다. 우주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은 미래에는 유전적으로 변 형된 새롭고 향상된 인간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말하년 생명 공학의 발달로 나쁜유전인자를 제거한 슈퍼베이비가 태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컴퓨터기술이 발달하여 인간의 지능과 컴퓨처의 기능을 하나 로 묶어 만든 신인류가 태어날 수도 있다고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말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민간 연구소인 미래재난은 20세쯤 사회생활을 시작 40세 후반 에 퇴직, 대학에서 다시 교육을 받은 후 다른 직업을 갖게 된다는 것입 니다. 평균수명이 120세로 늘어 나기때문에 60세가 넘어도 정력이 넘치 고 건강해서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덕의 타락으로 퍼진 에이즈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감염이 확되될 것 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성도덕은 갈수록 타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2050년까지 달기지 건설 계획을 마무리하고 우주여행상품을 등장시킬 것이고 우주정거장은 빠르면 2004년경 완공할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 60억인 세계인구는 2025년이 되면 85억이 될 것이고 지구온난화 로 식량생산이 줄어 극심한 식량난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월 드 워치 연구소 레스터 브라운 회장의 경고 입니다. 그리고 21세기 교육은 인터넷교실이 보편화 되면서 칠판과 분필이 없어 지고 아이들은 학교가 무엇인지 모른채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게 될 것이 라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듣고 읽고 보다보면 도대체 뭐가 어떻 게 돌아가는지 예측이 어려운 혼돈의 시대가 아닐수 없습니다. 혼돈을 영어로는 카오스(chaos)라고 합니다. 카오스라는 말은 본래 우주 의 질서, 전체의 질서를 뜻하는 그리스어 코스모스(Cosmos)의 반대말이 었습니다. 카오스란 입을 벌린 웅덩이처럼 언제 빠져들지 모르는 혼란과 혼돈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21세기를 희망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보는 21세기 새천년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그것은 크게 두가지로 대별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소망이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절망입니다. 해가 가까운 곳은 열대지방이고 해에서 먼 곳은 한대 지방 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천년 뿐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는 밝은 소망이 세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위에서 잠깐 언급한대로 희망도 없고 기약도 없는 혼돈의 세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볼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천년을 맞게 된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 서두 (1:1)에서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2000년 총회주제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라고 했습 니다.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모인 제2차 세계교회협의회 표어도 "세계의 소망이신 그리스도"였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소망을 야할(yachal)이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기다리다" "끈기 있는" "소원을 두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망이란 일정한 소원을 두고 끈기있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소망을 크게 두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수평적 소망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거는 소망, 사람이 사람 에게 거는 소망을 뜻합니다. 사도행전27장 보면 바울이 로마로 가기 위해 승선한 알렉산드리아라는 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항해도중 지중해에서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났습니다. 사도행전27:20을 보면 "여러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수원의 소망이 다 없어졌더라"고 했습니다. 하늘을 보아도, 땅을 보아도, 바다를 보아도, 배를 보아도, 선장과 선주와 기관장과 갑판장을 보아도 살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대통령을 새로 뽑고 국회의원을 새로 뽑고 장관을 새로 정하는 일들을 수 없이 되풀이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젠 좀더 낳은 사회가 되겠거니라며 기대와 소망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새정당을 만들고 깨끗하 고 건강한 피를 수혈하듯 새 인물들을 대거 영입해 해로운 정치를 꾀한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정치라면 여.야가 조금도 다를바가 없습니다. 사람이나 세상은 소망의 대상이 못됩니다. 다른하나는 수직적 소망입니다. 수직적소망이란 아래서 위를 바라보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풍랑만난 알렉산드리아호가 절망에 빠져있 을때 그배에 동승해던 바울이 본 환상과 계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걱정마라 내가 너와 네가 탄 배를 구원해 주겠다 "는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해도 별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바다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 서 바울은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5)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소망을 하나님께 두었던 것입니다. 