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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 인생(고린도후서 4:7-11)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질그릇 비유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주는 소중한 비유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브(Reinhold Niebuhr)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문제를 놓고 말하기를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생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인격을 격하시키고 학대하며, 한숨으로 인생 무상을 읊조린다면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거나 낙심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무능하고 필요 없는 존재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새로운 가치를 확실하게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 스스로 인생이 무엇이냐하는 문제를 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죽을때까지 일생을 두고 풀어나가야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세상을 떠나가기불과 몇 시간 전에야 철들은 이야기 한 마디를 하고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기야 그때라도 알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인생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떠나는 불행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계관은 곧 인생관을 말하는 것이며, 그 인생관은곧 내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결정해 주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몹시도 바쁩니다. 그 때문에 뛰면서 생각하고 뛰고 나서 생각한다고도 합니다. 그러자니 제대로 생각이 될 리가 있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 먼저 오래 오래 깊이 생각한 다음에 뛰어도 만족한 결과를 얻기란 쉬운 것이 아닌데 뛰면서 생각하고, 뛰고 나서 생각하는 처지에서 있으니, 후회하는 생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생을 목적이나 방향도 없이 그저 무엇엔가 쫓겨가고 끌려가듯이 산다는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할때 대체로 세가지의 법주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 존재를 너무 높게 평가한 나머지 인간을 신(神)처럼 생각하는 견해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은 하나님에 대한 존재 개념과 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흔히 말하는 초인적 상태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능력을 과대 평가하며 초인적 만능의 존재라도 되듯이 생각하는 것인데, 이는 실로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은 결코 만능의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이 안다며 떠벌리는 그 지식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뉴톤이 말한 것처럼 인간이 안다는 지식이란 마치 저 태평양 바닷물을 조개껍질로 퍼서 모래 위에 붓는 것과 같은 정도로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이나 능력, 심지어는 자신의 인격까지를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다음 두 번째는, 전자에 비하여 인간을 너무 격하시켜 한갓 동물로 보는 견해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저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의 속된 동물로 생각하며 그리고 낳다가는 죽는 초라한 인간이 아니냐는 것인데 이렇게만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견해입니다.
이제 세 번째는, 인간을 신과 동물과의 사이를 오르내리는 존재로 생각하여, 동물의 세계에서 신의 세계에로 향상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래서는 소위 문명인과 야만인을 구별함에 있어서도 야만인은 동물적인 것으로, 그리고 문명인은 보다 신적인 것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사고 속에도 나는 보다 나은 존재이고, 믿지 않는 저들은 세속적인 사람들로 저만큼 아래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기가 쉽습니다만 은 그것도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하나의질그릇, 곧 흙덩이 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이냐? 너는 흙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본래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창세기에서 가르쳐 주는 진리대로 인간은 흙에서 나서흙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많은 돈을 들여 무덤을 장식하는 일을 좋게 생각하지않습니다. 아무래도 속은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인데, 그렇게 밖을굉장하게 꾸며 놓는다고 하여 무엇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어떤 때무덤을 이장하는 일이 있어서 예배를 인도하러 가서 보면, 가난한 사람의무덤은 파 보면 깨끗이 썩어서 몇 개의 뼈를 남기고는 벌써 흙이 다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두꺼운 관으로 굉장한 치장을 한 부잣집의 무덤을 파고보면, 아직도 시신이 썩지 않고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매우 흉하고 불쾌한 기분을 갖게 합니다.
