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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당한 괴로움(사도행전 16:16~18)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利) 하게 하는 자라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가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 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오늘의 본문에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18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이 당한 괴로움이 무엇인지 그것을 이 시간에 여러분과 함께 상고하고자 합니다. 이미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다시피, 사도 바울은 지금 마게도냐 지경 첫 성 빌립보에 도착하여 1차적으로 교회를 창설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는 이 없는 낯선 지방에 와서 복음을 전하는 도중에 루디아라는 귀한 주님의 여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또 성령이 루디아의 마음문을 열어주시사 그녀는 바울에게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자기집에서 사도 바울과 일행을 영접하고, 자기집을 열어서 교회를 만드는 귀한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래서 바울은 마게도냐 첫 성 빌립보, 여기에 일단 발을 붙였습니다. 복음은 지금 시작되었고, 특별히 복음의 씨앗이 여기에 떨어졌습니다. 분명히 생명적인 역사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러한 사건이 있은 후에 오늘의 본문에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16절)"----현재는 루디아의 집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 집에 얼마나 큰지 작은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들은 안식일이 되면 처음에 바울이 루디아를 만났던 그곳으로 갔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도하는 곳'---즉 강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적한 곳, 고요한 곳, 바로 야외 예배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으로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과 그 일행이 예배 처소인 '기도하는 곳'에 가는데 그 길에 귀신들린 여자 하나가 있다가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은 귀신들린 여자를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16절)"이라고 밝힙니다.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이 말은 참으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여기에 한 여자가 있습니다. 본문은 이 여자가 얼마나 아름답다든가, 나이가 얼마라든가 하는 것은 전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세 가지로 이 여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귀신들렸다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여자--참으로 불쌍하지 않습니까? 제 정신이 없고 귀신들려서 귀신에게 끌려 다니는, 자기 의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옷이나 제대로 입었는지, 음식이나 제때에 챙겨 먹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귀신들린 여자, 요샛말로 하면 정신이상자입니다. 제정신을 못 차리는, 정신적 자유가 전혀 없는, 총명이 전혀 없는 불쌍한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사람은 여종입니다. 노예로 팔린 여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활마저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주인에게 팔려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인 마음대로 이 여자를 부리고 싶으면 부리고, 때리고 싶으면 때립니다. 이런 경우에는 여자의 도덕성도 묻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주인 마음 대로입니다. 그야말로 완전히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셋째로, 이 여자는 점치는 일로써 주인에게 돈벌이를 해주는 하나의 도구, 수단에 불과합니다. 생각해보세요. 귀신들린 여자가 무슨 필요 있겠습니까?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귀신들려서 중얼중얼하니까, 미래에 대해서 막막하고 무엇인가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점을 치는 것입니다. 그 점괘가 얼마나 맞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답답한 사람들이 점치러 와서 이 귀신들린 여자의 소리를 듣고는 돈을 주고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 이 여자는 이렇게 저렇게 주인의 수입을 올려주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이 귀신들린 여자를 자기의 소유물로 붙잡고 있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 인격 때문도 아니요, 그 사람됨 때문도 아니요, 그 용모 때문도 아닙니다. 다만 귀신들렸다는 것 하나로 해서 주인에게는 이 여자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쓸모'라는 것은 단순히 돈을 버는 도구로의 쓰임새를 말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 우매한 사람들, 미신에 속한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 여자를 만나고, 점을 쳤다며 돈을 주고 가고…… 이 여자는 그렇게 해서 적지 않은 수입을 주인에게 가져다주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19절 말씀을 보면 이 귀신들린 여자가 정신이 깨끗해졌을 때에 그 주인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줄을 알고 온 성을 동원해서 소동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또 하나 보게 됩니다. 이제껏 그 주인은 귀신들려서 제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을 이용하여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들린 사람이 멀쩡해져서 깨끗한 정신을 가진 여자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죽은 것과 같다가 살아났고, 제정신을 못 차리던 사람이 정신을 차렸으면 감사할 일이지요. 