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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1,910편

원하노니 깨끗하여라(마가복음 1장 40~45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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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노니 깨끗하여라(마가복음 14045)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그러나 그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얼마나 부드럽고 귀한 음성인지 모릅니다. 오늘의 말씀은 한 문둥병 환자가 예수님을 만나 깨끗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아시다시피 문둥병이라고 하면 몹시 비참한 병입니다. 오래 전에 저는 한국 구라회(救癩會) 회장직을 맡아 일해본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 구라회라고 해서 문둥병 환자들만 특별히 돕기 위해 만들어진 선교단체입니다. 그때에 저는 현장 방문도 하고, 보고를 받기도 하면서 문둥병 환자의 실태를 가까이 알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문둥병을 '저주받은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의식중에도 그렇게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새는 반드시 그렇게만은 생각하지 말라고들 합니다. 단순한 피부병이다, 굳이 따로 수용할 것도 없고 병원을 따로 세울 필요도 없다, 일반 병원의 특수피부과 정도에서 취급하면 된다, 이렇게 좋게들 말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선입견이 남아 있어서 좀처럼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도무지 함께 하지 못합니다. 격리하자고만 합니다. 심지어는 병이 다 나은 사람, 문둥병자가 낳은 자녀까지도 받아주지 않습니다. 문둥병자의 자녀는 문둥병자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기피하기 때문에 저들이 큰 괴로움을 당하고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다 나은 사람도 일반사회에 섞여 살기가 어려운 형편인 것을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십니다. 여기에 우리 기독교인들의 특별한 사랑이 함께 해야 될 줄로 압니다.

더구나 이천 년 전의 이스라엘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영락없이 저주받은 병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문둥병을 치료받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아예 치료 방법이 없으므로 손쓸 수가 없습니다. 한번 걸리면D똃똕TXT呪陋痼Î 평생을 마치는 것입니다. 특히나 중동지방은 사막이라 덥고 건조한 기후와 그밖의 여러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문둥병 환자가 유달리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둥병'이라 하면 하나의 죽음의 시작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한번 걸렸다 하면 그 때부터는 거의 죽은 사람이 되어 남은 생을 살아야 합니다.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차제에 문둥병, 문둥병 환자가 얼마나 비참한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병은 악마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이다. 저주받아서 하나님의 은총 밖으로 쫓겨난 것이다"라고 믿었습니다. 그 영혼이 병들어서, 완전히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그 내적인 병이 겉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문둥병 환자를 볼 때에 불쌍히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더럽게 여기는 마음이 됩니다. 부정하게 여겨서 만나주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는 마음 착한 사람이 다가가려해도 저는 피해야 됩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보면 '부정하다'라는 일컬음을 받습니다. 부정하므로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며 멀리 피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들은 전적으로 단절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 가정에서도 쫓겨납니다. 어쩔 수 없이 들판이나 은밀한 굴속에서 방황하며 살아갑니다. 동네에 함부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따금 동네사람들이 불쌍히 여기고 음식을 가져다가 굴속으로 던져줍니다. 깊은 구덩이에 들어가 있으면 음식을 줄에 달아매어 내려주기도 합니다. 그런 음식물이나 조금씩 얻어먹으며 간신히 살아갈 뿐입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누가 이렇게 라도 해주지 않으면 그대로 굶어죽는 것입니다. 완전히 버려진 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사람들과 만날 수도 없으며 한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소외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부모 자녀 사이가 단절된 생, 그 가정으로부터 소외된 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개념으로는 하나님을 거역한 죄로 문둥병에 걸린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그 예가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뚜렷한 예를 민수기 1210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립니다. 