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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본을 보인 사람(사도행전 21:1~16)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 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상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이 여러 날 후에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새 가이사라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
지금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해 마지막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에서 만나 길게 길게 당부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과 이별한 후에 예루살렘을 향해서 배를 타고 가는데, 그 도중에 섬이나 혹은 항구에 잠깐잠깐 머물러 가는 노정이 오늘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13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만큼 굳게 결심하고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에도 적어도 이만한 각오는 되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목숨은 하나뿐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에는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언제나 반신반의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확신이 없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럴까 저럴까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에게 재미있는 격언이 있습니다. "갈까 말까 하는 길은 가지 말고, 만날까 말까 하는 사람은 만나지 말고, 먹을까 말까 하는 음식은 먹지 말아라. 그러나 죽을까 말까 할 때에는 죽어라." 매우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어쨌든 이럴까 저럴까 하며 결정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은 결정이 미리 있고 난 다음에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성도의 행위는 더욱 그렇습니다. 아무런 결정이 없이 그저 형편대로 가면서 당하는 대로 버티고, 이러구러 살아가는 것은 인간답지도 못하고, 인격자답지도 못합니다. 더우기 신앙의 길이 아닙니다. 항상 끌려가는 모습이니까요. 그것은 어떤 상황에 노예가 되어서 끌려가고 있는 것일 뿐이지, 내가 사는 게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결심하고, 여기에 '이것을 하다가 이대로 죽어도 좋다'하는 마음을 가지고 온 정성, 전력, 전 생명을 다 바치며 살아야 합니다. 실패란 무엇입니까? 결국은 이렇게 바칠만한 가치가 없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할만한 일이 못되는 것을 하다가 이제 세월 다 지나간 다음에 와서 잘못 살았다,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내 인생 되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게 바로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순간순간, 어느 때에든지, 젊었을 때에든지 어렸을 때에든지 늙었을 때에든지 어떤 사건에 접했든지 간에 '이것 위해서 죽을 각오가 있다' 하는 확신을 가지고 전력투구하는 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점에서 위대한 것입니다.
자,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는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설명했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에는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는 이 사건을 놓고 바울은 '확실히 이것은 신앙의 길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자기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신앙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믿음, 즉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이 길이 바른 길이라는 것, 또 복음전파 하는 사명에 있어서 이 길이 옳은 길이라는 것, 자기가 복음전파 하는 이것이 자기의 목적이라는 것-그는 갈라디아서 1장에서 자기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노라고 말씀합니다.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것이 자기 존재의 목적이요,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존재론적인 생각입니다. 이렇게 복음 전하는 사람으로 사는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것은 복음 전하는 내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일이다, 이것이 합당한 길이다, 라고 바울은 믿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을 보십시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나의 달려갈 길, 주 예수로부터 받은 사명, 이것을 감당함에 있어서 이번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옳은 일이다, 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인된 아가페 실천의 일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데, 바울은 예루살렘의 형편을 자기가 알기 때문에 이번에 예루살렘으로 구제금을 가지고 가는 것은 그리스도인 되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특별히 바울 자기 나름의 신학적 입장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일을 마치려 함에 있어서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보다 이 일은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 일이 내가 죽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는 이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쉽습니다. 그런 것은 누구나 한번쯤 생각하는 것이요, 어쩌면 일생을 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이 사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는 이 사건을 놓고,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내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에 합치되는 일이냐, 혹은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는 데 있어서 동일선상에 있는 사건이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부딪힙니다. 사랑을 합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게 사랑하는 것입니까? 주어야 하나, 주지 말아야 하나? 만나야 하나, 만나지 말아야 하나? 가야 하나, 가지 말아야 하나?-구체적인 문제에서 우리는 흔들리기 일쑤입니다. 사랑한다는 마음도 좋아요, 충성이라는 말도 좋아요, 진실도 좋아요, 믿음도 좋아요, 그런데 그것의 현실적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결혼을 했어요. 결혼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리고 몇십 년을 더불어 살았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아무래도 결혼 잘못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보다, 합니다. 얼마나 기막힌 노릇입니까? 자기와 일생을 살아온 배우자와의 관계가 아직도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하는 해답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고 보니 얼마나 힘겹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는 확신만 섰다면 핍박이 좀 있더라도, 고통이 좀 있더라도 문제가 안됩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는고 하니, 처음부터 신앙적으로 맺은 결혼이 아니었거든요. 불신앙적인 구석이 너무 많았거든요. 