잠언11:7을 보면 "악인은 죽을때 그 소망이 끊어진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그 소망을 따라 사는 사람은 죽을때 소망도 함께 죽고마는 것입니다. 로마서8:24을 보면 "보이는 것은 소망이 아니니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6:17을 보면 "재물에 소망을 두지말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보이는 것들은 소망이 될수 없기때문입니다. 하나님 바라보고 하나님께 두는 소망은 산소망이요 새소망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걸고 물질을 바라보는 소망은 죽은 소망이며 낡은 소망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냉동차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튿날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냉동차는 사실은 고장이 나서 냉동이 전혀 되지않는 차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냉동 차이기때문에 으례히 얼어죽을거라는 고정관년, 자기암시때문에 고장난 냉동차에서 얼어 죽었던 것입니다. 어떤 소망을 갖느냐, 어떤 믿음을 소유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 합니다. 그 소망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 습니다. 그 믿음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얼어 죽을수도 있고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금년 한해를 살아 갑시다. 시편 146:5을 보면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새천년 새해 첫주일입니다. 소망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요 선물입 니다. 그 선물을 받을 사람은 새사람이어야 합니다. 음식은 맛도 중요합니다만 어떤 그릇에 담느냐도 중요합니다. 된장 국맛은 뚝배기에, 갈비탕은 사기대접에 담아야 맛이 납니다. 새소망 은 새사람이라는 그릇에 담아야 빛나게 됩니다. 누가 새사람입니까? 첫째 거듭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3:5을 보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거듭난다는 것은 나를 포기하 는 것, 나를 버리는 것, 그리고 예수님으로 빈 곳을 채우는 것을 뜻 합니다. 나를 포기하고 버리지 못하면 "새로운 나"가 되지 못합니다. 저는 가끔 수술실에 들어갈때의 제 모습을 생각해 보곤 합니다. 수 술실에 들어가는 날 아침 코에는 호스를 꼽고 팔에는 링거주사를 꽂 았습니다. 그리고 몸은 완전히 알몽이었고 환자 까운만 하나 걸치 고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늘 몸에 지니고 있던 시계도 풀어 놓아 야 했고 안경도 입원실에 두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수술실에 들어가 마취가 된 이후의 사건은 전혀 모릅니다. 수술대 위에 누운 채 수술팀에게 완전히 제 몸을 맞기고 있었습니 다. 수술팀은 제 복부를 절개하고 위를 절제했습니다. 이러한 일련 의 행동들은 살기 위한 방법이었고 살리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내 가 죽지 않고 살기 위해 다 집어 던지고 수술대 위에 누웠던 것처 럼 내 영혼이 죽지 않고 살려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서야 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포기 할 것은 포기하고 끊을 것은 끊고 자를 것 은 잘라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회개입니다. 철저한 회 개가 필요합니다. 죄를 버리고 악습을 포기하고 나쁜 습관을 끊고 불의를 잘라 버려야 합니다. 회개의 원리가 있습니다. 나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욕 하거나 손가락질 할 때 흔히 둘째 손가락을 펴서 상대방을 가리킵니 다. 그러나 그 때 엄지 손가락, 가장 굵고 큰 손가락의 방향은 나 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어지 세 손가락의 방향도 나를 향하 고 있습니다. 나부터, 내가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께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지은 죄라도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이유는 용서하시 고 속죄하시는 권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합시다. 나부터 회개합시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 받읍시 다. 둘째 새사람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을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 다. 그렇습니다. 천년도, 2000년도, 오늘 하루도 그리고 나도 그리 스도 안에 있으면 새천년이 되고 새해가 되고 새날이 되고 새사람 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제아무리 해가 바뀌고 날이 바뀌고 조직이 바뀌고 책임자가 바귀어도 새날과 새 사람이 될 수 없는 것 입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면 죽습니다. 참새는 물속에 들어가면 죽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떠나면 죽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결론 앞에 서야 합니다. 새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흘리신 붉은 피로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과 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새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한시간에 300킬로미터를 달리는 고속전철 떼제베도 철로를 벗어나 면 전복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누구라도, 예수 십자가를 떠나 거나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고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새천년 새해에 새사람이 됩시다. 새 사람 된 것을 감사합시다. 새 사람들의 힘을 합쳐 새나라, 새사회, 새교회를 만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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