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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마음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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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마음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사도 바울의 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간절한 사도적 심경, 로마교회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심경, 로마에 가고자 하는 그 간절한 열정,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가서 저들을 만나고자 하고, 또 만나면 무엇 무엇을 하겠으며, 특별히 저들을 위해서 기도했고, 지금도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렇듯 보고 싶은 마음, 기도하는 마음, 만나고 싶은 마음, 그리고 뭔가 주고 싶은 마음, 이 같은 사도적 심경이 오늘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의 마음은 언제나 복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오늘의 본문 가운데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 처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뭘 받고 싶다는 얘기 같은 것은 전혀 비추지 않고 있습니다. 나를 중심해서 내가 이롭고, 내가 받고, 내가 위로 받고, 내가 어떻게 하고이런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누구를 생각할 때에 그로부터 내가 무슨 이득을 얻을까, 하는 생각이 앞섭니다. 이것은 참 무서운 병입니다. 심지어는 악수를 할 때에도 이 사람과 악수를 하면 내게 이로울까 해로울까, 장사가 잘될까 안될까, 앞으로 출세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 안될까, 컴퓨터처럼 머리 속으로 재빠르게 계산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악수를 해요. 참으로 반갑지 않은 악수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의 관심이 지극히 자기 중심적입니다. 심지어 사랑한다는 말까지도 그렇습니다. 저 사람을 사랑하면 내게 무엇이 유익하나--이런 것에 먼저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그리스도가 먼저입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에 그는 꼭 두 가지를 의식합니다. 하나는 복음--그가 말씀하는 복음은 예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과 재림입니다. 아주 철저한 케뤼그마적 복음입니다. 또 하나는 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만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복음이 아니라, 꼭 전해야 하겠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그가 복음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바로미터입니다. 자기가 복음을 복음으로 믿고 있다면 절대로 혼자만 믿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자식이 되었으면 부모를 인도해야하고, 부모가 되었으면 자식을 인도해야지요.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생명적 진리가 얼마나 귀한 것인데 나 혼자 가지고 있겠습니까? 그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이 복음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신학적 확신이 바로 선교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마음입니다. 복음, 그리고 선교.

여러분, 최우선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또 관심의 깊은 데에 무엇이 있습니까? 지금 내 정신이 몽롱해 있다면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것 같습니까? 그것이 바로 내 관심입니다. 자나깨나 먼저 생각나는 것, 정말 꿈에라도 소원인 것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꿈을 꾸어도 복음에 대한 꿈을 꾸게 됩니다. 복음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 제가 아는 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해주었는데, 그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저는 "오히려 칭찬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차 사고가 나는 바람에 뇌를 다쳐 가지고 수술을 받았어요. 그런데 온전치 못해요. 반쯤 몽롱합니다. 그래 교회에 나와서 앉기는 앉았는데 그저 무슨 말을 들을 때마다 '할렐루야, 아멘'합니다. 어느 대목에 가서 해야 하는지 이게 박자가 맞아야 되겠는데 그저 아멘, 그저 할렐루야, 입니다. 하지만 조금 시끄럽기는 해도 정신없이 하는 말도 '할렐루야'라면 그 사람, 잘믿는 사람이 아니겠어요? 만일 그 반대로 욕지거리나 하고 있다면 정말 큰일이지요. 예배 도중에 시도 때도 없이 "할렐루야, 아멘"하는 말이 남에게 조금 방해되기는 해도 귀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왜요? 그 마음 속 깊은 곳에 바로 그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우리가 세상 떠날 때에 마지막으로 무슨 말이 나올 것 같습니까? 그것이 복음이어야 하고, 그것이 선교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궁극적 관심이니까요. 