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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사랑하는 자의 고백(4장 12~20절)

by 【고동엽】 2022.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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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자의 고백(41220)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다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의 사랑하는 자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 아름답고 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성경 66권이 모두 귀한 말씀이지만, 그 중에서도 저마다 나름으로 은혜 받고 사랑하는 본문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언제나 다른 본문에 비해 더 애착이 가고 내게 은혜를 주며 큰 힘을 주는 말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 역시 제가 가장 사랑하는 말씀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늘 마음속에 새기면서 위로 받고 은혜 받는 귀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411절에 이르기까지 율법주의에 치우친 신앙인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해왔습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기로 하고 출발하여 세례를 받고 마침내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유혹에 빠져 율법주의자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율법주의자가 되어 그만 율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그 큰 감격과 은혜는 다 사라지고 율법주의자의 전형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아는 사도 바울은 잘못된 신앙을 교정하기 위하여 저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이며 변증적으로, 또 지극히 신학적인 방법으로 그것이 왜 잘못되었나를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은혜가 무엇이며 율법이 무엇인가, 율법주의자의 삶이 무엇이며 은혜에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덧붙여 은혜로 율법을 극복하는 방법과 십자가의 의미도 설명합니다. 이를 신학적이며 실제적인 경험 안에서 예를 들어가면서 조목조목 이야기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 스타일이 전혀 다릅니다. 이성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감성적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득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애정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애정을 저들에게 드러냅니다.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사랑하지 않느냐'-사랑을 가지고 저들에게 호소합니다. 그런가하면 '옛날에는 너희들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느냐'-그런데 어느 사이에 이렇게 변하게 되었느냐고 그 옛날 사랑하던 때를 추억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바른 신앙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충고를 하려면 변론보다는 역시 감정에 호소하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딱딱한 훈계보다는 어머니의 눈물이 효력이 있지 않습니까? 열심히 잔소리를 늘어놔봐야 별효과가 없습니다. 오히려 어머니의 눈물 한방울이 더 호소력을 지닙니다.

우리는 때로 너무 많은 변론을 늘어놓습니다.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당신이 잘못했다 내가 잘했다고 서로들 말이 많습니다. 누가 잘못했는지 모릅니까? 누가 잘못된 길로 가는지 모릅니까? 고치기가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그럴진대 이제 와서 새삼 아픈 데를 들춘다고 하여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상대방을 정말로 사랑하여 잘못한 것들을 고치려고 한다면 이론이나 변론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논리적으로 설명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지적으로 사고를 돌려놓는 길만이 길이 아니라, 가슴부터 돌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뜻이 돌아갑니다. 본문은 그 마음을 움직이기 위하여 애정에 호소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이제 본문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먼저 12절의 말씀,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으니 너희도 나처럼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성육신의 교리를 한번 상고해보기로 합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오셨습니다. 어느 유명한 신학자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오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오셨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애정의 제1호가 이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표현, 그 첫째는 '내가 너와 같이 되었다'-희생입니다. 어떠한 희생이겠습니까? 물질을 주는 것, 지식을 주는 것이 희생이 아닙니다. 큰사랑이 아닙니다. 큰사랑은 명예를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위하여 나의 명예를 버립니다. 또한 그보다 더 큰사랑은 본문에서와 같이 나의 존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나의 나됨을 희생합니다. 얼마나 큰 일인지 모릅니다. 내가 너와 같이 되었다-높은 자가 낮아지고 아는 자가 모르는 자가 되는 일입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인데 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없는 척하는 게 아니라 아주 없는 사람이 됩니다. 알고도 모르는 체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위하여 나를 얼마나 바칩니까? 내가 너와 같이 되었다-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가정에 어린아이가 하나 있으면 집안식구가 모두 어린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진지 잡수세요'라는 말도 모르고 '식사하세요'라는 말도 모릅니다. 아는 말이라곤 오직 '맘마'뿐입니다. 집안식구들을 향해서 "맘마, 맘마"하고 소리칩니다. 다 어린아이가 되었습니다. 그 어린아이로 하여금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어린아이의 말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어린아이가 되어야 집안이 천국이 됩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사랑함으로 스스로 어린아이가 된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방바닥을 벌벌기면서 등말을 태워줍니다. 그 체면에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상투를 쥐고 흔들어도 '허허' 좋기만 합니다. 어른이 어린아이가 되었어요. 그 순간에는 잘하는 일이고 잘못하는 일이고, 체면이 어떻고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상대방과 같아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사람이다' '나는 율법을 가진 사람이다' - 그러나 이방인처럼, 율법이 없는 사람처럼 너희와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같이 됨으로 받게 되는 모든 비난과 역경을 묵묵히 참아 견디어내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으니 이제 너희도 나와 같이 되는 것이 옳지 않느냐?' '내 뜻을 알고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이러한 말씀입니다. 