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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의 복(마:5:1~12)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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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의 복(마:5:1~1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4)

 

이 본문을 공동번역에서 찾아보면,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적 진리는 때때로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는 역설적인 것 같이 보일 때가 많습니다. 어째서 부한 자가 아니고 가난한 자, 기뻐하는 라가 아니고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표현 자체에서 복음적인 의도와 심판적인 하나님의 뜻을 암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차원이 전혀 다른 진리의 성격이 간단한 표현 즉 신학방법론에서 벌써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선(Insight), 즉 천국적인 안목과 영적인 판단력으로 볼 때 이 세상사가 모두 역설적이며 벌써 진리에서 역행하고 있는 것으로 비추어졌다고 보여집니다.

사실로 어째서 웃는 자가 아니고 우는 자며 기뻐하는 자가 아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까? 여기서 깊이 착안해야 할 점은 기쁨이나 행복의 차원과 그 뿌리가 어디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위로"를 받는 그 깊은 근거가 원천적으로 문제된다는 것입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께 뿌리를 두지 못한 기쁨이나 행복은 아무 뜻도 없고 물론 지속성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뜻도 없고 본질적 진리에서 멀리 떠난 기쁨이라면 차라리 슬퍼하는 자, 애통하는 자가 훨씬 복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의 동생이며 초대교회의 일대감독으로 30년을 섬긴 바 있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그같은 뜻을 그대로 이어서 그의 서신인 야고보서 4:9에서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라는 그 뜻은 모든 슬픔 중에서도 가장 강한 고통스러운 슬픔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거나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에게 배신당했을 때, 가슴이 찢어지고 숨이 막히며 온 마음과 온 몸이 떨리며 뼈까지 쑤시며 고통을 느끼는 그 같은 슬픔을 말합니다. 이 같은 슬픔의 장면은 구약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옷을 찢고 재를 무릅쓰고 티끌을 날리며 굵은 베옷을 입고 딩구는" 그 같은 애통을 봅니다. 예레미야는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창세기 37 : 34에 보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고서 야곱이 애통하는 장면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애통하는 모습입니다. 가장 큰 고통이며 슬픔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요점은 이 "애통함은" 자기 스스로 슬퍼하는 의식 있는 행위란 점입니다. 이 슬픔은 당하는 슬픔이 아니라 자발적인 슬픔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고통을 느껴야할 시간에 고통이 없고 마음에 아픔이 있어야할 사람이 아무런 의식이 없는 것은, 참으로 심판 받은 불쌍한 심령의 현상입니다. 여기서 슬퍼하며 애통하는 것은 자발적이며 의식이 있는 분명한 행위입니다. 스스로 슬퍼하며 스스로 애통할 줄 아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의 의식현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애통이라야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4 : 10에서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고 같은 맥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슬픔을 세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는 일반적 의미의 슬픔입니다. 다른 말로 "현대적 현대인의 고통"이라고 이름지어 보겠습니다. 아랍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습니다.

"All sunshine makes a desert"(모든 햇빛은 사막을 만든다) 풀이하면, 뜨거운 햇빛은 언제나 땅을 사막화한다는 말인데 그들이 이해하는 바로는 웃음과 행복은 곧 슬픔과 불행을 가져오게 한다는 인생철학을 말하는 것으로, 저들의 깊은 경험을 피력해주고 있습니다. 역시 웃을 때나 기쁠 때는 인생의 깊이를 생각지 못하다가, 울고 애통하며 괴로울 때 인생의 깊은 면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지혜의 왕 솔로몬은, 지혜자의 마음은 잔치 집에 있지 않고 상갓집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깊은 고독에서 오는 뼈아픈 슬픔이 인생의 인생 됨을 찾게 합니다. 인간은 존재함과 환경을 통하여 만들어진 허수아비 인간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어디까지가 진정한 나 자신인가를 솔직히 알 수 없는 모호한 존재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통하며 애통하게 될 때에 비로소 헛된 누더기 같은 나 아닌 껍데기들은 다 벗겨지고 순수한 자기 존재의 의미에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애통함에서 깨닫게되며, 본질에로 다시 돌아오는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생각이야 있겠으나 애통하며 생각하는 그 생각의 차원은 깊이가 있고 원점으로 돌아오는 가장 진실한 순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피상적인 생각에서 깊이 있는 생각에로, 화려함에 취해있던 거짓에서 모처럼의 진실을 찾게 되는 것이 바로 애통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다윗왕은 고백합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6:6),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나이다"(42:3)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다윗이 진정한 다윗이 되는 순간이 아니었겠습니까? 거짓되고 그 위선적이며 아무 가치도 없는 화려한 영화들은 그를 몹시도 병들게 하였었으나 바로 이 애통하는 그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았으며 또 자기를 찾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이 애통 속에서 일반적으로 얻는 바가 큽니다.

