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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농부(누가복음 20:9-19)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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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농부(누가복음 20:9-19)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이 비유의 말씀은 오늘 본문 외에 마태복음 21:3346 과 마가복음 12:612에도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세 복음서에 다 같이 기록된 만큼 보편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본문 말씀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종말적으로 주어진 예수님의 최종 통첩적인 의미가 있는 종말적 메시지입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려는 사람들을 앞에 놓고 정면으로 충돌하는 시간에 주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19절인 마지막 부분에 가서 보면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알기는 알고 그 통분함을 감출 길이 없지만 당장은 어쩌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이 말씀은 분명하게 이스라엘 지도자를 상대로 그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대상이 그런가하면 말씀의 내용은 전 이스라엘 역사를 종합하여 짧은 한 문장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말라기서까지, 나아가서는 신약을 포함한 성경 66권 전체의 통달을 불과 이 몇 마디로 꿰뚫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말씀은 전 성경의 요약이요, 동시에 인류 역사의 요약입니다. 적어도 역사가 하나님 앞에서 진행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틀어 이 몇 마디로 요약해놓은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본문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전 이스라엘 역사를 거론해서 그 역사를 비판하는 말씀인가 하면 온 인류 역사를 한 데 묶어 조명해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영적인 안목에서 다른 입장으로 본다면 한 사람, 한 사람, 나 개개인의 생애를 한 눈에 통찰해 보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생애를 보는 안목과 통찰력을 가지고 이 말씀을 읽는다면 이 말씀이야말로 대단히 두려운 심판에로의 안내이며 자신의 상황이 어느 시점에 이르렀는가를 진단할 수 있는 귀중한 말씀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대하더라도 이 말씀의 뜻을 다시 새롭게 음미하면서 주시는 말씀을 바른 자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비유의 초점은 대체로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외로 여러 가지의 뜻을 한꺼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말씀인가 하면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이며, 온 인류의 이야기인가 하면 선지자들을 이야기하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며 마지막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모든 역사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빠짐 없이 나열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은 어떤 존재냐? 하는 신론이 나와있습니다. 또한 인간 존재란 무엇이며, 그 역사는 어떻게 영위되고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와 그 사명을 말씀하시고 이제 최후의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입장과 상황, 그 결과를 말씀하시며 나아가서는 역사의 최후, 종말론까지 다 설명해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 말씀은 쉽게 기록된 간단한 내용 같으나 언제나 그 속에는 깊고 넓은 진리가 함축되어 우리에게 말씀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본문 말씀을 몇 번이고 거듭해서 읽는다면 분명히 인류의 역사를 환하게 한 눈으로 꿰뚫게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습도 밝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 소개된 이 비유는 2천여 년 전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흔히 있었던 일을 그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교통 수단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 이사를 한다든가 멀리 장사라도 떠나가면 쉽게 왕래를 하지 못하게됩니다. 그래서는 소식을 자주 전하지 못한 채 몇 년이고 있다가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훌쩍 떠났던 사람이 저 곳에서는 벼슬아치가 되기도 하고, 작은 마을에서는 왕이 되기도 하는 그러한 일들이 생기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제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듭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을 빌린다면 산울로 두르고 포도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기까지 하였으니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짐승들과 도둑으로부터 포도원을 지키기 위하여 산울을 두르고 망대를 세웠으며 생산된 포도는 그 자리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포도즙 짜는 틀까지 준비한 훌륭한 포도원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포도주는 유명하여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수입하여 쓰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좋은 포도원을 만들어놓고 이 주인은 다른 나라에 갈 일이 있어서 이것을 세로 맡기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 얼마를 있다가 그 동안 포도도 많이 따고 포도주도 많이 만들어 큰 수확을 올렸을 터이니 이번에는 그 소출의 얼마라도 세로 바치게 해야겠다고 한 종을 보냅니다. 그랬더니 포도원 농부들은 마땅히 내놓아야할 세는 주지 않고 주인 대신 보냄을 받은 종을 때리고 능욕하여 그냥 돌려보냅니다. 도대체 이들이 때리고 능욕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두려운 소문이 나게 해서 다시는 못 오게 되어 관계가 끊어질 것을 계산한 악한 속셈에서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다른 종을 계속하여 보냅니다. 그럴 때마다 이들은 두 번, 세 번 똑같은 방법으로 능욕하여 그저 돌려보내고 맙니다. 이제 주인은 마지막으로 생각하기를 지금까지는 아마도 종들이 가서 그럴터이니 이번에는 최후의 수단으로 내 아들을 보낸다면 아들의 말은 들을지 모른다는 바램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 악한 농부들은 오히려 주인과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주인의 상속자인 하나뿐인 아들이니 이를 죽이면 그 유산의 전부가 자신들의 것이 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어쫓아 죽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이 그렇다면 그 주인이 돌아와서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다 진멸하고 포도원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언어도단의 일입니다. 이것은 한 두 사람에 의한 보통 강도가 아닌 집단 강도요, 악의 농장입니다. 남이 땀 흘려 마련한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버리고도 살아남기를 바라는 이 엄청난 죄와 부조리를 주인은 결코 더는 용납치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당연한 결과는 이 세상 끝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나 보다 직접적으로는 너희가 지금 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바로 이 순간이 그와 같은 순간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내용을 살피며 먼저 포도원을 생각합니다. 여기 본문에서처럼 포도원을 이스라엘에 비유한 것은 구약성경에 많이 있는 표현입니다.