이는 가장 온전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귀한 사랑은 내가 얼마만큼 나를 버리고 상대방과 같아졌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다시 옛날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옛날에 나를 얼마나 사랑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14절의 말씀에서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사도 바울을 영접할 때에 이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과연 그럴만한 인물이었습니까?-잘 생각해보십시다. 예수처럼 훌륭하게 보였습니까? 훤하게 보이는 인물이었습니까?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또 지식에서 그처럼 흠 하나 없이 완벽한 사람입니까? 큰 능력이나 이적을 행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본문의 중요한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적을 행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굉장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흠도 있고 약점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와 같이 영접했다는 사실은 오로지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하면 인내합니다. 저는 사랑의 척도로 먼저 인내를 꼽고 싶습니다. 몇 시간이나 참아줄 수 있는가를 보면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됩니다. 짓궂은 청년들은 이렇게 한다고 합니다. 상대의 사랑을 시험하기 위하여 "몇 시에 만나자"고 약속해놓고는 일부러 30분쯤 늦게 나갑니다. 그때 가서 불평을 하는가 안 하는가를 보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사람을 세워놓고 시간을 안 지키면 어떡하느냐." 울상이 되어 투덜거리면 '이여자는 어렵겠다'고 생각하고 교제를 그만둔다고 합니다. 반면 "그럴 수도 있지요. 워낙 차 타기가 힘드니까." 이정도면 '괜찮은 여자다'하여 오케이한답니다.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런 젊은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기다려줄 수 있습니까? 불평 없이 기다릴 수 있는 정도가 얼마만큼입니까? 가만히 보면 내 실수는 생각지 않고 남의 실수만 열심으로 비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힘든 사람입니다. 똑똑한 것도 별로 반갑지 않습니다. 오히려 좀 모자란 듯싶은 쪽이 훨씬 좋습니다. 상대방을 위하여 얼마나 인내할 수 있는가, 시간적으로 질적으로 얼마나 참을 수 있는가-인내입니다. 사랑에서는 인내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또한 사랑은 이해입니다. 상대방의 모든 점을 내 편이 아닌 그의 편에서 이해합니다. 그 사람의 결점과 실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이해(understanding)의 깊이-이 깊이가 사랑의 척도가 됩니다. 남자는 여자를 여자로서 그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자가 화장대 앞에 앉아 아름답게 보이려고 열심히 얼굴을 매만지고 있습니다. 남자가 그 주위를 빙빙 돌다가 고작 한다는 소리가 "알뜰히 매만져봐야 당신은 별 볼일 없어"였다고 합시다. 이런 남자는 여자하고 같이 살 자격이 없습니다. 같이 살 필요 없으니 내쫓으십시오. 여자에게 아름다움은 가히 절대적인 이슈입니다. 호박꽃이든 장미꽃이든 아름답게 가꾸어보려는 것이 여자의 심리입니다. "최대한으로 예쁘게 해보라"하고 격려해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실제로 이런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어머니가 열심히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첫째아들이 "어머니는 이제 나이가 많아서 아무리 해도 예쁘지 않아요"라고 말했답니다. 이를 들은 둘째아들이 형에게 반박합니다. "아니야. 아직도 우리 어머니는 예쁘단말야." 옆에서 아버지가 듣고 있자니 기분이 나쁩니다. ", 이놈들아. 어머니 보고 예쁘다 안 예쁘다가 무슨 소리냐"-이렇게 한마디했습니다. 그랬더니 셋째아들이 나섭니다. "그것봐, 남의 여자한테 왜 시비를 하냐?"-네 마누라도 아닌데 예쁘다 안 예쁘다 시비할 것이 뭐 있느냐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있지만 옳은 이야기입니다. 여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아름답고자 하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남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자존심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남자의 자존심을 꺾어서 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일단 자존심을 보장해놓고 이야기하십시오. 명예와 자존심을 짓밟으면서 사랑 받으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천하에 없는 미인이어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음식을 잘 만들고 서비스를 잘한다 해도 자존심을 지켜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남자를 잘 조정하려면 먼저 자존심과 명예를 높여주어야 합니다. 확실하게 보장한 다음에는 모두 내 마음대로 입니다. 다 가져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자존심을 짓밟아보십시오. 죽은 사람이나 같습니다. 남자를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이해하는 데에 있음을 잊지 맙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이 상대방의 허물까지 덮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극대화해주고, 상대방이 부끄럽게 생각하여 감추려고 하는 것은 몇 겹으로라도 감싸주라'-바로 사랑입니다. 남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는 것은 악취미요, 살인행위입니다. 감추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아픈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꾸 건드립니다. 마음을 아프게 하고 눈물나게 만듭니다. 잘못되었습니다. 끝까지 덮어주고 감싸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사도 바울은 본문 가운데에 삽입적인 말씀을 기록해놓았습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13)"-신중한 말씀입니다. 약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약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디 아스데네이안'-영어로는 'because of the weakness'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했다-이해가 가십니까? 이론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이해해야 할 문제입니다. 실제로 내가 건강할 때에 복음을 전했는지 병들어 있을 때에 복음을 전했는지 생각해봅시다. 예수 믿으라고 진정으로 권한 것이 어떤 때였습니까? 어떤 사람은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옆에 있는 환자에게 난생처음으로 예수 믿으라 했답니다. 감옥 안에서 해보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건강하고 만사가 형통하게 이루어질 때에 자행자지(自行自止)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병들어 약해졌을 때에, 또 환란을 당하는 곤고한 날에 오히려 신실해지고 겸손해지고 사명이 순수해져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솔직하게도 자기의 이런 약점을 모두 고백합니다. 그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편지를 보면 이러한 이야기가 여러 곳에 나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를 입거나 저주받을 것이다'-실제적인 경험에서 한 말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9장에서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16)"라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 건강하고, 좀 게을리하면 어딘가가 쑤시고 아팠던 것 같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건강해서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마침 병들어 못가고 그곳에 머물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라리아병에 걸려서 못가고 머물러 있는 동안에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건강한 몸이 아니었습니다. 