내 마음 깊은 곳에 뿌리박고, 심지어 잠재의식 깊은 곳까지 복음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복음적 인물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보면 "첫째는…… 감사함은(8)"이라고 말씀합니다. 첫째는 감사합니다. '프로포토 프로토스'라고 하는 이 말은 '먼저'라는 말이기도 하고 혹은 '무엇보다 먼저'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얘기입니다. 아무개, 하고 누구를 생각하는 순간에 먼저 감사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래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며,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한다'--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이것이 바울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생각할 때마다 분하고, 기도할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생각할 때에 맨 먼저 해야 할 것이 감사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먼저 불평부터 한다면 감사할 요소가 다 없어지고 맙니다. 먼저 감사하고, 이 감사를 극대화 해 나가느라면 불평이나 원망, 좀 부족한 것, 허다한 허물도 다 덮을 수 있습니다. '먼저 감사하노라'---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시각으로 보면 감사가 먼저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들으면 고마운 것뿐입니다. 이래도 고맙고, 저래도 고마운 것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감사합니다. 감사의 조건이 뭐냐, 그 내용은 믿음에 대한 감사입니다. 물질적으로 잘산다 못산다, 성공했다 실패했다, 정치적으로 안정이 있다 없다, 금년에 흉년이냐 풍년이냐, 그런 얘기가 결코 아닙니다. 바울은 오직 믿음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 점 또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습니까? 때로는 우리가 자녀들을 가르칠 때에 이래라 저래라 합니다마는, 자녀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어머니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부모가 믿어라 믿어라 하지만 믿음은 그저 얘기일 뿐이고 실제로 관심은 엉뚱한 데에, 다른 데에 있다는 얘기입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정말로 믿음, 믿음에 대한 감사, 이것뿐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세요. 믿음이 있고, 믿음이 자라고, 또 믿음이 훌륭하게, 건강하게 되어서 전파되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그 믿음의 사람들은 참 잘 믿는다더라, 하고 소문이 났어요. 그런고로 바울은 믿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요한삼서 4절에 보면 사도 요한은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내 자녀들이"--이것은 예수믿는 사람들을 말씀함입니다. 사도 요한은 나이가 많았어요. 그래, 믿음의 자녀들이 그저 믿음으로 살고 진리 안에 행한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을 통하여 어떤 소식을 듣습니까? 이런 일 저런 일, 그런 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잘 믿는다는 소식, 진리 안에 산다는 소식만으로 나는 더없이 기쁘다--이것이 바울의 마음입니다. 오직 믿음, 이것이 감사의 요소였습니다. 특별히 믿음의 자녀들을 보면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전파되고, 믿음이 널리널리 소문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은 이렇게 고백됩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9)"--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한다, 항상 기도한다, 쉬지 않고 기도한다 함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기도하는 것을 누가 보기나 했나요? 기도의 증인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내 기도를 들으셨으니까 하나님이 아세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로마사람들을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한다, 하나님이 그 증인이시다, 라고 말씀합니다. '기도하고 있다'--이보다 더 귀한 사랑의 고백은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미치게 사랑합니다, 화끈하게 사랑합니다. 해보았자 다 별것 아닙니다. 제일 귀한 사랑의 고백은 '내가 당신을 위하여 기도합니다'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저를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10년만에 뵙는 분도 저를 만나자마자 "목사님께 약속드린 대로 지금도 제가 기도할 때마다 꼭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합니다"합니다. 이럴 때면 제 마음은 더욱 뜨거워집니다. 아주 숙연해집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어요. 이런 분이 있어서 내가 오늘 역사하고 있구나, 이런 분이 있어서 내가 오늘 건강하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하나님만이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증인이 될 수가 없어요. 하나님만이 증인이십니다.