실수는 모세가 저지른 것 같습니다. 구스 여자를 소실로 삼았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고 봅니다마는 아무튼 구스 여자를 취했을 때에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를 비난합니다. 누이 미리암은 한때 모세를 업어 키웠던 사람입니다.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강을 따라 떠내려가던 어린 모세가 바로의 딸에게 건지어지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았고, 그 친모를 유모로 알선하는 일까지 해낸 장한 누이입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은 모세를 훌륭한 지도자로 우러러보아도 그 누이는 그를 어디까지나 철없는 동생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미리암은 별생각 없이 동생을 비난합니다. 함부로 모세를 비난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그럴 수가 있느냐! 이방 여자, 구스 여자를 데려가다 소실로 삼다니 말도 안 된다!" 마음대로, 생각나는 대로 마구 비난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비난을 다 견디어 냈습니다. 민수기 12장은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 편에 서십니다. 그리고 미리암을 치십니다. 내 종 모세를 네가 왜 건드리느냐, 내 종 모세를 칠 것이면 내가 칠 것인데 네가 왜 함부로 나서느냐 하심입니다. 그대로 내려쳐서 미리암이 문둥병 환자가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님의 사람을 거역한 사람이 문둥병에 걸리는 것이라고 이스라엘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저주받아서 생기는 병이라고들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둥병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병입니다. 문둥병 환자에 대한 책을 읽어보니 그 60퍼센트가 정신병이라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참혹한 병중에 살면서 어떻게 정신이 온전하겠습니까? 어느 책에 보니 그 과정을 자세히 기록해놓았습니다.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문둥병 환자가 되면 그 부위가 희어집니다. 성경에서도 "눈과 같더라(12 : 10)"라고 합니다. 화장한 것처럼 희어진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쁘게 보일는지도 모릅니다. 희어진 다음에는 그 부위가 반짝반짝하면서 빛이 납니다. 이 과정이 지나면 눈썹이 빠지고 머리카락이 빠집니다. 그 다음에는 눈에서 진물이 나고 손톱이 빠집니다. 코가 문드러져 없어집니다. 이가 빠집니다. 그리고 손가락이 빠지고 손마디가 빠집니다. 전신의 마디마디가 다 썩어 문드러집니다. 서서히 서서히 죽어갑니다. 온몸이 썩어져서 죽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런 과정에서도 끝까지 아픈 곳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부분이든지 아프지가 않습니다. 손마디가 다 끊겨나가는데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 살이 썩으니 더럽고 냄새가 납니다. 문둥병 환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헝겊으로 손을 감고 있는 모습입니다. 손마디가 다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좀더 심해지면 얼굴도 가립니다. 눈도 멀어지고 코도 없어집니다. 상상하기조차 끔찍스런 몰골입니다. 어찌 정신이 온전하겠습니까?

아래층에서는 문둥병 환자들을 치료하고 위층에서는 목사님이 그들과 함께 상담하고 기도하는 곳이 있습니다. 가보면 치료를 받고 나서 목사님을 대하는 환자가 무척이나 짓궂습니다. 헝겊을 풀어헤쳐 손마디가 빠져나간 손을 턱하니 들이댑니다. 그 썩은 손위에 목사님 손을 얹고 기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이 그것을 확 잡으면 살점이 마구 떨어져나갑니다. 그렇게 잡고 기도를 하면 이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잘못을 빕니다. 용서해주세요, 제가 이렇게 못된 놈입니다 하며 회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졌다고 해서 문둥병이 옮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섬찍할 뿐입니다. 그러나, '꼭 여기다 손을 대고 기도해주세요'하는 그 심보가 무엇입니까?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닙니다. 어떻게 정상이겠습니까? 그 마음부터 고치지 않으면 병이 다시 도집니다. 아무리 좋은 약을 많이 먹어도 그 정신이 평온해지지 않으면 절대로 병이 낫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둥병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문둥병자는 성경 상으로는 첫 케이스입니다. 문둥병자로서는 처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와 치료받은 환자입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 관한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이 문둥병자는 동구 밖 어느 굴속에서 지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 가버나움에서 되어진 사건을 알 리가 없습니다. 앞서 공부해온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많은 환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눈먼 사람, 손 마른 사람, 절름발이, 중풍병 환자 등을 고쳐주셨습니다. 고침을 받아 기뻐하는 사람들 때문에 온 동네가 축제 분위기지만 이 아름답고 귀한 소식을 누가 저 사람에게 전할 것입니까?