병들었기 때문에 머물렀고, 그래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웁니다. 그래서 '내가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라고 말하게 됩니다. 우리의 경험 속에서도 이런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참으로 귀한 간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7절에서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使者)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기적으로 두통을 앓았던 것 같습니다. 요즘같으면 아스피린으로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지만 당시는 심한 두통을 그대로 견디어내야 했습니다. 또한 눈이 어두웠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밝은 빛을 본 후로는 좀 나아졌지만 본디 안력이 좋지 않아서 잘 보지를 못했습니다. 성경을 기록할 때에도 대필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6 : 11)"하여 직접 쓰기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눈이 나빠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또한 말라리아병도 있었다고 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간질병이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옛날에는 간질병이 흔했습니다. 가끔씩 발작을 하게 되어 큰 어려움을 겪고는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14)"라고 말씀합니다. 다리가 좀 아프다고 해서 믿음에 시험들 것은 없습니다. 눈이 좀 어둡다고 해서 믿음에 병들 것까지도 없습니다. 믿음에 시험이 될만한 것, 그것이 간질병이라고 해야 이 말이 맞아떨어집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간질병을 마귀가 주는 병이라고 여겼습니다.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간질병 환자 자신들도 하나같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에 가까이 지내던 친구 하나가 자꾸 거품을 물고 쓰러져서 많이 도와준 기억이 있습니다. 깨어난 뒤에 물어보면 누가 빨간 보자기로 자신을 덮어씌운다는 것입니다. 안 쓰려고, 벗어나려고 허우적거리지만 결국 덮씌워져서 쓰러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생을 합니다. 사실이 그렇다기보다는 전해 내려오는 말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의 사람들은 그때마다 마귀가 빨간 보자기를 씌운다고들 생각했습니다.

간질병은 사도 바울에게 결정적인 약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자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큰 능력을 행하면서 돌아다녀야 하는데, 제 병조차 고치지 못하고 하물며 간질병을 지닌 채 있었으니 말이 됩니까? 충분히 믿음을 시험할만한 것이 됩니다. 그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믿음에 손해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시험할 만한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너희가 업신여기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충분히 업신여길만한 사건입니다. 한번 봅시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만 거품을 물고 쓰러졌습니다. 얼마나 괴롭습니까? 소문이 좍 돕니다. "아유, 그것 보니 시원찮은 사람이구나! 그래 가지고야 무슨 하나님의 종이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법도 합니다. 설교를 하다말고 쓰러졌으니 바울의 입장에서는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세 번이나 특별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다른 것은 괜찮지만 이것은 꼭 들어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전도를 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가 내 몸 안에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간질병 이야기가 나오면 꼭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오래전입니다마는 한참 더운 여름에 광주 제일교회에서 연합집회가 있었습니다. 둘쨋날인가 싶은데 제가 인도를 했습니다. 강대상에서 설교를 하는 도중에 앞에서부터 두 번째에 앉아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마구 흔듭디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좌중을 보니 앞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데 뒤쪽에 앉아 있던 다른 교회 사람들은 일어서서 소란을 떱니다. 간질이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듭디다. 그래서 "아무 일도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하고 진정을 시켜 모두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그 간질병 환자는 한번 소리를 지르고 나더니 픽 쓰러져서 거품을 뿜으며 땀범벅이 되어 땅바닥을 마구 뒹굽니다. 그리고 나서 한 20분 가량 자고 나더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온몸에 땀이 비오듯 흐르는데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가만히 의자에 엎드려 있다가 예배가 끝나기 무섭게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장로님으로 연합집회의 회계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후 며칠 동안은 교회에 못나옵디다. 연합집회를 마치고 광주를 떠날 때에 그분이 비행장에 나오셨습니다. 제 손을 꼭 잡고는 "목사님, 소란을 떨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하고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괘념 마십시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위로를 하고 비행기에 올라 서울로 돌아오는데, 내내 사도 바울을 생각했습니다. 갈라디아교회에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예배드리는 동안 앉아 있다가 쓰러진 것도 이러한데 사도 바울은 설교하다가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몸둘 바를 모르며 죄송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는 우선 건강하고 봐야 하겠습니다. 목회자들도 병들고 어려움을 많이 당합니다마는 그것이 모두 시험이 됩니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웬만하면 병을 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앓아도 골라가면서 앓아야 되겠습니다. 이를테면 '신경성'이라는 말이 붙은 병은 도대체 은혜가 안됩니다. "목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 믿기에 그 모양이야." 이렇게 되면 어렵습니다. 마음의 근심을 이기지 못해서 생긴 병이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병도 골라가면서 앓아야 하는 사람이 바로 목회자요 예수 믿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를 업신여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아니하며 오직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합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올시다. 인정 많은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점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너희들이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왜 마음이 변했느냐는 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나아가 한마디 더 합니다.