애통 그 자체는 모든 것을 잃었고 모든 종래의 가치가 무너지는 순간이지만, 바로 무너지는 이 순간에 또 다른 한편에서 크고 소중한 것들을 얻게 됩니다. 첫째, 나 자신과 나 자신에 대한 진실을 얻게 됩니다. 잃어버렸던 본질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며 밝은 눈으로 자신을 보며 밝은 총명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최고의 덕이기에 그리 쉽게 알 수도 배울 수도 없고, 소유하기는 더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얻을 수 있는 보배가 곧 겸손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오히려 감사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곧 겸손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얻고도 교만하면 전적인 상실이요 모든 것을 잃고서도 이것을 얻는다면 최고의 소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애통함이 나에게 진정한 겸손을 가르치며 알게 하며 소유하게 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합니다. 둘째, 친구를 얻게 됩니다. 웃을 때 나를 찾아주는 친구와 애통할 때 나를 만나주는 친구가 다릅니다. 누가 참으로 나의 친구인가를 슬퍼하는 그 시간에 알게됩니다. 나의 애통을 이해하는 자, 슬퍼할 때 그 슬픔에 동참해주는 친구가, 진정 나의 친구일 것이 분명합니다. 한편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내가 참으로 좋은 친구를 영접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내가 기뻐할 때는 떠드는 벗이 있고 흥겨운 형식적인 동료는 있으나 참 친구는 없습니다. 나 자신도 친구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없고 진정한 뜻에서 내가 먼저 좋은 친 구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애통할 때 비로소 친구를 맞아들이며 필요로 하며 친구를 향하여 마음을 열게 됩니다. 이래서 좋은 친구가 되며 친구를 얻게도 됩니다. 셋째, 무엇보다도 큰 소득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울어보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것을 울게될 때에 비로소 알게 됩니다. 필자는 목회 하는 중에, 처음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을 가지게 된 분들에게서 종종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듣게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게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문제는 애통하는 자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경륜 속에서 전혀 생각도 못했던 하나님을 찾게 되고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고 내가 모를 때에 벌써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사랑하시고 나로 하여금 애통하는 자 되게 하사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구체적인 과정을 통하여 나를 부른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한 사람의 고백만이 아닙니다. 열왕기하 20:5에서 우리는 히스기야왕의 슬픈 눈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전에도 하나님 앞에 정직한 왕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애통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가까이 대하게 되며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되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울어보지 못한 자는 인생의 지혜를 모르다가, 울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며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 엄연한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자신에 대한 애통입니다. 다른 말로 회개의 애통을 말합니다. 에밀 부루너라는 신학자의 말에 "잘못 탄 기차 안에서의 선행은 무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못된 길로 가면서 그 속에서 웃고 즐기고 향락하며 또 어떤 선행을 행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입니까? "회개는 왕복 거리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못된 길은, 멀리가면 갈수록 또 그 행복을 즐기고 있으면 있을수록 앞에 있는 무서운 심판은 더욱 큰 것입니다. 회개는 궤도 수정이며 자기부정입니다. 오늘까지 쌓아올린 자기라는 이음의 바벨탑이 무너지는 소리로써 그 아픔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 슬픔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깨어지고, 부숴지고, 찢기워지고, 불타버리는 그러한 아픈 순간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나라는 거짓된 존재의 죽음이며 끊기는 고통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친히 하신 말씀 중에서 바리세교인과 세리의 대표적인 기도의 모습을 배웁니다. 두 사람을 비교한다면 도덕적으로 또는 사막 그리고 종교의식과 그 신분으로서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되는 두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하신 의도는 참으로 회개하는 저 세리가 회개 없는 바리새 교인의 의보다 훨씬 큰 것이라는 점입니다. 회개의 눈물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게 되는 최고 최초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애통함이 복의 근원이며 의롭다하심을 입는 입문이 되는 것입니다. 회개의 깊이와 은혜의 높이는 정반비례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 인물은 성군 다윗으로, 그는 결코 의로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애통함이 있는 죄인이었고, 눈물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 중에 나타나는 사람 중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이름이 바로 다윗의 이름입니다. 