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기서 천하없는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저 동구 밖에 버려진 그 사람에게 누군가가 전해주지 않는 한 그 사람은 절대로 그 일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서 진실로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면 나의 사랑하는 사람, 내가 기억하는 사람, 내가 싫어하는 사람 할 것 없이 찾아가서 친절하게, 내가 들은 말씀이 이렇고, 내가 체험한 것이 이렇고, 내가 요즘 기쁘게 사는 이유가 이렇다 하고 반드시 전해야 됩니다. 이 전하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문제는 이 소식을 전해들은 문둥병자입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거짓말하지 마라, 헛소리다, 어느 세상에 문둥이가 낫는다더냐, 글쎄, 예수라는 사람이 감기는 고쳤는지 모르겠다마는 내 병은 어림없다-이렇게 부정해버렸다면 이 사람은 끝내 은혜를 입을 수 없었습니다. 온 동네가 예수님 앞에 모여들어도 이 사람은 끝내 은혜를 입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온 동네가 예수님 앞에 모여들어도 이 사람은 소식을 들은 바가 없기 때문에 올 수가 없고, 또 동네에 들어와서도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 속에 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이름 없는 사람이 있어서 많은 환자가 병 고침 받는 것을 보고는, 문둥병자도 고칠 수 있을는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대로 달려가서 이 소식을 소상하게 전해주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 병도 나았고 저 사람 병도 나았다, 못 고치는 병이 없더라, 희한한 일이다, 메시야가 오셨다라고 전해준 이름 없는 한 전도자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전도를 받고서 이 사람은 믿음을 보았습니다. 듣는다는 것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이 소식을 듣는 동안 이 사람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있는 사례를 내게 있는 사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생겼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인 진리를 주관적인 진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객관적인 사건 속에서 주관적인 문제를 해결합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에 나타난 계시적인 사건을 통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봅니다. 그런데 잘 보고 나서 생각하기를 '그 이야기는 그 이야기고, 나는 나다' 해버립니다. 때때로 교인들이 답답한 일을 가지고 제게 상담하러 옵니다. 억울한 것을 주욱 하소연합니다. 다 듣고 나서 저는 성경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성경에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이 말씀을 받아 이렇게도 참고 저렇게도 견딥시다-열심히 이야기해보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거야 그때 이야기지요. 지금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거야 2천 년 전 이야기지요, 그거야 그 사람의 이야기지요. 이렇게 나옵니다. "좋습니다. 옛날 이야기는 그렇다 칩시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은 있습니다. 어느 교인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 그 사람은 믿음이 좋으니까 그렇죠. 저는 안돼요." 전부가 자기는 예외라고 합니다. 이런 답답한 노릇이 어디 있습니까? 이럴 때에 가장 답답한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눈을 떴으면 내 눈도 뜬 것 입니다. 다른 사람이 구원을 받았으면 나도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같은 천한 여자가 구원을 받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만난 증인이 되었다고 한다면, 나도 나의 과거가 어떻든 간에 구원받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것이 남의 일입니까? 막달라 마리아의 일도 바로 나의 일입니다. 성경에 있는 소위 inspired case work, 영감된 사례들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그 사례 안에서 나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얻어야 됩니다. 물론 아직까지 그 사람이 들은 이야기 중에 문둥병을 치료받았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병은 다 나아도 문둥병만은 낫지 않는다. 이런 병 저런 병 다 고쳤어도 문둥병 고쳤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끝난 것입니다. 딱 맞아떨어지는 사례가 있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아직 다른 사람이 병 고침 받는 것을 목격한 일이 없습니다. 누군가를 통해서 소문을 들었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복음을 들었을 때에 마이 케이스(my case) 역시, 나의 사례에서도, 내 경우에도, 나에게 있는 이 더러운 문둥병도 고침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믿음이 소중한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예수님 앞에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40)"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82절에서는 같은 본문인데도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라고 기록합니다. 많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사실 들어올 수 없는 자리에 들어와서 엎드려 경배하고 그리고 간청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믿음입니다.