그러므로 관을 크게 하고 무덤을 별나게 꾸미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시신은 빨리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기 좋도록 해야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잘 꾸며 놓은들 1, 2년, 10년 100년, 200년이 지라면 누가 돌아 볼 것입니까? 그리고 돌아본들 또 무엇을 하겠습니까? 모두 다 흙이 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으니 흙으로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흙입니다. 흙이 아니라며 우긴다고 하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의 흙덩이 됨을 두고 우리 나라 사람과 서양 사람이 세수와 목욕을 하는 방법을 비교해 보면, 매우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과 같이 생활을 하면서 보면 저들이 하는 세수와 목욕은 매우 간단합니다. 세수를 한다는 것은 그저 얼굴에 물만 끼얹을 정도로 한 두 번 손이 오간 다음 수건으로 탁탁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욕을 하는 것을 보아도 가볍게 비누칠을 하여 샤워를 하고 맙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밖에 안 하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피부가 약해서 거친 타월로 문지르거나 하게 되면, 피부에 상처가 나기 때문에 그렇게 가볍게 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화 장면에서 보는 그것이 사실 그대로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비하여 우리의 습관은 어떻습니까? 물을 어떻게 쓰는 것은 두고라도 되도록 억센 타월로 박박 밀어대는 것은 한국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그것도 자그마치 2시간이 넘도록 그러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밀어댄다고 하여 무슨 수가 나는 것도 아니고, 알고 보면 사실은 가죽을 벗기는 일인데 말입니다.
만약 매일 그러고 있다면 며칠이 못가서 상처가 나고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와 살은 사촌 간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게 그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밀어내기라도하면 예쁜 것이 나올 줄로 알고 하는 짓이지만 사실은 점점 더 피부만 거칠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몸은 흙입니다. 따라서 때란 이미 우리 몸에서 떨어져나가는 흙덩어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도록 씻지 못해 몸에 때가 끼이고 나면 색깔도 냄새도 흙과 비슷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옷을 화려하게 입고 신경을 쓰는 것을 볼 때이면 "중고품에 새 것을 걸치면 무엇을 하나?"하는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언제나 겉보다는 알맹이가 좋아야 하는 것인데 알맹이가 중고인 터에 겉을 장식한다고 하여 무슨 수가 나는 것이랴는 말입니다.
우리는 분명 흙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겸손히, 깨끗하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는다는 문제에 대하여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인생이기에 준비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좋은 마음으로 "때가 되어서 갑니다"하고 떠날 것이지 어차피 가야할 길을 그렇게 버둥거리며 떠나서는 안될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다음 그 이름을 아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아담이라는 히브리 말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아담'이라는 말은 남성명사입니다. 그런데'아담아'라고 하면 여성명사가 되고 그것이 바로 흙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형용사로 표현된 것이 '에돔'으로 이는 불그스레한 흙색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인 히브리 사람들의 농담끼 섞인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다음 구운 결과 처음 것은 너무 빨리 들어내어 하얗게 된 것인데 그것이 백인이며, 두 번째 것은 너무 시간을 지나쳐서 새까맣게 타게된 것으로 그것이 흑인이라는 것이며, 그리고 알맞게 노리끼리하게 잘 구워진 것이 바로 황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황인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우월감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아무튼 에돔이라는 말은 아담이라는 말이 가르쳐 주듯이 흙색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성서적으로 보면 흙색이 역시 본래의 색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왜 오늘 본문에서는 사람을 가리켜 금그릇이나 은그릇이 아닌 질그릇이라고 하였는가 할 때 그것은 흙덩어리라는 뜻에서인 것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져 흙으로 돌아가는, 그리고 깨어지기가 쉽고 상처가 나기 쉬운 것이 질그릇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3:7에 보면 여자를 가리켜서 보다 약한 그릇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질그릇 주에서도 좀더 약한 질그릇이라는 말이며, 그만큼 몸도 정신도 약한 존재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질그릇이란 약하고 천한 존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질그릇이 보배를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질그릇은 그 자체가 원하는 것을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주인이 원하는 것을 담게되는 것이며, 그 결과 쌀을 담으면 쌀 항아리요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그릇의 가치는 질그릇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진 내용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내용물이 보화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기에는 매우 역설적인 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편은 흙이라고 하는 반면에 한편으로는 보화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고대 사회에 있어서는 오늘날과 같은 은행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보화가 있는 경우에는 질그릇에 담아서 땅 속에 묻어둠으로 금고의 역할을 하게 하였습니다. 만약 이렇게 묻어 둔 채 주인이 죽어버리기라 도하는 날에는 임자 없는 보화가 되어버리기도 하고 누군가가 발견하는 날에는 그야말로 크나큰 횡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밭에 감추인 보화에 대한 비유가 바로 이런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 13:44)