"할 수만 있었다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15)." 눈물겨운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눈이 나빠서 늘 고민하던 것을 갈라디아 교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도 잘 읽을 수 없고 사람도 알아보지 못해 여러 모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야 눈 좀 나쁘면 대순가" "저분은 눈이 좋아야 하는데 내 눈을 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요즘같으면 개안수술이라도 해서 옮기겠지만 당시에는 불가능하지 않았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내 눈이라도 빼어줄 정도로 사도 바울을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그토록 사랑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그실 좀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눈을 빼주겠다고 한 점이 아니라, 사도 바울 편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그 열렬한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너희들은 눈이라도 빼어줄 만큼 나를 사랑했다'-받는 자 편에서 하는 말이기에 더욱 권위가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그렇습니다. 만일 아내가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 눈이라도 빼어주겠습니다"라고 남편한테 말했다고 합시다. 좀 위태위태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남편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당신은 나를 위해 평생을 바쳤어. 할 수만 있다면 눈이라도 빼어줄 거야' '내가 필요하다면 당장이라도 피를 뽑아줄 거야'한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굉장한 사랑으로 보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랑을 느끼면서 사십니까? 여러분의 남편이 눈을 빼어줄 것 같습니까? 어림도 없다고요? 주위에 있는 누가 나를 사랑하는 것 같습니까?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마음 그릇이 영 좋지 않은 사람입니다.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이라도 내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나를 위해 희생해줄 사람이 많습니다. 서로들 도우려고 애를 씁니다. 제가 지난번에 축농증 수술을 하러 병원에 갔더니 가까운 분들이 찾아와 혈액형을 묻습디다. 'B'형이라고 대답하니 수혈할 일이 있으면 피를 뽑아주겠다고들 합니다. 말만으로도 얼마나 고맙습니까? 피를 뽑아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눈이라도 빼어줄 사람들입니다. 내 주위 사람들이 모두 이처럼 나를 위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 그 사랑 받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만한 사랑을 받고 삽니다. 우리를 위하여 희생을 감수할 사람들이 주위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들이는 그 마음, 사도 바울의 그 마음이 귀한 것입니다.

값진 마음입니다. 간혹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전혀 받지 못하는 것처럼 고독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병든 사람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틀림없이 사랑받고 있습니다. 단지 받아들이는 마음이 부족해서 불행하고 고독하고 절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마음은 높이 평가되어야 합니다. 저에게 목사 안수를 받는 교역자들에게 권고의 말을 하라고 하면 꼭 이 말을 합니다. "앞으로 목회할 때, 스스로 고독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교인들로부터 사랑 받고 있다고 믿는 마음을 가지고 살라. 그들이 나를 위해서라면 눈이라도 빼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낙심하지 않고 약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여러분, 참사랑이 무엇입니까? 결정적인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믿음을 시험할만한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물을 다 덮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어떠한 허물이라도 다 덮어 가는 것이 귀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눈을 빼어줄 만큼 사랑했는데 어째서 지금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믿음을 버리고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사도 바울은 참스승과 거짓스승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참스승이란 본디 성숙한 스승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거짓스승이 더 열심인 듯이 보이기 쉽습니다. 거짓스승은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제자를 삼고 있기 때문이요,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이득을 위해서 수고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짜요, 참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참스승은 내 제자를 삼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는 것이요, 나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에 보면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1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최종 목적이 무엇입니까? 최종 목적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너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나는 해산의 수고를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수고 중에 가장 큰 수고가 해산의 수고입니다. 고생을 하고, 아픔을 겪고, 정성을 들이고, 극진히 사랑하여 다시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바른 신앙을 길잡도록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해산의 수고가 없으면 생명이 탄생하지 못합니다. 해산의 수고는 오늘도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있던 귀한 은혜가 우리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다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의 사랑하는 자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 아름답고 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성경 66권이 모두 귀한 말씀이지만, 그 중에서도 저마다 나름으로 은혜 받고 사랑하는 본문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언제나 다른 본문에 비해 더 애착이 가고 내게 은혜를 주며 큰 힘을 주는 말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 역시 제가 가장 사랑하는 말씀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늘 마음속에 새기면서 위로 받고 은혜 받는 귀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411절에 이르기까지 율법주의에 치우친 신앙인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해왔습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기로 하고 출발하여 세례를 받고 마침내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유혹에 빠져 율법주의자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율법주의자가 되어 그만 율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그 큰 감격과 은혜는 다 사라지고 율법주의자의 전형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아는 사도 바울은 잘못된 신앙을 교정하기 위하여 저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이며 변증적으로, 또 지극히 신학적인 방법으로 그것이 왜 잘못되었나를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은혜가 무엇이며 율법이 무엇인가, 율법주의자의 삶이 무엇이며 은혜에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덧붙여 은혜로 율법을 극복하는 방법과 십자가의 의미도 설명합니다. 