그 간구 내용이 다른 사람들과는 약간 다릅니다. 자기 자신이 저주받았다는 의식으로 아예 꽉 차 있습니다. 자기가 저주받은 병을 앓고 있다는 의식이 분명합니다. "주여, 내 병을 고쳐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 눈을 뜨게 해주세요"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감히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는 참으로 경건한 사람이며 온유 겸손한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신앙고백 합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하나님의 능력도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도 믿었습니다. 다만 내가 그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인가 할 때에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령 육체적인 병을 고치는 능력이 그에게 있다 하더라도 내 영혼이 워낙에 병들었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인인데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그는 이렇게 주저하고 있습니다. "원하시면," 다시 말해서 "주님의 뜻이면"이라고 말합니다. 의인의 간구함에 능력이 있습니다. 의인의 소원은 곧 능력으로 발동합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제 병은 나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그러한 자격도 정결함도, 의도 없다고 그는 깨끗하게 고백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는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대로 처분해주세요. 당신이 원하신다면,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면 능력은 충분합니다." 이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할 것 같은데……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에 대한 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원하신다면-대단한 신앙고백입니다.

계속하여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라고 합니다. 민망히 여긴다는 말이 퍽 재미있는 말이라 한번 해석해봅니다. 이것은 '스프랑크니스데이스'라는 말인데 그 어원은 '스프랑크니조마이'라는 동사입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본래 '스프랑크논'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스프랑크논, 이 단어는 조금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창자'라는 뜻입니다.

문자 그대로 창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민망히 여긴다'는 곧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다' 다시 말하면 애끊는다는 말이 됩니다. 단장(斷腸)의 슬픔입니다. 배가 아플 정도로 그를 동정한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간구 하는 순간 예수님께서 배가 아팠다는 말입니다. 문자 그대로 말해서 단장의 아픔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민망히 여기사'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함께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몇 방울의 값싼 동정의 눈물은 흘릴 수 있습니다. ', 불쌍하다'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아픔을 함께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간혹 어떤 사람과 대화하는 중에 진정으로 깊이 동정하면서 그 이야기를 듣느라면 어느 사이에 그 사람의 아픔이 내 몸에 전달되는 것을 느낍니다. 한 시간도 채 못되는 짧은 대화라도 그 사람이 돌아간 다음에는 얼마나 피곤한지 모릅니다. 몸과 마음이 함께 되느라 무척 고단해집니다. 이것이 공감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특별한 사연이 없다 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의 아픔이 내 몸, 내 마음에 전달되고 내 창자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공감대로 이루어지는 통증, '민망히 여기사'-우리가 그 누구를 이토록 불쌍히 여겨보았겠습니까? 대개는 건성입니다. 그 아픔, 그 괴로움을 나도 똑같이 느끼지는 못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남의 아픔에 정신적인 아픔을 느끼면서 마침내는 내 육신에까지도 전달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동감, 공감을 이루어내는 심령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민망히 여기사" 그리고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율법을 어기는 행동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정결한 것을 좋아합니다. 아무 것에나 함부로 손을 대면 안됩니다. 더구나 문둥병자에게는 절대로 손대면 안됩니다. 물이 귀한 시절이라 잘 씻을 수 없는 탓도 있지만 한번 문둥병자와 접촉하면 그 다음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실 문둥병자를 만지면 그 가죽이 내 몸에 달라붙습니다. 그러니 더러울 수 밖에요. 아무튼 당시의 율법으로 금하였습니다. "문둥병자를 가까이하지 마라, 문둥병자를 만지지 마라"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문둥병자인 줄 모르고 내가 가까이 가면 문둥병자 쪽에서 나를 보고 가까이 오지 말라고 경고해야 됩니다. '나는 부정(不淨)한 사람이니 가까이 오면 안 된다'라고 해야 됩니다. 이것이 저들의 예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율법을 어기신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을 어긴 것으로 말미암아 혹 불이익이 생길 수 있습니다. 생각지 않았던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더럽다고 탓할 수도 있고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탓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불이익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이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불쌍히 여김으로 받는 비난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이라도 여러분이 특별히 불쌍한 사람을 찾아본다고 해보십시오. 아마 희한한 비난이 따를 것입니다. 이를테면 "돈도 없는 사람이 남 돕는다고 설치고 있네" "저 혼자 의로운 척하고 있네"와 같은 비난입니다. 선한 일을 있는 그대로 평가해주지를 않습니다. 그까짓 몇 푼 돈주어서 뭘 하나, 그 정도로 뭐가 될까봐-별소리를 다 듣습니다. 이와 같은 어려움이 흔하게 따릅니다. 말도 많고 손해도 많습니다. 이런저런 복잡한 일이 많습니다. 생각처럼 단순하게 봐주지 않습니다. 선한 일 한다고 좋게만 보아주는 세상이 아닙니다. 문둥병 환자를 만졌다, 손을 댔다고 하는 사건 때문에 예수님께는 그 뒤에 따라오는 문제가 많습니다. 아마도 바리새인들이 그 장면을 보았더라면 난리라도 났다는 듯이 법석을 떨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을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 마음으로부터 깊은 동정이 우러나오면서 불쌍히 여기는 순간에 손을 대셨습니다.

