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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설교 1,910편

생명의 떡(요 6 : 32~40)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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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떡(6 : 32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오천 명을 먹인 귀한 역사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소문이 사방으로 번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그와 같은 기적을 보기 위해 지난날 떡을 먹은 사람은 물론 소문만 들은 사람들까지 합세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귀중한 기적이 보여 주고자 하는 표적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저 떡을 먹는 것이 좋았고 굉장한 사건을 다시 보았으면 하는 소원에서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무리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찾는 이유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즉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이 좋고 세상적인 것만 좋아서 그것만을 위해 왔지만, 정말 알아야 할 것, 귀중하고도 영원한 것을 모른다고 비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내가 진정 예수를 믿는 이유가 어디에 있으며 기도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혹 첫 동기는 떡을 얻기 위해서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두 번 먹었으면 이제 그 뜻을 알고, 보다 중요한 것을 알아 성장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에 나오게 된 첫 동기를 알아보면, 친구 따라 나왔고, 교양 강좌 들으러 나왔고, 병고치기 위해 나왔고, 아들 딸 잘되라고 나왔고, 장사속으로 나왔고, 하여튼 동기는 천태만상입니다. 동기는 비록 좋지 않았어도 나오는 동안 차차 깨닫고 영원한 진리를 바라보게 되면 신앙적인 성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무리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보았고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었지만 표적의 의미를 몰랐기에 또 다시 다른 표적을 구합니다. 사실 표적은 이미 주신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부터 기적으로 내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이 기적 아닌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오늘 이 사람들은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까"(6:30) 하고 묻습니다. "보고 당신을 믿게 하는 표적이 무엇이니까" 보았다고 모든 것이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나 믿음이 부족할 때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좀 보여 주시면 잘 믿을 것 같습니다. 꿈속에서라도 예수님이 나타나시어 악수를 한다든지 환상 중에서라도 한 번만 예수님을 보았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본 것을 안 믿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것은 변증학적인 이론입니다만 보았으면 잘 믿을 것 같은데 믿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아내들은 항상 보는 남편들을 믿지 않습니다. 항상 보는 아들도 믿지 못합니다. 보는 것이 완전하고 보면 믿겠다고 생각되지만 믿지 못할 것이 보는 것입니다. 본다는 것은 불확실하고, 또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므로 불신하게 됩니다. 마치 선지자가 고향에서 불신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흔히 성지 순례를 위해 돈을 많이 쓰고 있는데, 물론 갔다 와서 믿음이 더욱 성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오히려 믿음이 떨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서 보니 기대했던 것보다는 별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보았다는 것이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본다는 것에 믿음의 근거를 삼으려고 합니다만은 본다는 조건과 신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인식, 내 경험이 부족하기에 내가 보았고 경험한 것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오히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는 터틀리안(Tertulian)의 말처럼 내 생각으로 맞는 일이라면 그것은 내 수준 정도밖에 안 되는 일입니다. 내가 이해하는 진리라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아니 오히려 나보다도 못한 것입니다. 내가 보지 못하고 불합리하고 이치에 맞지 않고 오히려 역설적이기에 믿을 만한 진리로써 이것이 높은 차원의 이론입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을 믿게 하는 표적은 무엇입니까? 믿게 할 방법은 없습니다. 의심하는 자에게 더 이상 무엇이라 설명합니까? 믿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다 믿지만,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믿게 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무엇인가 좀 보여 달라는 군중들에게 성경으로 돌아가서 옛날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지 않았느냐, 그래도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죽이겠다고 했는데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즉 오천 명을 먹여도 만 명을 먹여도, 아니 죽을 때까지 먹여도 안 되는 자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만나"는 히브리말로 ""이라고 하는데, 영어로 그 뜻을 보면 "What is this?", "이것이 무엇이냐?" 하는 뜻입니다.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떡가루 비슷하게 생긴 것인데, 밀가루와 꿀을 섞은 맛이라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아침에 필요한 양만큼 거둬들이고 나면 나머지는 다 없어졌습니다. 이상한 것은 이렇게 놀라운 만나의 기적을 보고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지만 40년 동안 여러 가지 모양으로 모세를 원망하고 죽이겠다고 야단을 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보면 정말 안 믿겠다는 사람에게 믿게 할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16:1-36에 보면 만나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에 대해 그들 나름대로 생각이 있습니다. 첫째로, 만나는 하늘로부터 온 떡입니다. 느헤미야9: 5이나 시편105:40 등에 보면, 이것은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나는 농사를 지은 것과는 달리 하늘에서 내려온 떡가루이므로 하늘로부터 온 떡이라고 그들은 이해했습니다. 둘째로는, 메시야가 오시면 다시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릴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옛날 모세를 통해서 하늘에서 내린 것처럼 메시야가 오시면 또 다시 만나가 내릴 것이라고 외경에 근거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러한 바램을 알고 계셨으므로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준 것처럼 오늘 인자가 너희들에게 만나를 주지 않느냐, 이 만나의 의미를 너희가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내용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것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둘째로 이것은 상징적인 것으로써 사건은 사건대로 사실이고 본체는, 즉 말하고자 하는 본뜻은 영원한 진리라는 뜻입니다(6:32). 