그래서 그 많은 세월을 살아왔지만 아직도 해답이 안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라든가, 하나님의 의라든가 하는 말은 쉽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생각하려고 할 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의 사람은 자기가 처한 처지 이대로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고민하신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겟세마네 기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피하시자 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가 무섭다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오직 하나, 내일 아침 이렇게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그것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 후에 받은 응답이 무엇입니까? 내일 아침 빌라도 법정에 나가서 재판을 받고 골고다 언덕에서 죽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아버지께서 십자가라는 이 잔을 오늘 내게 주시는 것이다, 십자가라고 하는 이 엄청난 현실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가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실히 믿고, 그 응답을 받고 돌아와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 신앙의 구체적 현실성이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바울이 굳게 결심을 하고 여행을 떠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니까 내용적으로 크게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가 두로에서, 하나가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먼저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3, 4절)"라고 합니다. 항해하면서 배에다 물도 실어야 되고, 식량도 실어야 되고, 짐을 부리고 내리기도 해야 하기에 가끔 항구에 배가 머무를 때가 있습니다. 잠깐 육지에 머무르는 그 동안에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대로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벌써 거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어요. 바울을 알아보기도 해요. 그래서 그들을 만났습니다. 놀라운 것은 벌써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곳저곳에 많이 널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또 잠깐 머무는 하루 이틀 동안에도 전도를 합니다. 믿음 생활 잘하라고 권면합니다. 지난번에도 밤이 늦도록 바울이 설교를 했는데 그것을 듣다가 다락에서 떨어진 사람이 있었잖아요? 마지막 기회니까 밤이 늦도록 설교를 길게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기회 있는 대로 전합니다. '기회 있는 대로'―그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여행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기회가 닿으면, 사람만 만나면 전도하는 것이 바울의 생애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로나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일 중에 잠깐 비치는 얘기가 있습니다. 다 같은 맥락입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4절)"―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우리가 깊이 생각을 해야 됩니다. 성령이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했다면 가지 말아야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거든요. 이미 본 말씀입니다 마는 20장 22, 23절을 다시 참조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여기서 해석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뭘 말씀했느냐, 예루살렘에 가면 핍박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다시 한번 결심을 굳게 하도록 만들어주었어요. 하지만 가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예요. 핍박이 있다는 얘기까지는 성령의 역사이고 성령이 말씀하신 것이지만 가지 말라고 한 것 자기들이 한 말입니다. 어쨌든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사도 바울이 핍박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알고 나서 저들이 바울에게 '가지 마십시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성령이 가지 말라고 한 게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응용하느냐,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점에 있어서 그들이 핍박이 있는 것까지는 알고, 그것을 응용한 것이 '그런고로 가지 마십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에게 위험이 있다는 것을 예고해줄 뿐이지 성령이 사도 바울에게 가지 못하게 했다는 얘기는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지금 누구보다도, 저들보다도 성령에 충만해 있습니다. 성령의 매임을 받아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런데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이런 예언적인 말을 합니다. 이제 가면 많은 핍박을 받게 될 것이고 어려운 일이 기다린다고 합니다. 바울은 아마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도 진작에 알고 있다'-이런 마음으로 저들을 대한 것 같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늘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실제적인 응용, 실제화-application, 이것이 문제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여기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현실적으로 응용해나가느냐―여기에 인간적인 불 신앙이나, 인간적인 욕정이나, 인간적인 해석이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가이사랴에서 일어난 사건을 살펴보면 좀더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빌립의 집에 들어가 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가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10절)"-이 선지자라고 하는 말은 유대사람들이 당시에 가졌던 선지의 개념에 따라서 이해해야 됩니다. 성령의 역사를 받아서 입을 열러 말하게 되면 그가 누구든지 선지자라고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라고 하는 특별한 신분의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 성령을 받아서 말을 할 때에 그가 선지자다, 라고 그 때 그 때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됩니다. 달리 긴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오늘의 본문에 보니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하나의 쇼를 연출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11절)"라고 실제적으로 말을 했습니다. 결론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12절)"입니다. 권면, 거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기다린다는 것을 말씀해주었고, 이런 감동을 받은 사람이 이것을 알고 이야기를 했고, 이것을 들은 사람들이 바울을 붙들고 '올라가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하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 인정이 여기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예수님의 사건으로 돌아가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헬라어 원문대로 보면 '예루살렘을 향하여 얼굴을 굳게 하셨다' 하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굳게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 어떤 결심이냐-이번에 올라가서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죽을 것이다, 그런 각오입니다. 또 예루살렘에서 지금 제사장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아시게 되었어요.
