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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온유한 자(마 5:5)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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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5)

 

이 본문은 팔복 중의 셋째 복으로 온유한 자가 얻는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은 시편 37:11"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라는 말씀을 약간 수정해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세상적인 상식으로는 힘이 세고 강한 자라야 무엇인가 차지할 수 있고, 약한 자는 모든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온유한 자가 더 강한 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온유할 때 강해지고 교만할 때 도리어 약해져서 멸망이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도 외유내강(外柔內强), 즉 온유한 자의 승리를 경험하지 않습니까? 가령, 두 사람이 다투었습니다. 어느 편이 이긴 사람입니까? 대체로 목소리가 큰 사람이 약자이며 패배자입니다. 잘못이 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의외로 커지기 마련이니까요. 여기에다 폭력까지 사용했다 하면 그는 완전한 패자입니다. 생태계에게서도 이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얼핏보기에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니 적자생존(適者生存)이니 해서 강자만이 생존경쟁에서 살아 남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와 반대이지 않습니까? 물 속에서만 보더라도 큰 물고기는 중간 물고기를 잡아먹고, 중간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또 작은 물고기는 더 작은 것으로 계속해서 먹어 나가는데, 이상하게도 멸종되는 것은 큰 물고기들입니다. 이론적으로는 가장 작고 연약한 물고기가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멸종되어야만 하나, 갈수록 그 숫자가 늘어나니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강한 동물의 심볼인 호랑이나 사자 등은 점점 멸종되어 가고, 약하고 힘없는 동물들은 갈수록 늘어나니 약육강식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이것을 생물학적으로 재미있게 풀이하기로는, 약한 동물들은 온순하여 사랑을 잘해서 번식이 왕성하며, 강폭한 큰 동물들은 사랑을 할 줄 몰라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자나 범은 사랑한다는 것이, 숫놈이 암놈을 죽여버린다고 하니 번식이 되겠습니까? 아무튼, 이렇게 자연계에서 도 온유한 종류가 땅을 차지하고 있듯이 인간 세계에서도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함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본문이 뜻하고 있는 온유의 개념을 생각하겠습니다. 온유란 헬라어로 '프라우스'인데, 이 말 자체가 윤리적 용어로 세 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온유란 두 극단(extreme)에 서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쪽이든지 극과 극에서는 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동양철학에서도 중용을 강조하는데, 이 중용이 바로 온유의 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에서도 온유를 하나님의 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때를 가려서 분노하자는 의미에서 "옳은 시간에 노하며 그릇된 시간에 분노하지 않는 자"에 대해 말했습니다. 분명히 의분은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모른다고 물러서는 나약함은 온유가 아닙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결코 분노하지 않고, 옳은 일을 위해서만 의분을 갖는 것이 온유입니다.

