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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십자가의 예수(요 19:17-24)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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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예수(19:17-24)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쌔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이 본문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깊이 생각하는 기회가 되겠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모습은 가장 비참하고 보기 흉한 것으로서 사실 똑바로 보기란 매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가 오늘에 와서는 영광의 극치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분명히 십자가는 고통의 극치인데 오늘날은 영광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목걸이가 유행하고, 박물관에 있는 왕관에도, 명예로운 훈장에도 십자가가 새겨져 있음을 봅니다. 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많은 국가들의 국기에도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데, 그 국기를 가진 나라들이 하나같이 복지국가들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원래 십자가는 중한 형벌의 상징으로 보기 흉한 것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의미가 바꾸어져 아주 높은 것으로,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의미를 바꾸어 놓은 장본인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옛날부터 우리 나라에서 주로 사용하는 사형 방법으로는 사약을 내리거나, 교수형, 단두형, 혹은 총살형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방법에는 대단히 끔찍한 처형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만 인류학에서 보면 그 처형 방법에는 그 나름대로 에니미즘(物活說) 적인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 역시 처형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이 형벌은 중죄인에게 내리는 것으로 너무나 나쁜 죄인이기에 장례식조차 못하도록 시체를 바다 속으로 넣어 버리는 무서운 형입니다. 형벌 중에서도 가장 모질고 최고로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내리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잔인한 로마군인들(전쟁을 즐겨해서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잘 죽였음)의 세계에서도 십자가만은 이야기하지 말자고들 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황제가 식사할 때 누군가가 십자가 이야기를 했다가는 당장 끌어내어 매질을 했을 정도로 십자가는 끔찍스러운 것의 대명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한번 달리는 것을 본 사람은 평생 잊을 수가 없는 악몽으로 그 광경이 무섭고 비참했다는 것입니다. 이 처형법은 본래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나무에 매달아 놓고 죽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학적인 이유는, 땅은 원래 신성한 것으로써, 나쁜 죄인을 땅에다 놓고 죽이면 땅이 더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의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생각해 낸 것이 십자가형이니 이 이상 더 악하고 모진 처형 법은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공중에 매달은 시체는 치우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두어서 새들이 뜯어먹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방법입니다.

이런 십자가형을 로마 사람들이 도입하여 죄인들에게 적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로마나 이태리 안에서는 십자가형을 내린 적은 없습니다. 또한 로마 사람들에게도 절대로 십자가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의 노예나 식민지 사람에게만 내리는 최고의 형벌이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십자가형이 어떤 의미에서 내려졌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억울한 누명을 있는 대로 다 쓰고, 또한 약소 민족이었기에 무서운 십자가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로마 시민이라면 아무리 중죄인이라도 십자가형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단두형을 당했습니다. 노예나 식민지의 사람들에게만 내리는 십자가형을 예수님이 당하신 것을 보면, 약소 민족의 서러움까지 함께 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해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십자가 형틀을 죄인 자신이 메고 가는 것입니다. 죽을 곳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도 힘든데 무거운 십자가를 직접 지고 가는 고역이 더 보태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서서 자비를 베풀어 대신 지겠다고 하면, 그것은 허락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주스러운 십자가를 죄인 대신 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로 그런 예는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구레네 시몬이 동정으로 한 마디 했다가 뜻밖에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갑니다. 그 당시 시몬은 단순한 동정심 외에는 별로 다른 뜻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가 예수를 믿어서 십자가 진 것을 너무 감사하여 일생 동안 그 감격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시몬의 부인은 사도 바울의 믿음의 어머니가 되었고, 그의 두 아들인 알렉산더와 루포는 복음을 선포하는 훌륭한 선교사가 되었음은 로마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억지로 져도 괜찮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그 당시에는 의미를 몰라도 후에 잘했다고 깨닫게 됩니다. 봉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봉사는 원래 좋은 마음으로 해야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좋은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세월이 다 가버립니다. 그러므로, 조금 억지로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다 보면 나중에 참 잘했다는 깨달음이 오는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진 십자가가 본인에게는 물론 온 가족에게 축복이 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은 해골로서, 히브리말로는 골고다이며(19:17), 골고다가 라틴말로는 갈보리입니다.

가끔, 갈보리라는 말이 성경에 없는데, 왜 갈보리 언덕에 대한 찬송이 있느냐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태여 라틴말을 쓸 필요는 없지만, 가톨릭교회의 전통으로 갈보리라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아담의 해골이 이곳에 묻혔다는 설이 있어서, 해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말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장소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담이 묻힌 곳에서 제2아담인 예수께서 돌아가셨으니 사망을 물려 준 제1아담과는 달리 부활의 생명을 물려주시는 제2아담이므로, 장소적인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해골 곳은 성문 밖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드시 성 밖에서 처형을 한 것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시체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어 새들이 뜯어먹게 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유대 사람들의 전통으로는 시체를 그대로 두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체를 곧 장례한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에서 지금까지 십자가의 의미와 골고다에 관한 것을 생각했습니다.