이사야 5:17, 27:16, 예레미야 2:21, 에스겔 15:16 등 그 외에도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포도원은 너무나도 상식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누구나 잘 알 수 있는 비유의 원칙에서 이스라엘을 포도원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씀이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들 말씀의 요점은 하나님이 포도원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을 이스라엘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크게는 하나님이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속에 사람을 지으시어 친히 창조하신 것들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창세기 1:28에 보면 땅을 정복하고 관리하며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일단 우리 인간에게 그 모든 것을 내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참으로 하나님에 버금가는 특권이며 책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창조주이신 하나님, 그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오래 오래 무던히도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잘못하는 일, 악한 행동을 다 아시면서도 두 번, 세 번 계속 종을 보내시고 마지막에는 아들까지 보내시는 하나님의 깊고 아픈 인내를 보게됩니다.

419를 겪으면서 있었던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부정의 흉상과 그 규모는 역사적 심판을 통해 이미 드러난 바이지만 그 주역들 중에는 예수 믿는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죄지을 때 무엇하고 계셨을까? 그 때마다 벼락을 치실 것이지 왜 그냥 내버려 두어 가지고 저들 몇 사람 때문에 이렇게 온 백성이 고생을 하게 만드시는지 모르겠다"면서 마침 그 때 옆에 있던 목사님께 "하나님은 이러한 때에 무엇하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 그 목사님께서는 참으로 지혜로운 대답을 하셨습니다.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생각해봅니다. 지금 당신들이 규탄하고 있는 그 아무개, 아무개 중에 당신의 아들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오?" 하고 되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앞서 질문했던 이가 "그야 아무래도 '죽여야지'라는 말은 못하지요" 하더라는 것입니다. 다시 목사님께서는 "맞습니다. 당신 보기에는 저 사람들이 나쁘고 죽일 놈 같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로 보였던가 봅니다"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참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으심을 알아야하고 그 참으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심판 받기를 바라며 저런 녀석을 왜 그냥 두냐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그가 내 아들, 내 자식이라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철이 없어서 그런다고 하겠지요. 그리고 본래는 그렇지 않은 아이인데 친구 잘못 사귀어 잠깐 실수한 것이라고 철저히 변호하고 나올 것입니다.

여기에서 심판의 깊은 의미를 찾아야합니다. 악하다고 그 때, 그 때 심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도대체 살아남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사랑의 하나님은 길이 길이 참으시는 것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엄청난 죄를 계속 짓고있는 데에도 하나님은 두고두고 참으셨습니다.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참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래도록 많이 참으십니다. 그러나 그 인내에도 끝이 있습니다. 이제 그 아들을 보내고는 마지막입니다. 그 이상 더 참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일찍이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여러 모양, 여러 방법으로 일깨워주며 경고하셨고, 어떤 때는 놀랍고 두려운 사건을 만나기도 하며 멀고 가까운 삶의 현장에서 직접 간접으로 심판의 경종이 사건으로 보여지고 들려지며 가까이 옵니다. 문제는 그런데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정신차릴 만큼 경고하고 참고 또 참으시며 인내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어느 순간에 가서 아들을 보내심으로 그 참으심은 끝이 나고 이제는 진멸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에 그것은 이스라엘의 죄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이들의 죄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 사람들 범죄의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포도원은 영원히 주인의 것입니다. 그런데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착각을 합니다. 그보다도 아예 내 것이라는 집념으로 서슴치 않고 주인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놀랍게도 인간들의 죄의 뿌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창조주를 부인합니다. 하나님의 소유됨을 부정합니다. 이 때문에 자식도 "내 자식, 내 새끼"하며 자기 소유화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낳았다고 내 것으로 생각하는 데에서 문제는 비롯되고 거기에 잘못이 있습니다. 내가 낳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낳는 순간부터 나는 봉사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이 귀한 손님을 맡아 봉사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잘 키워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나에게 있는 재산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내 것처럼 생각하고 끝까지 쥐고 있다가 세상을 떠나면서까지 유산 처리를 못하고 아쉬워하는 답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 할지라도 내 것이라는 보장은 어느 순간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가진 바의 전부가 본래에도 내 것이 아니며 마지막에도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온 것이 없으니 떠날 때에도 가져갈 내 것이 없습니다. 오고 가는 사이에 잠시 내 것처럼 되어있을 뿐입니다. 이로 인해 지금은 나의 것이라는 착각을 일으킵니다마는, 잊지 말아야할 것은 지금이라는 이 순간 자체가 나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제라도 아차 하면 그 모두는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공동 소유하고 나누어 쓰는 것입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 자식, 내 건강, 내 자신마저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이 모두를 관리하도록 위임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관리인으로서의 상당한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성도 있고 양심도 있으며, 지식과 도덕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처럼 상당한 자유와 특전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임시적이요, 어느 부분을 부여받은 것이며, 제한된 자유를 누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모든 존재의 근본이며 본질적 소유주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하나같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라는 의식이 분명하여야 합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강도요, 바로 그 악한 농부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나의 나됨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인식에서부터 출발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나의 나됨이 피조물로서의 존재 정체를 분명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과 나의 피조물됨, 그리고 관리자이며 청지기 됨을 분명히 하여야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되어 내가 주인인 것처럼, 심지어는 내가 우상이 되어 하나님은 저만치 밀쳐놓고 주인 행세를 하려는 거기에 죄의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종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회개할 기회를 거듭 주시는데 그 기회를 계속 놓쳤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를 만홀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악용했습니다. 멀리서 종만 보내고 있으니 이것만 해치우면 되겠구나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회개할 기회를 주실 때에 회개하지 않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인내를 만홀히 여기는 이것이 큰 죄가 됩니다. 이제 더욱 무서운 죄가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자기들의 소유권을 굳히기 위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인 죄입니다.