이와 같이 보화를 간직한다는 것은 예나 오늘이나 문제가 많은 것인가 봅니다. 요즈음도 보면, 보화를 가진 사람들은 둘 곳이 마땅치 않아 여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자칫 그것 때문에 생명까지 위협을 당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서양사람들은 이러한 귀중품들을 은행에다 자기 서랍을 만들어 보관해 놓고 필요에 따라 꺼내 쓰고는 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미국에서 은행에 갔다가보니까 한 할머니가 카-드를 내어놓고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꼭 한약방의 약장 같은 서랍을 열쇠로 연 다음 그 안에 들어 있던 다이아몬드며 다른 보석들을 한참동안 만지고 들여다보더니 도로 넣어 두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제가 차라리 백화점에 가서 구경하는 것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먹을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 나라에도 이런 제도가 있어서 활용하는 분들이 더러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득한 옛날에는 보화를 질그릇에 담아서 보관을 했던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다. 여기에 하나의 질그릇이 있습니다. 이 질그릇은 값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보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굉장한 값어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담겨진 보화 때문에 이 질그릇이 값어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값은 보화가 만들고 거기서 평가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조심할 것은 질그릇은 어디까지나 질그릇일 뿐 보화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보화에 속했다고 질그릇이 보화인양 착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화에 의한 자기 평가를 솔직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그 속에 보화가 있는 동안은 값어치가 있는 것이므로 자기 자랑을 겸손하게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속에 보화가 없는 빈 질그릇은 아무런 값어치도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보화란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말합니다. 인간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므로 인간에게 값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혼이 있어서 살아있는 동안 예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한 것입니다. 아무리 양귀비가 아름다웠다 하더라도 죽은 양귀비가 살아있는 추녀만 하겠으며, 시들어 죽는 꽃이 살아 있는 한 송이의 들꽃보다 어찌 아름다울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생명만이 아름다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이 질그릇이라는 것은 값이 없는 것이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인 영혼, 곧 보화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매우 비싼 값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질그릇 때문에 보화가 보화 되는 것이 아니라, 보화 때문에 질그릇의 값이 나간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눈에는 그 속에 든 보화는 잘 보이지 않고 질그릇만 보이는 것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보화가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질그릇에 보화를 담아서는 저만큼 방 한 구석에 두었다고 할 때, 그 속에 보화가 담겨진 것을 알고 있는 주인은 멀리서 그 질그릇을 볼 때마다 마음이 흐뭇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그 질그릇을 보면서 하필이면 저렇게 못생긴 질그릇을 방한구석에 갖다 놓았느냐며 의아해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나를 평가하거나, 내가 남을 평가하거나 간에 평가의 기준은 언제나 그 속에 있는 보화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18년 동안이나 귀신이 들려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고 천대받는 여인을 보이자마자 그를 고쳐주시며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눅 13:10-17) 자그마치 18년을 미치광이로 그러고 다닌 여인이라면 그게 세수를 제대로 하였겠습니까? 옷을 제대로 입었겠습니까? 상상을 해 보면 실로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보시자 마자 아브라함의 딸이라며 매우 소중한 축복의 신분을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질그릇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 여인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그 속에 보화가 있으므로 질그릇도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비록 금이 가고 깨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보화만 담겨져 있다면, 그 질그릇은 값비싼 그릇이 되고 자랑할 만한 그릇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심하고 실존적으로 이해할 것은 그럼에도 질그릇은 질그릇이요, 보화는 보화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보화로 인해 값나가는 그릇이 되었다고 하여 질그릇이 보화가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질그릇인가 할 때 오늘 본문은 말하기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릇이라면 금 그릇도 좋고 은그릇도 좋은 것인데 하필이면 질그릇인 이유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게 하기 위하여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병들고 시들며 이렇게 약하고 비천합니까? 그것은 바로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질그릇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그릇이기 때문에 질그릇의 가치는 인정하지 않고 보화만은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질그릇과 같습니다. 나는 죄인이요 약하고 천하며, 넘어지고 깨어짐이 여전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의롭다함을 얻은 죄인이며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나의 나됨을 시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입버릇처럼 강조하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산 존재인 만큼 그 소중함은 비길 데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본문 8절에서 보다 역설적인 이야기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질그릇이라는 비유에 연결하여 그 의미상의 사설을 엮어보면 "천대를 받아도 부끄럽지 않고, 깨어져도 아깝지 않으며 그 누가 멸시를 하더라도 조금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속에 보화가 담겨져 있는데 질그릇을 보고 시비를 하고 흉을 본들 무엇이 문제냐는 말입니다.