다음은 예수님 좌우에 있던 강도에 대해 생각을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극단적인 죄인으로 몰기 위해, 즉 강도 같은 죄인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강도와 함께 못박았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의미입니다. 죄인 아닌 자를 죄인으로 죽일 때, 어찌해서라도 죄인의 모습으로 가장하기 위해서 좌우에 강도를 함께 못박은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나타난 또 하나의 사건은 명패에 대한 문제입니다.

십자가 바로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명패를 써서 붙였습니다. 이 복음에서는 특히 이 부분을 강조하며 말하기를, 헬라말과 로마말과 히브리말로 명패를 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9:20) 세 나라의 말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은 당시의 문화가 이 세 나라로 대표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사람이나 헬라 사람이나 히브리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썼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더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시킨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로 준비를 다 해 놓으시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역사가나 성경주석가들이 모두 중요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첫째, 로마 정치입니다. 그 당시 로마는 세계를 지배하여 그들의 정치력과 조직력, 행정력, 군사력 등이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 로마는 세계를 향해 길을 다 닦아 놓았습니다. 이제 이 질서와 행정과 도로를 통하여 복음이 전파됩니다. 특히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나 신분이 보장되어 쉽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로마의 정치라고 하는 대단한 제도와 질서를 먼저 만들어 놓으시고, 그것을 통해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단일민족이며 작은 나라이어서 잘 모릅니다만 인도나 중국 등 그 부근에 있는 나라들을 보면 같은 나라 안에서도 언어가 잘 통하지를 않습니다.

생활풍습의 차이가 아주 심해 서로 왕래조사 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그곳을 선교하기 위해서 언어들을 배워갑니다만 실제로 가 보면, 마을마다 언어가 달라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껏 복음을 전한다 해도 한 마을에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다음 마을은 또 다시 언어와 풍습을 배워야 하니 얼마나 세월이 걸리는 것입니까? 그런데, 로마 정치는 질서가 잘 되어 있으므로 여기서 복음을 전할 때는 온 세계에 그대로 퍼지는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둘째는, 헬라 언어요 헬라 철학입니다. 추상적인 깊은 진리를 말하는데는 철학적 언어가 필요했습니다. 예를 들어 500단어 이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 한다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래서 유치원 아이들이나 국민학교 1, 2학년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십자가의 이 중요한 진리를 어떻게 몇 마디의 말로 전하겠습니까? 그래서, 유치부 선생님들은 설교 시간에 말구유 이야기도 하고 십자가 이야기도 합니다만 결국에는 싸우지 마라,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원시적이고 단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런데, 헬라 철학, 헬라 언어, 헬라 문화는 세계적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의 원문이 헬라어입니다. 필자는 헬라어를 공부해 보았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만 대단히 좋은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니 그 뜻을 바로 전할 수 있었지 다른 언어로 기록되었더라면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헬라어는 논리적이고 체계적입니다. 이렇게 언어를 미리 준비해 놓으시고, 그리고 성경이 기록된 것입니다. 또한 헬라 사람들의 철학의 목적은 진미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히브리인들은 종교인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철두철미한 메시야 대망사상, 그리고 구약성경에 대한 지식 등이 다 준비되고 그 위에 복음이 전파됩니다. 다시 정리하면 로마의 정치, 헬라의 철학, 그리고 히브리 사람의 종교 위에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요구가 그리스도 안에서 충족되어 예수로 인하여 참된 왕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완전한 진미의 철학의 모든 요구가 복음에서 충족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고린도전서 1장에서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구하고 히브리 사람들은 표적을 구하는데, 지혜도 표적도 십자가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다"라고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도 철학도 복음 안에서 성취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도 여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명패에 대해 생각을 하겠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이유로 썼습니다. 여기서 빌라도는 정치인으로서 소인이며, 인격적으로 아주 졸렬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체면만 생각하는 전형적인 정치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정치하는 사람으로 유대인의 왕을 죽였다, 그러니 할 도리를 다했을 뿐이다"라는 뜻으로 그렇게 썼습니다. 기회주의적인 사람입니다. 정치보다 중요한 것이 도덕이요, 도덕보다 중요한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정치적인 생명만을 유지하기 위해, 오직 정치적인 이유로 죽였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이 명패를 붙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통할 리가 있습니까? 정치적으로는 옳았는지 몰라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고, 종교적으로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나이팅게일의 묘비에는 "애국심만 가지고는 모자랍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박애정신으로 전쟁 중에 이 나라, 저 나라 부상병들을 치료해 주었는데 그 일로 결국에는 간첩으로 몰려 죽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옳다고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애국심만 가지고는 나이팅게일의 수준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틀렸으면 틀린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한 가지 더 신앙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다 옳다 하고 법적으로 합리화되어 무죄라고 하더라도 빌라도는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정치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자기는 정치적으로 할 일을 다했노라고 발뺌을 합니다. 다른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심문을 끝내고 물에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27:24)고 말합니다. 이렇게 책임을 회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입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가 문제이지 정치적으로 정당화되었다고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음은,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항의를 합니다.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19 : 21)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언젠가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나이다" 하고 소리를 질렀던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떠들고 다니면 정신병자로 취급할 것이지 왜 십자가형으로 사람을 죽입니까? 유대인의 왕이니까 죽이는 것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자기 발뺌을 하기 위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 때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고 냉담하게 대답합니다. 이제 대제사장들은 함정에 빠졌습니다. 정말로 유대인의 왕을 못박았으니, 이제 예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백성들로부터 반민족주의자, 반국가주의자로 큰 비난을 받는 입장이 되어 자기들이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빠져들고 만 것입니다. 빌라도의 교활함과 악한 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는 어떤 변명이나 이유로써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그러한 죄인입니다.