이 또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말씀해서 십자가 앞에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아시고, 그리고 결심을 하신 것입니다. 모르고 결심하신 것이 아니예요.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괜찮은 줄 알고 예루살렘으로 갔더니 덜커덕 핍박이 있어서 체포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미리 알았어요. 이런 핍박이 있고 저런 핍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모르고 간 것이 아닙니다. 알고 갔고, 알고 당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된 고난의 참된 의미인 것입니다.
모르고 당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쩌다가 죽을 수도 있고, 어쩌다가 순교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런 것은 실질적 의미의 순교라고 볼 수 없어요. 이렇게 미리 다 알고 결심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이제 앞에 있을 많은 사건들이 어떤 것입니까? 얼마나 많은 오해가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얼마나 많은 오해를 받고 혹은 비평을 받고, 많은 문제를 감수해야 했습니까?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에 '예수님은 나약하다'하고 십자가를 지실 때에 '이해할 수가 없구나. 능력이 없는가보다'라고도 할 수 있거든요. 믿음이 없는 것처럼도 보이지 않습니까? 일찍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당하실 때에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 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 4:6~7)" 했는데 자, 어떻습니까? 뛰어내려라 할 때에 못 뛰어내리면 어떻게 됩니까? 안 뛰어 내리면 못 뛰어내린 것이 되고, 못 뛰어 내리면 비겁하다느니 나약하다느니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저 "주여" 하고 뛰어내려야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또 기록하였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하고 점잖게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난 거리입니다. 참 오해가 많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십자가 밑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지 않습니까? '뛰어내려라, 그러면 믿겠노라'-이것, 말이 됩니다. 그런데 안 뛰어 내리시니 못 뛰어 내리시는 것이 되고, 못 뛰어 내리시니 무능하신 것이 되고…… 참 오해가 많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전후사정을 잘 알지만 어떤 때에는 참습니다. 참고 있으니까 무시당하지요.
모르는 척하면 모르는 것이 되지요. 바보 됩니다. 사실 알고도 가만히 있는데 형편없는 사람 취급을 당합니다. 그것을 못 참고 '에잇'하면 그 때에는 일이 터집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장면도 똑같은 얘기입니다.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열두 영도 되는 천사를 보내서 진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응하겠느냐, 나는 십자가를 지노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십자가가 얼마나 무능합니까? 얼마나 바보스럽습니까? 얼마나 믿음도 없는 것 같습니까? 그러나 이 오해를 다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 받아들임으로, 다 감수함으로 십자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지나가실 때,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예고하십니다.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하고 말씀하신 후에 내가 십자가를 질 것이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제사장과 장로들에게 핍박을 받고 죽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한마디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그런 일이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하고 만류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지 말라고 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베드로에게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하시며 사단이라 하셨습니다. 사단이 따로 없어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사단입니다. 베드로가 갑자기 사단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도 인정하고, 메시야됨도 인정하고, 그리스도도 인정을 하지만 십자가는 부정하고 있어요. 그런고로 그는 사단이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곧이어 예수님께서 이를 해석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자기 십자가, 내게 맡겨진 십자가를 내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벗으려고 하는 순간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말 한마디 안하고 있으면 바보가 되는데, 내가 바보가 안 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사단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바보가 되어도 좋고, 무능한 사람이 되어도 좋고, 어리석어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의를 위하여, 자기 명예를 위하여, 자기 자존심을 위하여 십자가를 벗어버리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사단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도 않고, 나 자신의 일만 생각하는 순간에 그렇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얘기입니까?
사단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사단이 유혹합니다. 유혹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피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좀 비껴가면 되지 않느냐, 왜 그리로 가느냐,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고 갈릴리로 가면 되지 않느냐, 로마로 바로 가면 되지 않느냐, 그런 것을 왜 네가 직접 예루살렘에 가느냐, 구제금은 디모데 손에 보내주고 너는 로마로 가라, 왜 위험한 일을 네가 맡으려고 하느냐, 비켜가라, 피하라―어떻습니까? 위험한 일은 내가 당해야지, 남에게 당하게 할 수 있어요? 가끔 그런 대화를 할 때가 있습니다. 사장이 운전기사를 고용합니다. 그럴 때에 "바쁘기도 하고, 일도 복잡하고, 거리도 복잡하고, 피곤해서 부득불 운전기사를 두었습니다"라고 말하면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장로님이 이렇게 말을 하더라고요.