여기서, 손댔다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정한 것을 만지셨지만 그 자신은 부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결함으로 부정을 이기셨습니다. 이 부정한 것을 만졌다는 말의 뜻이 단순히 손을 댔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헤프사토'라고 하는 이 말의 헬라 원문을 보면 그 뜻이 퍽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꽉 쥐었다, 어루만졌다, 붙잡았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 문자대로 해석해보면 상처를 어루만졌다, 아픈 곳을 고루고루 만져주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말씀만으로도 능히 고치실 수 있습니다. 손대지 않으시고도 해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만짐, 접촉을 통해서 고독과 소외의 감정까지 치료해주셨던 것입니다. 말씀만으로도 몸을 고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마음을 고치기 위해서는 만지셔야 했습니다.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이 사람의 마음, 이 사람의 소외감을 어루만지기 위해서는 손을 대야만 했습니다. 육체적인 병을 고치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의 소외감, 고독한 마음, 쓰라린 마음, 버려진 마음을 먼저 치료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종종 봅니다. 누구라고 밝힐 수 없습니다마는 잘 알려져 있는 한 목사님이 한번은 간염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제법 오랫동안 병원에 있다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에 사표를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생긴 것입니다. 제가 가르친 제자이기도한 그 목사님이 저를 만나고 싶어합니다. "한번 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며 방문을 청합니다. 그래서 밤중에 차를 타고 찾아갔습니다. 가보았더니 그 간염이 전염성이 좀 있다고 하여 병실을 깨끗이 치워놓았습니다. 자기는 침대 한쪽에 앉고 저보고는 멀찍이 문 옆에 놓아둔 의자에 앉으랍니다. "목사님, 거기 앉으셔서 말씀하세요." "왜 쓸데없는 짓을 하나, 이럴 필요 없네." 저는 의자를 치우고 일부러 나란하게 침대에 턱 걸터앉았습니다. "목사님, 이러시면 안됩니다." 질겁을 하며 말립니다.

"괜찮아. 같이 죽지 뭐"라고 했더니 어찌나 좋아하던지요. 나란히 앉았다고 해서 꼭 간염이 옮는 것은 아니지마는 사실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문둥병 환자는 손을 대고 기도해도 되고 전염병 환자는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다미안 신부는 몰로카이(Molokai) 섬에 유배된 나병환자들의 참상을 보고 크게 마음이 움직여 자원하여 그곳에 들어가 나병환자들과 일생을 함께 한 위대한 선교사입니다. 처음에는 온 정성을 다해 봉사하는데도 나병환자들이 도무지 받아주지를 않았습니다. "당신은 감정이 사치스러운 사람이오. 우리 같은 불쌍한 사람들과 지내는 것이 당신 같은 정상인으로서는 오히려 향락이 아니겠소?" 하며 진실 된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다미안 신부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제게 문둥병을 주십시오." 마침내 그는 문둥병 환자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야 문둥병 환자들이 그를 친하게 대해주었다고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이 전기(傳記)를 읽고 크게 감격했었습니다. 이처럼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어루만지는 순간은 곧 정신을 치료하는 순간이요 마음을 치료하는 순간이요 고독한 심령을 치료하시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나서 육체를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고는 절대로 만질 수 없는 사람, 그 누구도 접근을 해주지 않는 사람을 만져야 됩니다. 요새 보면 안수한다느니 안찰한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마는, 제가 분명히 하나의 원칙을 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고는 절대로 만질 수 없는 경우에 한하여 만져야만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는 삼가해야 됩니다. 예를 들면 감기 정도에 걸렸는데 가서 만지는 것, 아무 의미 없습니다. 게다가 묘령의 여자를 만지는 것은 죄가 됩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멀쩡한 사람, 건강한 사람 만지고 돌아가는 것,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고는 손댈 수 없는 경우에만 손을 대야 합니다. 극단적으로 딱 잘라 말합니다. 문둥병 환자라면 얼마든지 만지십시오.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고 누구나 보면 질겁을 하고 도망가는 병이라 하거든 찾아가서 만지십시오.