이를 신학적이며 실제적인 경험 안에서 예를 들어가면서 조목조목 이야기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 스타일이 전혀 다릅니다. 이성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감성적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득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애정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애정을 저들에게 드러냅니다.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사랑하지 않느냐'-사랑을 가지고 저들에게 호소합니다. 그런가하면 '옛날에는 너희들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느냐'-그런데 어느 사이에 이렇게 변하게 되었느냐고 그 옛날 사랑하던 때를 추억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바른 신앙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충고를 하려면 변론보다는 역시 감정에 호소하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딱딱한 훈계보다는 어머니의 눈물이 효력이 있지 않습니까? 열심히 잔소리를 늘어놔봐야 별효과가 없습니다. 오히려 어머니의 눈물 한방울이 더 호소력을 지닙니다.

우리는 때로 너무 많은 변론을 늘어놓습니다.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당신이 잘못했다 내가 잘했다고 서로들 말이 많습니다. 누가 잘못했는지 모릅니까? 누가 잘못된 길로 가는지 모릅니까? 고치기가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그럴진대 이제 와서 새삼 아픈 데를 들춘다고 하여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상대방을 정말로 사랑하여 잘못한 것들을 고치려고 한다면 이론이나 변론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논리적으로 설명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지적으로 사고를 돌려놓는 길만이 길이 아니라, 가슴부터 돌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뜻이 돌아갑니다. 본문은 그 마음을 움직이기 위하여 애정에 호소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이제 본문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먼저 12절의 말씀,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으니 너희도 나처럼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성육신의 교리를 한번 상고해보기로 합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오셨습니다. 어느 유명한 신학자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오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오셨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애정의 제1호가 이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표현, 그 첫째는 '내가 너와 같이 되었다'-희생입니다. 어떠한 희생이겠습니까? 물질을 주는 것, 지식을 주는 것이 희생이 아닙니다. 큰사랑이 아닙니다. 큰사랑은 명예를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위하여 나의 명예를 버립니다. 또한 그보다 더 큰사랑은 본문에서와 같이 나의 존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나의 나됨을 희생합니다. 얼마나 큰 일인지 모릅니다. 내가 너와 같이 되었다-높은 자가 낮아지고 아는 자가 모르는 자가 되는 일입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인데 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없는 척하는 게 아니라 아주 없는 사람이 됩니다. 알고도 모르는 체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위하여 나를 얼마나 바칩니까? 내가 너와 같이 되었다-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가정에 어린아이가 하나 있으면 집안식구가 모두 어린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진지 잡수세요'라는 말도 모르고 '식사하세요'라는 말도 모릅니다. 아는 말이라곤 오직 '맘마'뿐입니다. 집안식구들을 향해서 "맘마, 맘마"하고 소리칩니다. 다 어린아이가 되었습니다. 그 어린아이로 하여금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어린아이의 말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어린아이가 되어야 집안이 천국이 됩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사랑함으로 스스로 어린아이가 된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방바닥을 벌벌기면서 등말을 태워줍니다. 그 체면에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상투를 쥐고 흔들어도 '허허' 좋기만 합니다. 어른이 어린아이가 되었어요. 그 순간에는 잘하는 일이고 잘못하는 일이고, 체면이 어떻고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상대방과 같아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사람이다' '나는 율법을 가진 사람이다' - 그러나 이방인처럼, 율법이 없는 사람처럼 너희와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같이 됨으로 받게 되는 모든 비난과 역경을 묵묵히 참아 견디어내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으니 이제 너희도 나와 같이 되는 것이 옳지 않느냐?' '내 뜻을 알고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이러한 말씀입니다. 이는 가장 온전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귀한 사랑은 내가 얼마만큼 나를 버리고 상대방과 같아졌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다시 옛날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옛날에 나를 얼마나 사랑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14절의 말씀에서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사도 바울을 영접할 때에 이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과연 그럴만한 인물이었습니까?-잘 생각해보십시다. 예수처럼 훌륭하게 보였습니까? 훤하게 보이는 인물이었습니까?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또 지식에서 그처럼 흠 하나 없이 완벽한 사람입니까? 