다시 말하면 법 자체를 고치려하고 진리를 말살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를 말살함으로 문제를 해결코자 합니다.

저 유명한 포이에르바하(Feuerbach) 의 엄청난 말이 있습니다. "교황청에서 교황을 몰아내기 전에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나님을 몰아내어라. 그래야 인간이 자유한다. 내 양심 속에 있는 하나님을 죽여버려라, 그래야 내가 자유인이 된다."이 얼마나 악마의 소리입니까! 참으로 불신앙의 대표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양심을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피곤치는 않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기에 술을 마시고 마약까지 먹으며 온갖 애를 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혹 감추어진 완전 범죄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양심은 그것을 허락치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앞에는 용납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들은 지금 완전 범죄를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아들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아들은 곧 주인의 대표요, 아들을 죽인다는 것은 주인을 죽이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주인에 대한 정면적 도전입니다. 이 때문에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놓치게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인내와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자신들의 욕구를 이룰 수 있는 최후의 수단과 기회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아들이니까 죽이고 상속자이니까 죽이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허락치 않으십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는 죽임을 당하였고 죽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희생,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많은 선지자를 보낸 후 종말적으로 보낸 그리스도 예수를 죽임으로써 마지막 심판의 증거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맥락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시작된 모든 역사와 그 많은 선지자의 기록과 그 모든 사건의 결론으로 예수의 십자가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지막 통첩이요 마지막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한 번 더 복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아들이 왔을 때에만 회개하였더라도 지난날에 저질렀던 그 모든 잘못을 용서받고 구원에 이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선지자를 어떻게 능욕하고 무슨 방법으로 죽이며 거역 하였든지간에 마지막 아들의 말만 들었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에 요한복음 3:36에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통첩, 이 한 가지만 받아들였으면 그 동안의 모든 잘못을 다 묵인하고 저들을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통첩까지 거역하는 저들이기에 거기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역설적으로는 거기에 구원의 길이 동시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거역하는 그 순간이 구원의 순간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쌓이고 쌓인 지난날의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그 순간, 이미 과거의 모든 잘못이 용서된다고 하는 복음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거역하므로 저들은 심판을 받게됩니다.

마지막으로 건축자의 버린 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적인 하나의 중요한 비유입니다. 어떤 건축자들이 쓸모 없다고 버린 돌이 다른 건축자에 의해서 오히려 가장 요긴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는 가루가 되어 흩어질 것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버림받은 예수님이 교회의 머릿돌 됨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떨어지는 자는 죽을 것이로되, 반대로 그 위에 세워지는 자는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반석 위에 세우는 자의 영원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러야할 뿐, 그를 거역하거나 배척함으로 그 돌 위에 떨어져 그로 인하여 심판을 받아야하는 유감된 심령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분명히 무서운 심판의 확정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놀라운 복음이 이 속에 있습니다. 이 마지막 통첩을 마지막 복음의 기회로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면 그들은 과거에 지은 죄에 상관 없이 구원을 받게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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