우리 한국에 교회가 이토록 크게 성장하고 부흥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초기 한국 교회가 시작될 때에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맨 처음에 의사가 들어왔습니다. 선교사들이 의사였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호열자(虎列刺 : 콜레라)로 죽어갔습니다. 치료할 방법이 없으니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병들어 죽은 사람이 생기면 그 집에다 불을 질러놓고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장례해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시체 만지면 병 옮는다고 해서 말입니다. 너도나도 도망갈 때에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만이 그 시체를 끌어다가 씻어주고 잘 매장해 주었습니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시체를, 전염병 환자들의 시체를, 기독교인들만이 거두어주었습니다. 이를 보고 많은 지성인들과 생각 있는 분들이 '이것이 야소교구나'하고 감탄했더라는 것입니다. 기록에 보면 동학하던 사람들까지도 마음을 돌려서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이 있어서 한국의 기독교가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손쉬운 일만 하려고 들지 마십시오. 신문기자 데리고 다니면서 일할 생각일랑 하지 마십시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고는 도저히 대할 수 없는 사람을 대하고,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할 때에,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으로만 할 수 있을 때에, 거기에 능력과 기적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만지실 때에 그는 벌써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 과정을 보십시오.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이 세상에 자기 만져주는 사람이 어디 있었습니까? 그 만지는 과정에서 벌써 마음이 다 녹았습니다. 아마도 눈물을 흘렸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믿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고마운 마음, 사랑하는 마음, 감격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 마음이 치료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매우 조용하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당신이 원하시면 내가 깨끗해질 것입니다 라고 아뢸 때에 예수님은 만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따뜻한 대화입니까? 그리하여 이 사람은 깨끗함을 받게 됩니다. 말씀으로, 말씀의 능력으로 이 중환자가 치유되는 순간입니다.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입니다. '깨끗함을 받으라' 할 때에 전혀 가감 없이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 깨끗함을 받으라, 아멘-여기에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주저함도 없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생각도 없습니다.

자기가 저주받았던 사람이라는 생각도 없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total acceptance,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에 그는 문둥병이라고 하는 무서운 병으로부터 마침내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그 다음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다짐하십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마가복음에는 '비밀의 복음'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특별히 많습니다. 달리 그러신 게 아닙니다. 소문이 번지면 보나마나 바리새인들이 별소리를 다할 것입니다. 저주받은 사람을 고쳐주었다느니 부정한 문둥병자를 만졌다느니 하며 분분할 것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이 소문이 나면 사방에서 환자들이 있는 대로 다 모여들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오해를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 고치러 오신 의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주시고자 오셨지 육체적인 병을 고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단순히 육체의 병을 고치는 자로 소문나는 것을 예수님은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는데. 그만 이 사람이 잠자코 있지 못했습니다.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소문을 낸 것 같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바람에 예수님은 동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셨고, 오히려 동네 밖으로 사람들이 따라나와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으로 본문 말씀은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한 문둥병 환자가 주님 앞에 나와서 치료받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문둥병 환자와 같은 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인가,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고 계신가, 우리를 어떻게 치료하고 계신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저 문둥병 환자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임을 알고, 이것이 오늘의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으로 새롭게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우리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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