큰 능력이나 이적을 행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본문의 중요한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적을 행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굉장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흠도 있고 약점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와 같이 영접했다는 사실은 오로지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하면 인내합니다. 저는 사랑의 척도로 먼저 인내를 꼽고 싶습니다. 몇 시간이나 참아줄 수 있는가를 보면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됩니다. 짓궂은 청년들은 이렇게 한다고 합니다. 상대의 사랑을 시험하기 위하여 "몇 시에 만나자"고 약속해놓고는 일부러 30분쯤 늦게 나갑니다. 그때 가서 불평을 하는가 안 하는가를 보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사람을 세워놓고 시간을 안 지키면 어떡하느냐." 울상이 되어 투덜거리면 '이여자는 어렵겠다'고 생각하고 교제를 그만둔다고 합니다. 반면 "그럴 수도 있지요. 워낙 차 타기가 힘드니까." 이정도면 '괜찮은 여자다'하여 오케이한답니다.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런 젊은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기다려줄 수 있습니까? 불평 없이 기다릴 수 있는 정도가 얼마만큼입니까? 가만히 보면 내 실수는 생각지 않고 남의 실수만 열심으로 비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힘든 사람입니다. 똑똑한 것도 별로 반갑지 않습니다. 오히려 좀 모자란 듯싶은 쪽이 훨씬 좋습니다. 상대방을 위하여 얼마나 인내할 수 있는가, 시간적으로 질적으로 얼마나 참을 수 있는가-인내입니다. 사랑에서는 인내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또한 사랑은 이해입니다. 상대방의 모든 점을 내 편이 아닌 그의 편에서 이해합니다. 그 사람의 결점과 실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이해(understanding)의 깊이-이 깊이가 사랑의 척도가 됩니다. 남자는 여자를 여자로서 그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자가 화장대 앞에 앉아 아름답게 보이려고 열심히 얼굴을 매만지고 있습니다. 남자가 그 주위를 빙빙 돌다가 고작 한다는 소리가 "알뜰히 매만져봐야 당신은 별 볼일 없어"였다고 합시다. 이런 남자는 여자하고 같이 살 자격이 없습니다. 같이 살 필요 없으니 내쫓으십시오. 여자에게 아름다움은 가히 절대적인 이슈입니다. 호박꽃이든 장미꽃이든 아름답게 가꾸어보려는 것이 여자의 심리입니다. "최대한으로 예쁘게 해보라"하고 격려해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실제로 이런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어머니가 열심히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첫째아들이 "어머니는 이제 나이가 많아서 아무리 해도 예쁘지 않아요"라고 말했답니다. 이를 들은 둘째아들이 형에게 반박합니다. "아니야. 아직도 우리 어머니는 예쁘단말야." 옆에서 아버지가 듣고 있자니 기분이 나쁩니다. ", 이놈들아. 어머니 보고 예쁘다 안 예쁘다가 무슨 소리냐"-이렇게 한마디했습니다. 그랬더니 셋째아들이 나섭니다. "그것봐, 남의 여자한테 왜 시비를 하냐?"-네 마누라도 아닌데 예쁘다 안 예쁘다 시비할 것이 뭐 있느냐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있지만 옳은 이야기입니다. 여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아름답고자 하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남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자존심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남자의 자존심을 꺾어서 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일단 자존심을 보장해놓고 이야기하십시오. 명예와 자존심을 짓밟으면서 사랑 받으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천하에 없는 미인이어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음식을 잘 만들고 서비스를 잘한다 해도 자존심을 지켜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남자를 잘 조정하려면 먼저 자존심과 명예를 높여주어야 합니다. 확실하게 보장한 다음에는 모두 내 마음대로 입니다. 다 가져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자존심을 짓밟아보십시오. 죽은 사람이나 같습니다. 남자를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이해하는 데에 있음을 잊지 맙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이 상대방의 허물까지 덮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극대화해주고, 상대방이 부끄럽게 생각하여 감추려고 하는 것은 몇 겹으로라도 감싸주라'-바로 사랑입니다. 남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는 것은 악취미요, 살인행위입니다. 감추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아픈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꾸 건드립니다. 마음을 아프게 하고 눈물나게 만듭니다. 잘못되었습니다. 끝까지 덮어주고 감싸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사도 바울은 본문 가운데에 삽입적인 말씀을 기록해놓았습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13)"-신중한 말씀입니다. 약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약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디 아스데네이안'-영어로는 'because of the weakness'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했다-이해가 가십니까? 이론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이해해야 할 문제입니다. 실제로 내가 건강할 때에 복음을 전했는지 병들어 있을 때에 복음을 전했는지 생각해봅시다. 예수 믿으라고 진정으로 권한 것이 어떤 때였습니까? 어떤 사람은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옆에 있는 환자에게 난생처음으로 예수 믿으라 했답니다. 감옥 안에서 해보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건강하고 만사가 형통하게 이루어질 때에 자행자지(自行自止)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병들어 약해졌을 때에, 또 환란을 당하는 곤고한 날에 오히려 신실해지고 겸손해지고 사명이 순수해져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솔직하게도 자기의 이런 약점을 모두 고백합니다. 그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편지를 보면 이러한 이야기가 여러 곳에 나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를 입거나 저주받을 것이다'-실제적인 경험에서 한 말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9장에서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16)"라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 건강하고, 좀 게을리하면 어딘가가 쑤시고 아팠던 것 같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건강해서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마침 병들어 못가고 그곳에 머물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라리아병에 걸려서 못가고 머물러 있는 동안에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건강한 몸이 아니었습니다. 병들었기 때문에 머물렀고, 그래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웁니다. 그래서 '내가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라고 말하게 됩니다. 