다시 말하면, 만나란 육체를 만족하는 떡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떡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생각할 때에, 먹고 단순히 배부른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양식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계속적으로 생명이 주어져야만 살 수 있으므로, 참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부모로부터 생명을 받아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한번 태어났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태어나야 하고 계속적으로 생명을 공급받아야 사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먹어야 사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생명의 떡이요, 참 떡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참 떡으로 지난날의 것은 그림자요 가짜로서, 이제 참 떡으로 계속적인 공급을 받아야만 생명이 유지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필자가 미국의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웨이터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고기맛이 아주 좋고 연하게 잘 구워졌다고 영어 실력을 총동원하여 칭찬을 하며 고기를 맛있게 만드는 비결을 물었습니다. 웨이터는 대단히 좋아하며 당신이 외국인이기에 이 비법을 알려주겠다고 특별 서비스임을 강조했습니다. 고기를 처음 잡으면 바로 얼리지 말고, 얼기 직전의 온도에다 5일간 저장했다가 굽는 것이 바로 그 비결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왜 그렇게 해야만 맛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하나의 철학이었습니다. 세상에 대부분의 맹수는 반드시 산 것만 먹습니다. 지금도 동물원에 있는 맹수들에게는 살아서 숨쉬는 동물들을 먹이로 넣어주고 있습니다. 맹수들이 먹고 남은 것은 독수리가 먹고 또 다음은…… 하고 나가다가 마지막 썩은 것은 여우가 먹습니다. 동물원에서도 여우에게 음식을 줄 때는 일단 묻었다가 썩혀 가지고 준다고 합니다. 이렇게 먹는 방법이 다양해서 고루 고루 다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먹이는 어떻습니까? 사람은 중간 존재로서 방금 죽인 고기는 질겨서 못 먹고 썩은 것은 냄새나서 못 먹고 썩기 직전의 상태를 아주 맛있게 먹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먹는 고기가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정말 죽은 고기는 썩은 것이며 사람은 썩기 직전까지의 상태를 먹는 것입니다. 지금 숨을 쉬고 있진 않지만 살아있는 것을, 즉 생명을 먹고 있다는 말입니다. 식물도 마찬가지로 채소를 뽑아서 이것이 썩으면 먹지 못합니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생명으로 먹어 우리 생명을 채우는 것입니다. 음식을 삭혀서 먹는 것이나 누룩도 썩기 직전에 먹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사람은 살아있는 생명으로서 생명을 먹어 생명을 지속해 나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먹음으로써 힘을 얻고 성장하고, 만약 먹지 못하면 죽고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육신적으로도 계속해서 생명을 먹어야 하듯이 우리는 참 떡이요 생명이신 말씀을 먹어야 사는 것입니다. , 예수님 없이 살 수 없음을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음, 이 참 떡은 하늘로서 온 떡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채식과 육식을 하는데, 육식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소를 들 수가 있습니다. 소는 풀을 먹고살며, 풀은 하늘로부터 오는 햇빛과 비를 먹고 자랍니다. 햇빛과 비를 적절하게 잘 먹어야 좋은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결국 모든 생명의 근원은 위로부터 온 것으로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신 것만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가 생명을 유지해 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근원은 하늘에 있고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의 생명의 떡으로 너희는 이 떡을 먹어야 산다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먹고산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몸은 떡으로 살며 영은 말씀으로 삽니다. 말씀이란 사랑이며, 사랑은 곧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독일말을 보면 사랑과 산다는 말의 어원이 같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사람은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은 물론이지만 특히 정신적인 세계는 사랑이 없으면 죽습니다. 마치 햇빛을 받지 못하는 식물이 시드는 것처럼 사람도 사랑을 받지 못하면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랑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고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맺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사랑을 먹으며 그 사랑 안에서 태어나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다음은 일용할 양식입니다. 사람은 하루에 세 번씩 매일 먹어야 합니다. 단번에 일년 것을 하루에 다 먹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계속 일용할 양식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일날 낮과 밤으로 나누어 말씀을 듣고 수요일에 나오고, 또 새벽마다 기도하고 성경 공부하여 계속 먹고 있습니다. 영양이 부족하면 허약해지고, 불균형이 되면 병이 생기므로 계속 먹어야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도 그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37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6 : 37)고 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34절에 보면 사람들은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답답한 주문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주는 떡은 결코 주리지 않는다고 하셨을 때, 그들은 "이제 농사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내게 주신 자는 내게로 올 것이다"라고 주었어도 받아먹지 못하는 이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틀렸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주셨는데, 왜 그들은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쉽게 말해서, 입맛이 틀리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입맛이 틀려서 우리들은 된장찌게, 김치를 좋아하는데, 파키스탄 사람들은 양고기를 넣어 만든 카레라이스를 손으로 집어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송충이는 역시 솔잎을 먹는다고 각각 먹는 식성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께서 좋은 음식을 대접하지만 입맛이 틀려서 받아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주 이질적인 존재로서 종족이 틀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만 내게로 올 것이다라고, 너희들은 주시지 않았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설교를 들을 때 말씀이 잘 들려지면 사는 것이고, 잘 들려지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믿는 자로서 가장 큰 고통은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가끔 성도들 중에서 말씀이 들리지 않음을 호소해 오는데 무엇이라고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유대 사람들도 입맛의 채널이 달라서 아무리 풍성하게 주어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채널이 맞아 주님께 오는 자는 영접하시고 넉넉히 주시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6:35). 이 입맛은 맛보지 아니한 사람은 알 수가 없는 귀한 맛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결론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6:40)고 종말론적인 의미를 주고 계십니다. 이 양식을 먹는 자는 마지막 날에 내가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죽을지언정 이 양식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뜻으로 종말론적 양식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떡이요 참 진리다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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