사무엘서에 보면 사무엘의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울이 크게 잘못했을 때에 이를 책망하면서 그를 위하여 한 말씀입니다. '내가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당신이 잘못했소, 그러나 당신을 위해서, 왕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계속 기도할 것을 약속합니다 함입니다.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여러분, 멀리 가 있는 친구가 있습니까?--'내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자녀들이 있습니까?--'내가 새벽에 나가서 너를 위해서 기도한다.' 어느 어느 시간에는 내가 당신을 위해서 꼭 기도합니다, 하는 이 말보다 더 귀한 사랑의 고백은 없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떤 분은 그런 얘기를 하십디다. 자기가 사우디도 가고, 월남도 가고, 주로 먼 나라에 다니는데, 예수 안 믿는 자기한테 아내가 편지할 때마다 늘 '내가 당신을 위해서 새벽에 기도합니다'라고 쓴답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자기가 무사할 것 같아서 든든하더랍니다. 결국은 그 분도 교회에 나오고 집사가 됩디다. ,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는 참으로 귀한 선물입니다. 눈앞에서도 아니고 멀리서 누가 나를 위하여 정성을 들이겠어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 앞에 나를 위해서 기도해준다니, 그것도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한다니 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로마 사랑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면 이렇게 멀리서만 기도하고 사랑을 고백만 하고 있는 바울이 아닙니다.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10)"--이것은 좀더 적극적인 것입니다. 멀리서 그저 사랑하고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보고 싶다는 것이에요. 칼 바르트의 유명한 '사랑론'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간단해요. 첫 번째는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있어서 늘 생각이 나고 그리운, 이것이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마주 보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만나면 영 보기 싫어서 고개 숙이고 있다면 안되는 거예요. 눈과 눈이 마주쳐야 합니다. 나는 저 사람을 보는데 저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본다면 이것은 짝사랑입니다. 괴로운 거예요. , 아기가 젖을 빨면서 엄마를 쳐다봅니다. 엄마 또한 아기를 내려다봅니다. 눈 속에 서로가 들어 있어요. 아기와 어머니가 서로 마주 보는 관계--이 얼마나 귀한 사랑입니까?

여기에는 긴말이 필요없어요. 마주 보는 것, 그러니까 가서 보고 싶은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멀리서 그리워하는 것과는 달라요. 가서 보는 거예요. 세 번째는 다 주는 것입니다. 주고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더 주고 싶은 것입니다. 다 주고 싶은 것입니다. 명예고, 재산이고, 물질이고, 생명이고 가릴 것 없어요. 뭐든지 다 주고 싶어요. 주는 것 그 자체가 기쁨입니다. 무슨 보상이 있느냐고 묻지 않아요. 보상에 관심없고, 주는 것 그 자체가 기쁨인,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미 준 것까지 아깝고, 지금까지 한평생 같이 살아준 것도 분하고 원통해서 못살겠다면 그것이 사랑입니까? 사랑이 없으니까 괴로운 거예요. 사실 이것은 물리적인 문제도 아닙니다. 사랑하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변질되고 마니까 여러 가지 불행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괴로움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그는 멀리서 그리워하고만 있지 않아요. 보고 싶어합니다. 얼굴과 얼굴을, 꼭 마주 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는 '좋은 길을 얻어서 너희를 꼭 보고 싶다'하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행동적인 것이고, 적극적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은 보고 싶은 것만이 아니라, 또 주고 싶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바울은 자기 임의로 로마에 갈 수도 있어요. 지금 우리네처럼 38선이나 철의 장막으로 가로막혀 있는 게 아니에요. 배타고 가면 되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렇게 무리하게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추상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 하나님의 뜻에는 추상적 의미가 있고, 구체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추상적 의미로 말하면 진리와 사랑과 공의와 긍휼과 자비와 양선과 용서와 희생…… 이런 것이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까? 오늘 가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주어야 합니까 주지 말아야 합니까, 죽어야 합니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신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께 생명을 바쳤어요. 그러나 내일 아침에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고 그 구체적인 뜻에 대해서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사람하고 결혼할까요 말까요, 참을까요 참지 말까요, 밀어붙일까요 아니면 그만둘까요?--구체적인 문제에 우리가 시달립니다.