우리의 경험 속에서도 이런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참으로 귀한 간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7절에서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使者)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기적으로 두통을 앓았던 것 같습니다. 요즘같으면 아스피린으로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지만 당시는 심한 두통을 그대로 견디어내야 했습니다. 또한 눈이 어두웠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밝은 빛을 본 후로는 좀 나아졌지만 본디 안력이 좋지 않아서 잘 보지를 못했습니다. 성경을 기록할 때에도 대필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6 : 11)"하여 직접 쓰기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눈이 나빠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또한 말라리아병도 있었다고 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간질병이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옛날에는 간질병이 흔했습니다. 가끔씩 발작을 하게 되어 큰 어려움을 겪고는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14)"라고 말씀합니다. 다리가 좀 아프다고 해서 믿음에 시험들 것은 없습니다. 눈이 좀 어둡다고 해서 믿음에 병들 것까지도 없습니다. 믿음에 시험이 될만한 것, 그것이 간질병이라고 해야 이 말이 맞아떨어집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간질병을 마귀가 주는 병이라고 여겼습니다.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간질병 환자 자신들도 하나같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에 가까이 지내던 친구 하나가 자꾸 거품을 물고 쓰러져서 많이 도와준 기억이 있습니다. 깨어난 뒤에 물어보면 누가 빨간 보자기로 자신을 덮어씌운다는 것입니다. 안 쓰려고, 벗어나려고 허우적거리지만 결국 덮씌워져서 쓰러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생을 합니다. 사실이 그렇다기보다는 전해 내려오는 말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의 사람들은 그때마다 마귀가 빨간 보자기를 씌운다고들 생각했습니다.

간질병은 사도 바울에게 결정적인 약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자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큰 능력을 행하면서 돌아다녀야 하는데, 제 병조차 고치지 못하고 하물며 간질병을 지닌 채 있었으니 말이 됩니까? 충분히 믿음을 시험할만한 것이 됩니다. 그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믿음에 손해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시험할 만한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너희가 업신여기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충분히 업신여길만한 사건입니다. 한번 봅시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만 거품을 물고 쓰러졌습니다. 얼마나 괴롭습니까? 소문이 좍 돕니다. "아유, 그것 보니 시원찮은 사람이구나! 그래 가지고야 무슨 하나님의 종이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법도 합니다. 설교를 하다말고 쓰러졌으니 바울의 입장에서는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세 번이나 특별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다른 것은 괜찮지만 이것은 꼭 들어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전도를 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가 내 몸 안에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간질병 이야기가 나오면 꼭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오래전입니다마는 한참 더운 여름에 광주 제일교회에서 연합집회가 있었습니다. 둘쨋날인가 싶은데 제가 인도를 했습니다. 강대상에서 설교를 하는 도중에 앞에서부터 두 번째에 앉아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마구 흔듭디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좌중을 보니 앞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데 뒤쪽에 앉아 있던 다른 교회 사람들은 일어서서 소란을 떱니다. 간질이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듭디다. 그래서 "아무 일도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하고 진정을 시켜 모두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그 간질병 환자는 한번 소리를 지르고 나더니 픽 쓰러져서 거품을 뿜으며 땀범벅이 되어 땅바닥을 마구 뒹굽니다. 그리고 나서 한 20분 가량 자고 나더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온몸에 땀이 비오듯 흐르는데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가만히 의자에 엎드려 있다가 예배가 끝나기 무섭게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장로님으로 연합집회의 회계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후 며칠 동안은 교회에 못나옵디다. 연합집회를 마치고 광주를 떠날 때에 그분이 비행장에 나오셨습니다. 제 손을 꼭 잡고는 "목사님, 소란을 떨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하고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괘념 마십시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위로를 하고 비행기에 올라 서울로 돌아오는데, 내내 사도 바울을 생각했습니다. 갈라디아교회에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예배드리는 동안 앉아 있다가 쓰러진 것도 이러한데 사도 바울은 설교하다가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몸둘 바를 모르며 죄송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는 우선 건강하고 봐야 하겠습니다. 목회자들도 병들고 어려움을 많이 당합니다마는 그것이 모두 시험이 됩니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웬만하면 병을 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앓아도 골라가면서 앓아야 되겠습니다. 이를테면 '신경성'이라는 말이 붙은 병은 도대체 은혜가 안됩니다. "목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 믿기에 그 모양이야." 이렇게 되면 어렵습니다. 마음의 근심을 이기지 못해서 생긴 병이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병도 골라가면서 앓아야 하는 사람이 바로 목회자요 예수 믿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를 업신여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아니하며 오직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합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올시다. 인정 많은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점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너희들이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왜 마음이 변했느냐는 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나아가 한마디 더 합니다.