무려 800번이나 나옵니다. 사랑과 정직, 충성과 복받은 자의 대표로 늘 그 이름이 지적됩니다. 그 이유는 그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그의 진정한 회개, 거짓 없는 그의 눈물에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의 회개는 결코 순간적인 감상이 아니었습니다. 일생을 두고 그가 겪는 사건 사건 마다에서 계속적으로 회개했으며, 그 회개의 마음으로 평생을 산 것입니다. 그의 불효한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그는 아무 원망 없이 왕의 보좌를 내놓고 피난의 길을 떠난 것도 이 역시 회개의 마음이었다고 봅니다. 그의 회개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며 하나님과 자기와의 직선적 관계였습니다. 그는 단 한번도 함께 범죄한 요부 밧세바를 탓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언제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깨끗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회개는 자기자신을 꾸짖고 깨뜨리는 아픈 눈물인 것입니다. 참 회개는 누구도 원망치 아니하며 어떤 환경이나 나로 범죄케 한 어떤 여건에도 핑계치 않고 "내가 스스로 내 하나님께 범죄하였나이다"라는 직선적이며 절대적인 고백이어야 합니다. 이 같은 뜨거운 회개의 눈물, 그 애통함이 있을 때 그가 복된 것입니다. 사실, 회개는 믿음 없이 불가능합니다. 또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고 용기까지 주셔야만 회개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회개를 도우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가 용기를 주시지 아니하면 참 회개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후회하는 것과 회개는 다른 뜻입니다. 뉘우친다고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한 죄인의 바른 응답인 것입니다. 이 눈물은 단순한 심리적 비애현상이 아니라 죄인이 돌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하는 참으로 우주적인 구속사역의 실현인 것입니다. 자기자신을 살피며 회개하는 애통함은 진정한 행복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세상을 향한 애통함입니다. 아마도 이 같은 눈물의 대표자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운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4 : 19이하를 보면 그의 눈물의 의미를 스스로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나 이는 나의 심령 네가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라고 외칩니다. 죄로 사무친 세상을 보면서 슬프고, 이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고, 그리고 조만 간에 멸망될 죄악의 도성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애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신약에 사도 바울 역시 그의 로마서 속에서 "그치지 않는 고통"(9:2)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동족의 멸망을 내다보는 신령한 안목을 가진 자는 이 아픔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현세적인 향락과 세속적인 즐거움에 취해서 죄를 죄인줄 모르며, 그 죄로 인한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보지 못하는 자는, 암흑과 혼돈 속에 빠져 들고있는 자신의 슬픔을 알 리가 없습니다. "노아의 때"처럼 멸망하는 그 날까지 향락에 취해있을 것입니다. 망할 때 망할 것이나 멸망을 예견하는 고통은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안목이 있고 또 동족과 친구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 자는 이 같은 "동참하는 슬픔"의 고통을 겪게됩니다.

이 같은 애통을 아는 자는 그 자체로써도 복된 것입니다. 그 속에 선택받은 자의 은혜와 축복이 깃들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결론은 "위로"입니다.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는 큰 전제아래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슬픔에서 슬픔으로 끝나며 애통으로 끝난다면 이것이 무슨 복이 될 것입니까? 애통하는 자의 복은 곧 그 종국인 "위로 받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위로란 그저 주어지는 자연적이거나 필연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 애통하고 스스로 위로를 창출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앙적인 애통함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위로하시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때문에 결국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먼저는 예수에서 위로자 이시며, 성령 곧 보혜사가 위로자 되십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장에서 보여주는 대로 하나님은 위로의 아버지이시므로 환란 중에 위로하시고 우리로 위로자 되게 하시며 또 그리스도로 인해서 진정한 절대적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 외에 그 누가 위로할 수 있으며 또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위로자 되시며 또 오히려 그리스도적 고난 속에서 위로 받게 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애통함을 통해서만 그 위로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위로의 하나님의 그 위로를 애통하는 자만이 만나며 알며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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