둘째,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마음을 온유라고 합니다. 동물에게 적용되는 말하면, 사람의 말을 잘 듣도록 길들여진 동물을 온유한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인간 쪽으로 돌려서 표현하면 본능과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훈련된 인격을 온유라고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기 감정들을 다스리지 못하여, 해서는 안될 말과 행동들을 저질러 실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단 실수한 일은 뉘우쳐도 다시 되돌릴 수가 없지 않습니까? 자기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양심에 의해서, 진리에 의해서 자신을 다스리고, 나아가서 본능까지도 다스릴 줄 알아야 온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온유를 형용사적으로 표현해서 '프라우테이스', 겸손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풀이하면 스스로의 무지와 연약함을 깨닫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배움의 자세, 바로 그런 겸손이 온유의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부족함을 알기에 충고를 받아들이고 남의 힘도 의지할 줄 아는 자세를 말합니다. 온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죤칼빈(calvin)선생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자요, 동시에 유능한 정치가입니다. 그가 젊었을 때 스트라스버그(strousburg)에 공부하러 가는 길에 제네바에 잠깐 들렀습니다. 그 때 제네바에 있던 친구 월리암 파렐과 교인들이 그에게 이곳에 머물러 함께 일하자고 간청했습니다. 칼빈 선생은 스트라스버그에 가서 조용히 공부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완강히 거절했고 그곳 교인들은 그가 꼭 필요하다고 강권했습니다. 칼빈은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을 믿고 자기 뜻을 굽히며 그 곳에 머물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각 곳에서 모여드는 피난민을 상대로, 하루에 3번씩 매일 설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열심히 또는 양심적으로 가르쳤는데, 3년후에는 제네바 의회에서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 믿고 아무 말 없이 쫓겨갔습니다. 그리고서는 원래 목적했던 대로 스트라스버그에 가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또다시 3년 후에 제네바에서는 죤 칼빈이 꼭 있어야 하겠다고 그를 불러들입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화가 나서 그 요청에 응하기가 어렵습니다만 그는 기꺼이 수락하고 남은 일생을 그곳에서 수고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지상의 낙원이라 일컫는 스위스의 제네바를 건설한 것입니다. 그의 온유함과 수용적인 태도는 후세사람들에게 좋은 본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의견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100%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완전한 이론이란 없단 말입니다. 문제는 한 의견이 그 장소에서 얼마나 적중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의 의견만이 옳다고 남의 생각을 비판하면 나의 의견도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신학대학에서 목회학을 가르칠 때 반드시 부탁하는 일이 있습니다. 졸업을 하고 목사가 되어 어느 교회에 가든지 전임자가 하던 일을 너무 쉽게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사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6개월 정도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간혹 장로님들이 이것은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좋습니다. 조금 더 해보죠" 하며 6개월을 지내다가 조금씩 조금씩 고쳐서 2, 3년 후에야 완전한 자기 아이디어를 내놓는 것입니다. 부임하자마자 전임자가 하던 일을 모두 백지화하고 자기주장대로 한다면 잘될 것 같지만 큰 부작용을 낳습니다. 완전한 의견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스트라스버그로 가는 것이 자기 의견이었지만 교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머물었고, 또 가라할 때에 갔으며, 다시 초청되었을 때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것이 참된 의미의 온유입니다. 스스로의 무지와 연약함을 인정하고 필요를 아는 겸손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온유한 자가 받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민수기 12 : 1 - 3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고 교만하게 나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평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온유함이 땅위의 어떤 사람보다 월등하다고 보셨기에 그에게 큰 일을 맡기셨습니다. 남보다도 온유해야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잠언 16 : 32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리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자기를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이란 이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또한 시편 37 편에서는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긴다고 말했습니다. 땅을 차지하고 화평으로 즐긴다는 것은 그 땅을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화평으로 즐기지 않고서는 땅의 소유주가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도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소유주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그 땅에 대한 권리를 말하며 이 권리를 즐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단칸방이라도 내 집이 소중함은 잘 아는 사실입니다. 나의 것(ownership)이란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말하며 그것은 곧 즐거움입니다. 그러므로, 소유하고도 불만스럽다면 그는 진정으로 소유하지 못한 자입니다. 온유한 자만이 소유를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가령, 15평 정도의 집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집은 그의 소유인데 집을 볼 때마다 불평을 합니다. "남들은 모두 큰집에 사는데 무슨 팔자로 이런 오막살이에서 사느냐"고 불만투성이면 자기 집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는 남의 집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집에 들어갈 때마다 이 집에 살게된 것이 감사하고 즐거워서 "집 없는 사람도 많은데 얼마나 다행인가"라고 생각하면 그는 정말 자기 집을 소유하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즉 자족하는 마음에 소유권이 있다는 말입니다. 물건을 구입했을 때 누구나 경험하지 않습니까? 비록 물건을 샀어도 만족하지 못하면 그 물건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특히 옷을 샀을 경우에 그 옷이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입고 싶지 않으니 내 옷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좀 죄송한 이야기입니다만 결혼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나 아내, 또는 자식들에게 감사하며 살지 못하고 "어쩌다가 저런 사람과 살게 되었을까? 자식들은 왜 저 모양인가"하고 불만하게 되면, 함께 살아도 내 남편과 내 자식이 아닙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온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며, 그는 소유를 즐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상은 심리학적인 면에서 온유를 생각한 것입니다.

다음은 문자적으로 온유를 생각하겠습니다. 온유한 자는 그 자체가 하나의 충성으로 인정되어 더 큰 권리를 얻게 됩니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받은 축복중 가장 큰 축복이 만물을 다스리라는 권세였습니다. 그는 다스리는 자의 권세로 산과 들, 그리고 동식물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굉장한 소유권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는데, 죄를 지음으로 그 권세를 다 빼앗겼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온유한 마음을 갖게 되고 온유함으로써 빼앗긴 권세를, 즉 그 소유권을 회복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그 분의 성품을 닮아 온유해지면 소유권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린도전서 3:23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고, 또한 고린도후서 6:10에서도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적인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것은 또한 나의 것입니다. 천지만물 이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고, 동시에 나의 손에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이러한 오묘한 진리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시편 37:16에 보면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이란 온유한 자로 적은 것을 가지고도 많은 사람의 풍부함보다 더 즐겁게 살 수 있는 오묘한 소유권자인 것입니다.

끝으로 신비적인 면으로 온유를 생각해 보려합니다. 온유한 자가 소유하는 땅은 가나안을 의미하며 가나안은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계속 말씀하셨고 아브라함과 야곱에게도 약속하신 것이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백성들이 온유할 때 가나안을 소유하게 되고 교만하면 포로로 쫓겨났습니다. 온유한 자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이 가나안 땅을 신비롭게 생각하면 하늘나라의 그림자입니다. 즉 온유한 자에게 하늘나라의 소유권이 있다는 말입니다. 시편 25:9에서는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시는 하나님, 시편 147:6에서는 겸손한 자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사야 29:17에서는 겸손한 자가 여호와로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가나안의 축복, 천국의 축복은 온유한 자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가 모인 가정에 천국이 임하고, 온유한 자가 모인 사회에 천국이 임합니다. 온유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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