"할 수만 있었다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15)." 눈물겨운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눈이 나빠서 늘 고민하던 것을 갈라디아 교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도 잘 읽을 수 없고 사람도 알아보지 못해 여러 모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야 눈 좀 나쁘면 대순가" "저분은 눈이 좋아야 하는데 내 눈을 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요즘같으면 개안수술이라도 해서 옮기겠지만 당시에는 불가능하지 않았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내 눈이라도 빼어줄 정도로 사도 바울을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그토록 사랑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그실 좀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눈을 빼주겠다고 한 점이 아니라, 사도 바울 편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그 열렬한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너희들은 눈이라도 빼어줄 만큼 나를 사랑했다'-받는 자 편에서 하는 말이기에 더욱 권위가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그렇습니다. 만일 아내가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 눈이라도 빼어주겠습니다"라고 남편한테 말했다고 합시다. 좀 위태위태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남편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당신은 나를 위해 평생을 바쳤어. 할 수만 있다면 눈이라도 빼어줄 거야' '내가 필요하다면 당장이라도 피를 뽑아줄 거야'한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굉장한 사랑으로 보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랑을 느끼면서 사십니까? 여러분의 남편이 눈을 빼어줄 것 같습니까? 어림도 없다고요? 주위에 있는 누가 나를 사랑하는 것 같습니까?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마음 그릇이 영 좋지 않은 사람입니다.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이라도 내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나를 위해 희생해줄 사람이 많습니다. 서로들 도우려고 애를 씁니다. 제가 지난번에 축농증 수술을 하러 병원에 갔더니 가까운 분들이 찾아와 혈액형을 묻습디다. 'B'형이라고 대답하니 수혈할 일이 있으면 피를 뽑아주겠다고들 합니다. 말만으로도 얼마나 고맙습니까? 피를 뽑아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눈이라도 빼어줄 사람들입니다. 내 주위 사람들이 모두 이처럼 나를 위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 그 사랑 받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만한 사랑을 받고 삽니다. 우리를 위하여 희생을 감수할 사람들이 주위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들이는 그 마음, 사도 바울의 그 마음이 귀한 것입니다.

값진 마음입니다. 간혹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전혀 받지 못하는 것처럼 고독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병든 사람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틀림없이 사랑받고 있습니다. 단지 받아들이는 마음이 부족해서 불행하고 고독하고 절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마음은 높이 평가되어야 합니다. 저에게 목사 안수를 받는 교역자들에게 권고의 말을 하라고 하면 꼭 이 말을 합니다. "앞으로 목회할 때, 스스로 고독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교인들로부터 사랑 받고 있다고 믿는 마음을 가지고 살라. 그들이 나를 위해서라면 눈이라도 빼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낙심하지 않고 약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여러분, 참사랑이 무엇입니까? 결정적인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믿음을 시험할만한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물을 다 덮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어떠한 허물이라도 다 덮어 가는 것이 귀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눈을 빼어줄 만큼 사랑했는데 어째서 지금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믿음을 버리고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사도 바울은 참스승과 거짓스승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참스승이란 본디 성숙한 스승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거짓스승이 더 열심인 듯이 보이기 쉽습니다. 거짓스승은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제자를 삼고 있기 때문이요,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이득을 위해서 수고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짜요, 참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참스승은 내 제자를 삼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는 것이요, 나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에 보면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1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최종 목적이 무엇입니까? 최종 목적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너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나는 해산의 수고를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수고 중에 가장 큰 수고가 해산의 수고입니다. 고생을 하고, 아픔을 겪고, 정성을 들이고, 극진히 사랑하여 다시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바른 신앙을 길잡도록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해산의 수고가 없으면 생명이 탄생하지 못합니다. 해산의 수고는 오늘도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있던 귀한 은혜가 우리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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