지금 바울은 생각합니다. 얼마든지 로마에 갈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지금 당장 할 일이 있어요. 예루살렘에 들렀다가 가야겠어요. 거기서 혹은 순교할는지도 몰라요. 그래도 좋다, 우선 이것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바울은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절대로 무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억지를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한 가지 얻기 위해서 열 가지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순리대로 하는 데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도 가만히 보면 순리를 어기려고 해요. 방법과 수단을가리지 않아요. 한 가지 얻으면서 열 가지를 잃어버리고 있어요. 그래도 좋다고 밀어붙여요.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 점을 잊지 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얼마든지 자기 임의로 로마에 갈 수 있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 동안에 여러 교회를 세우고, 그곳에서 모금해놓은 구제금을 복음과 기도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서 전달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달하려고 합니다. 이런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이 먼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셔서 순리대로 로마로 가게 하시면, 그 때에 로마에서 만나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절대 무리한다던가 억지로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바울의 순리적 신앙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1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제 그가 로마에 가려고 하는 목적을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무슨 새로운 일이 있기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저들을 견고케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미 믿었지만 보다 더 확실한 믿음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좀더 신학적으로 말하면 저들의 신앙이 이제 신학화되기를 바랍니다. 우선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이방인의 문화 속에서 여러 가지로 부딪히는 문제가 많아요. 이것들을 다 해결해줌으로써 저들이 견고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확실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지식이 부족하고, 자기가 하고 있는 생활, 주변의 문화적 상황을 신학화하지 못할 때, 성서적으로 바로 설명할 수 없을 때에 그 신앙은 견고하지 못해요. 이렇기 때문에 이 사람이 이렇다고 하면 이 사람의 말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이 저렇다고 하면 그게 또 옳은 것 같아요. 흔들흔들합니다. 믿음이 견고해지려면 이것이 성서적으로 입증되어야 하고, 자기가 가진 철학적 지식으로 합리화되어야 하고, 신학적으로 확실하게 설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튼튼하고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서 그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준다--은혜는 동일합니다, 은사는 다양합니다. 은혜는 절대적입니다, 은사는 상대적입니다. 은혜는 구원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은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이같은 확실한 신학적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은사'--'카리스마 후리마티코스'라고 하는 이 말은 신령한 선물, spiritual gift입니다. 은사는 다양합니다. 바울은 지금 이것을 생각하면서 내게 주신 은사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에게 주시는 은사가 있고, 내게 주신 은사가 있어요. 그래서 은사를 서로 교환해야 합니다. 서로 sharing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받고 나가서 행하는 은사를 받았어요. 어떤 사람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어요. 이렇게 받은 은사가 각각으로 있어요. 내 은사도 소중하지만 다른 사람의 은사도 깊이 인정하고,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돈버는 은사가 주어졌기에 열심히 돈을 많이 벌어서 그것을 가지고 역사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이 많아서 지식으로 역사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 두 가지를 다 가지려고 하면 안됩니다. 두 가지 다 가질 수도 없어요. 이제 바울이 생각합니다. 내게 주신 특별한 은사를 나누어주고자 그가 로마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sharing하겠다는 것뿐입니다. '내가 특별하니까 너희들은 내 말을 들으라, 반드시 내 말만 들어야 한다'고 하향적으로, 독단적으로 임하는 게 아닙니다. 너희들에게도 은사가 있고 내게도 은사가 있다, 나는 다만 내가 받은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주려고 한다 함입니다. 얼마나 겸손하고 합리적인 얘기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2절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피차 안위함"--each other, 서로서로 안위함을 얻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참 귀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안위를 얻고, 저들은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으면서 안위를 얻자는 것입니다. give and take입니다. 또 교학상장(敎學相獎)입니다. 이 말은 영어로 learning by teaching,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배우는 거예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녀를 통하여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학생을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제가 한 30여 년 동안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하는데 어떤 때에는 '나이도 들었으니 이제는 좀 그만둘까'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학교에 나가 가르치는 이유는 배우는 게 많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제가 배우는 게 오히려 더 많아요.