제가 언젠가 한번 미국 뉴욕에서 은행장 부인과 함께 파티에 참석했던 일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서양 사람들이 파티란 음식은 시원찮아도 계속 재미있는 말을 하여 분위기를 즐겁게 끌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낯선 파티인데다 은행장 대신 임시로 처음 만난 부인과 동행을 한 처지라 별로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는 그저 이런 저런 간단한 말들이 오고 가는 중에 가만히 보니, 그 부인이 눈에 띄게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기에 제가 "사모님, 그 진주 목걸이가 참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사모님께 잘 어울리며 오늘 분위기에도 잘 맞는 것 같습니다."라며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 정말 그러느냐?"며 한참 동안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제가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그것 가짜입니다."하고 한 마디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당신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하면서 사실은 자기 남편이 자기 생일에 4천불 짜리 진주 목걸이를 사주었는데 그것은 너무도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집에서 거울을 보면서 해보고는 풀어놓고 똑 같은 가짜를 하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그 부인이 은행장 부인이 아니었더라면 그 진주목걸이가 가짜라는 말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부인의 말처럼 적어도 그 정도가 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여도 그 부인은 절대로 마음 상하거나 열등 의식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진짜 목걸이가 없는 분이라면 제가 한 말이 마음을 상하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짜 목걸이가 있는 분이기 때문에 가짜 목걸이를 하고도 기분이 좋고, 심지어 한 남자로부터 당신의 목걸이가 가짜라는 말을 듣고도 까딱없이 그저 빙그레 웃고 마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눈뜬 사람을 보고는 장님이라고 하여도 화를 내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장님을 보고 장님이라고 하면 화를 냅니다. 또한 유식한 사람을 보고 "이 무식한 사람아"한다고 하여 그는 까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를 정도의 무식한 사람에게 무식하다는 말을 했다가는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싸우자고 대들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화를 내고 분노하며, 열등 의식을 가지거나 비굴하고 약해지는 것은 나타난 바의 그것이 전부이고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예를 들어 은행에 몇 천만원이고 예금이 되어 있는 사람은 몇 천원짜리 싸구려 옷을 입고 다녀도 상관이 없고, 남들이 "저런 것을 입고 다니느냐?"며 핀잔을 주더라도 "나도 돈 있다네!"하고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없는 돈 빚내어서 모처럼 한번 해 입은 옷을 누가 비판을 하면 그것은 마음이 상하기 마련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시원치 않은 사람이 외적인 문제에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흔히들 자동차가 좋으니 나쁘니, 집이 크니 작으니 합니다 만은 그것이 무엇 그리 중요한 것입니까? 원체 밑천이 든든한 사람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여러분! 문제는 우리의 보화입니다. 나만이 아는 보화! 이 보화를 간직한 이상 교만하지 않는 자랑과 높은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질그릇이 잘못 구워지고, 깨어지고 금이가 땜질을 했다하더라도 보화만 그래도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망하는 것도, 깨어지는 것도, 멸시를 당하는 것도 질그릇 뿐 보화는 어떤 경우에도 여전히 보화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든든합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보면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죽음을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하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의 생명! 그 소중한 생명이 우리의 몸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무슨 말이고 다른 이야기가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즉 깨어짐을 당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오히려 깨어지는 것이 좋은 것임을 고린도후서 5:1의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는 말씀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있는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이라는 것을 오늘 비유에 비추어 보면 질그릇이 깨어지면 보화가 드러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어는 순간 이 질그릇이 요단강 가에 가서 깨어지게 될 때 이 보화가 찬란하게 빛나게 될 것을 내다보며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앞서 4장 16절부터의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질그릇은 잠깐이요, 보화는 영원함이니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담겨진 보배로 인해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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