다음은 군인들이 옷을 나누었습니다.(19ː23-24) 정말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원래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은 벌거벗겨서 때리고 능욕하고 그리고 못을 박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육체적인 아픔과 나아가서는 수치감까지 겹치는 몇 겹의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세상에 고통이 많지만 더러는 영광스러운 고통도 있습니다만 십자가는 수치와 부끄러운 고통이 더 첨가되어 있음을 중시해야 합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져야 할 부끄러움을 그가 당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십자가형 아래에서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찢어 나누었습니다. 겉옷은 나누어서 한 깃씩 갖고, 속옷은 통으로 짠 것이라 제비를 뽑았다고 하니 정말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자기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도무지 생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단지 명령으로 죽이라고 하니 죽인 것이어서 자기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러니 나도 그렇다는 것뿐입니다. 내가 빼앗겼으면 나도 남의 것을 빼앗고, 내가 속았으니 나도 남을 속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명령에 따라 움직였으니 잘못이 있다면 지휘관에게 있을 뿐, 우리는 돌아오는 이익만 챙기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시는 끔찍한 사건 앞에서 어떻게 그 옷을 자기가 차지하겠다고 제비를 뽑느냐 말입니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2차 대전 말기에 독일군이 온 세계를 점령하고 있을 때를 중심으로 엮은로베레 장군이라는 영화 속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치에 저항했던 많은 저항운동자들이 감옥에서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 그 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한 일도 없는 한 사람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처형당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되어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저항운동에는 관심도 없다. 그저 돌아다니며 장사한 것뿐인데 왜 나를 죽이는가"고 항의를 했습니다. 이 때 옆에 있던 저항운동자가 조용히 말하기를 "당신은 죽어 마땅하오. 수많은 사람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무참하게 피를 흘리며 싸우는데, 아무 일도 안했으니 그것이 큰 잘못이요"라고 대단히 인상적인 말을 했습니다. 조국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그것이 그를 죽게 해도 마땅한 그의 죄과입니다. 지금 로마 군인들은 의인이 죽어 가는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에게 돌아오는 옷깃 하나를 얻겠다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의냐 불의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교회가 어떠냐는 아랑곳없이, 단지 내게 돌아오는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기도의 내용도 "그저 복을 주십시오"라고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경우는 없습니까? 사람들의 극단적인 이기심 때문에 생기는 의에 대한 무감각이 큰 문제입니다. 그 당시 군인들은 용병들로서 원래 돈을 벌기 위해 군인이 된 사람들이라 괜찮다라고 말해야 합니까? 여기에 큰 죄가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이 사건에 대한 사도 요한의 해석입니다. 그는 시편 22 : 18을 인용하여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함이러라"(19 : 24)고 성경에서 해답을 얻습니다. 어떤 사건이든지 성경에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이런 억울하고 부조리한 사건을 무엇으로 풀이하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이미 예언한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함이다라고 해답을 얻고 만족해합니다. 이제 이 사건이 우리 자신들을 위한 것임을 다시 상기해야 합니다. 그는 참왕이요 참으로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 대신으로 부끄러움을 당하시어 그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수치를 당하셨고, 우리를 부하게 하기 위해 가난을 당하셨으며, 우리에게 나음을 주기 위해 어려운 고통까지도 감수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십자가 앞에서 어떤 자세이어야 합니까? 아직도 나만을 위하여 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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