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보세요.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바울의 마음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가서 이제 가르침으로 피차 안위를 얻고자 한다.'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리는 영국 성서공회 신부의 아들입니다. 목사의 아들이고, 자신도 목사였지만 늘 나약했어요. 큰 결심을 한 바 있어 미국 조지아주에 선교사로 갔었습니다마는 별로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또다시 선교사로 가고자 할 때에 그는 비욜로라는 모라비안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웨슬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제가 미국의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이렇듯 나 자신이 너무 나약하고 확신이 없으니 어느 누가 믿을는지 걱정입니다." 그러자 모라비안 선교사는 이렇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 믿음을 얻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시오. 믿음이 있으면 그 있는 것으로 전하십시오." 이 말이 웨슬리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확신을 기다려서 복음을 전하려 한다면 죽을 때까지 기다려도 한마디도 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아직도 좀 부족하더라도 열심히 전해보세요. 믿음이 생깁니다. 엄청난 믿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담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전하고 봉사하세요. 믿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들에게 가서 가르침으로 안위함을 얻으려 한다고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13)"--바울은 이방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저들이 열매 맺는 것을 보았습니다. 회개하는 것을 보았어요. 중생 하는 것을 보았어요. 우상 버리는 것을 보았어요. 전도하는 것을 보았어요. 심지어는 순교하는 것도 보았어요. 자신이 복음을 전함으로써 복음의 열매가 줄줄이 맺어지고, 기쁨과 승리생활을 하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복음의 열매가 아주 희한하게 맺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열매가 너희들에게도 있기를 원한다, 길이 막혔으나 내가 꼭 갈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면 반드시 로마에서 만나리라, 하고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바울이 이렇듯 안타깝게 로마에 가려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신학이 따로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사람이면서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고,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질 때에 어떤 문제에 부딪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방의 종교문화, 아주 복잡한 그 문제에 부딪힐 때에는 문화적 갈등을 일으킵니다. 이것을 해소 해주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가 없어요. 이런 사명이 자신에게 있다고 바울은 생각합니다.

또 하나, 로마의 예수 믿는 사람의 상당 부분이 유대사람입니다. 로마에 가 있는 유대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사람들이 지금 점차로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이제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 믿는 이 이방인들이 예수 믿는 저 유대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우리가 누누이 보아오지 않았습니까? 유대사람들은 저들 특유의 귀족적 신앙이 있어요. 선민적 신앙이 있어요. 그래서 이것 때문에 갈등을 일으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문제에 부딪힐 것을 미리 알고 있습니다. 율법과 그 의식 문제, 할례 문제…… 바울이 지금 이 자리에서 누누이 열거하지 않지만, 이런 많은 복잡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습니다. 안 봐도 압니다. 그런고로 바울에게는 그 나름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요, 이방인의 신학자요, 이방신학의 주도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방신학의 창시자입니다. 그는 로마에 가서 '로마사람으로서, 이방인으로서, 특별히 노예나 노예 출신들로서 예수 믿을 때에는 이렇게 이렇게 믿는 것이다. 유대사람들, 저들이 하는 말은 듣지 말아라. 유대사람은 유대사람으로 믿는 것이요, 노예는 노예로 예수믿는 것이다'--이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방적인, 이방인의 신학화 작업입니다. 이것이 꼭 필요합니다. 이것은 바울만이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받은 은사요,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가고 싶은 것입니다. 다른 이방인 중에서도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었는데 결국 내가 가서 설명을 잘 함으로써 그들이 훌륭한 열매를 맺었느니라, 너희에게도 같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찾아가서 내게 주신 은사를 나누어줌으로써 너희가 견고하고도 확실한 믿음의 사람이 될 것을 바란다, 그것을 위해서 내가 가고 싶어하노라--바울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누구를 위한 마음입니까? 그리스도를 위한 마음이요, 또한 로마사람들이 아주 확실하게 믿고, 분명하게 신앙 생활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런 간절한 마음, 이런 선교적 정열이 지금 바울로 하여금 이와 같이 로마에 가고 싶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복음을 전하고 내가 복음을 믿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믿을 때에 혹 어떤 cultural shock, 문화적 충격이라든가 어떤 환경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지 않을까, 그러면 그것을 내가 잘 설명해 주어서 그 장애물을 다 거두어주고 순수한 마음으로 확실하게 예수 믿도록 도와야겠다, 하고 다른 사람 잘 믿게 하기 위해서 애쓰는 간절한 마음이, 그 바울의 마음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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