"아휴, 그것 위험하지 않습니까? 자칫 사고라도 나면 감옥에 가는데요." 제가 뭐라고 말을 할까 하다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위험한 일이라면 내가 당해야지요. 장로가 되어 가지고 남을 감옥에 보낼 것입니까? 무슨 소리입니까? 위험한 일일수록 내가 하고, 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지요. 그 가난하고 어려운 청년들한테 네가 사고 내고 감옥에 가라는 소리입니까? 그리고 나는 편안하겠다고요? 위험한 일이 있다면 내가 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비켜가고 피하겠다니, 안될 소리입니다. 또 Not now, not here, next time.-이런 혹이 있어요.
지금이냐, 조금 더 있다가 져도 되지, 서른 세 살이 아깝지 않느냐, 다른 기회도 얼마든지 많을 것이니 차차 십자가를 져라―이렇게 사단은 유혹합니다. 이번 이 사건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건에서, 또 하필이면 네가 하느냐, 다른 사람에게 맡겨라―이런 시험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서양사람들의 격언에 사단의 시험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사단이 어떤 유혹을 할 때에 '누구든지 하는 일인데'라고 한답니다.
또 '이까짓 것 별것도 아닌데' '이번 한 번뿐이다'하고 유혹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 '앞날이 많은데'하고 유혹한다고 합니다. 그럴듯한 얘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를 지려고 할 때에 꼭 이런 유혹이 따라옵니다. 비켜가라, 이 길 아니고도 다른 길이 있지 않느냐, 너 아니면 사람이 없느냐, 이 일만이 하나님의 일이더냐, 네가 십자가를 지다니, 너는 바보다, 무능하구나, 앞으로 있을 숱한 오해와 비난은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그래서 목숨은 바칠 수 있는데 명예를 못 바칩니다. 물질은 바칠 수 있는데 자존심은 못 바칩니다. 이래서 십자가를 기피하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 하고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믿음, 가짜입니다. 십자가 없는 충성, 거짓말입니다. 십자가 없는 사랑,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십자가 없는 믿음을 향해서, 베드로를 향해서 사단이라고 엄하게 꾸짖으셨는데, 그에 비하면 바울은 그래도 유순한 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니까 아주 얌전하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13절)"―사단아 물러가라, 하는 것보다는 훨씬 부드럽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왜 감상적인 눈물을 흘리느냐는 것이지요. 이미 바울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요. 여러분, 이 감상적 눈물,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십자가 지시지 말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바울도 여기서 '사단아 물러가라' 할 수 있지마는 다만 어찌하여 울어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쓸데없는 눈물 흘리지 말라, 하는 정도로 쐐기를 박고 맙니다. 그 같은 감상적 눈물이 문제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절)"-심각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죽겠다니,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로마로 가서 서바나까지 복음을 전할 계획이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못 가도 좋아, 예루살렘에서 죽어도 좋아, 그래도 가겠노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얼마나 깊은 의미가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로마 못 가도 좋고, 더 큰 일 못해도 좋다, 여기서 끝나도 좋다, 앞으로 해야 할 일과 포부와 생각은 많지만 그것 다 못해도 괜찮다, 오늘 내게 맡겨진 내 몫의 십자가, 예루살렘에 가는 일, 여기서 끝나도 좋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앞으로 더 큰일을 하겠다며 현재의 일을 등한시합니다.
하나님의 일, 굉장한 일 하겠다고 하면서 내게 맡겨진 내 몫의 십자가를 피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엄청난 계획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또 그렇게 해야 될 일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눈물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니까 사람들의 믿음이 참 좋습니다. 바울이 자기네들의 권함을 받지 아니하니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14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주의 뜻이 아닙니까? 이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그렇게 말하고 그쳤습니다. 더 이상 권면하면 안돼요. 더 이상 권면하면 바울이 '사단아 물러가라' 했을지도 몰라요. 또 그래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굳은 결심을 보고 저들은 더 이상 권면하지를 않고,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말았습니다. 주의 뜻대로―이것이 결론입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는 이 불굴의 결심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께 헌신하고, 주어진 현실에 헌신하고, 또 내 앞에 있는 이 사건, 이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데 생명을 거는, 그런 결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같은 생이 우리에게도 이어져야 할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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