그런데 주인은 그렇게 생각할 줄 모릅니다. 한 사람이 죽건 살건, 미치광이가 되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자기 수입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가지고 크게 소동을 합니다. 자기 앞으로 돌아오는 경제적인 유익, 이것만을 생각합니다. 사람이 죽건 살건, 장래가 어떻게 되건,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비인간화하여 철저하게 상대방을 생활 수단화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인격이라든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든가 에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인간에게 있는 사회악 중의 큰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을 생산 도구로 생각합니다. 그 사람의 인격 같은 것은 개의치 않습니다. 돈벌어주면 그만입니다. 그것만 생각합니다. 요새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술상무'라고 하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사람과 교제를 해야겠으니, 술은 마셔야 하는데 사장님이 술을 많이 마시게 되면 위장이 상하니까, 결국에는 술 많이 먹는 양반을 상무라고 해놓고 손님대접 할 때마다 데리고 나가서 같이 술을 마시게 합니다. 이렇게 술 대신 먹어주는 '상무'입니다. 남이야 속이 썩어빠지건 묵사발이 되건 내 알 바 아닙니다. 사장님은 돈만 벌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렇듯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이용합니다. 남을 사람이 아닌 생산 도구로, 돈버는 기구로 이용하는데, 거기에 가책이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회악의 큰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귀신들려 있는데 그것을 불쌍히 여길 줄도 모르고, 또 이제 와서 정신이 깨끗해졌으면 감사할 일이지 수입원이 끊어졌다고 난리를 피웁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의 일이 나와 있습니다. 그 지방에는 군대귀신 들린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 증세가 얼마나 심각한지 무덤 사이에 살면서 가는 사람 오는 사람을 해칩니다. 온동네가 이 사람 때문에 벌벌 떱니다.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시사 이 사람의 정신을 깨끗하게 해주십시다. 군대귀신은 자기들을 그 지방에서 내어보내지 말아 주십사 하고 예수님께 간곡히 빕니다. 주님께서는 저들의 요청에 따라 큰 돼지 떼에 귀신이 들어가게 하십니다. 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는 바다로 들어가서 몰살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 이후의 이야기를 자세히 보세요. 동네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군대귀신 들려서 그렇게 무서웠던 사람이 말짱하게 제정신을 차렸습니다. 성경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막 5:15)"하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감탄합니다. '아!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분이시다. 이런 귀신들린 자를 깨끗하게 하시다니,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막 5:17)"---이 큰 능력을 보았는데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을 생각은 안하고 '떠나주세요'하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손해를 보았으니까요. 사람들은 돼지를 손해본 것만 생각했지 한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이 문제는, 한 사람이 온전해졌다는 이 소중한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습니다.
빌립보에 있는 이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돈벌어주던 여자가 깨끗해졌을 때에 그 주인도 예수님께 감사할 마음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감사할 마음도 없습니다. 그저 수입에 대한 소망, 자기 이익에 대한 소망이 끊어진 것만 알고 소동을 피웠습니다. 그것이 당시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생명, 이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닙니까? 사람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과는 관계없이, 인권도 관계없이, 인도주의도 상관없이, 내 이익만 챙기는 유의 사람들이 어디나 어느 시대에나 많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을 다시 한번 봅시다. 바울과 그 일행이 기도하는 처소로 갈 때에 귀신들린 여자가 그 길에 섰다가 좇아오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17절)"라고 선전을 합니다. 증거를 했다는 말씀입니다. 이 증거는 아주 정확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가리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이렇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하나님"--정확하지 않습니까? '지극히 높은 자의 종, 바울'--이것도 정확합니다. 또 '구원의 길을 전하는 사람이다'--이것도 정확합니다. 몇 마디 말에 불과하지만 그 내용이 사도 바울을 소개하는 데는 아주 정확한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이의 종이요, 복음을 저하는 자'라고 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높이 존경하고 높이 칭찬하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귀신들린 여자가 가장 정확하게 증거를 했고, 사도 바울을 칭찬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를 했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얘기입니다. 바울에 대한 완벽한 선전입니다. 바울의 신분을 완벽하게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바울은 괴로웠습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헬라원문으로 '디아포네데이스'라는 이 말은 많이 괴로워했다는 것입니다. 이 방해를 참을 수가 없고, 괴로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왜 괴로워하는 것입니까? 오늘의 본문의 주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은 칭찬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확하게 칭찬하고 있고, 정확하게 높이고 있고, 정확하게 소개를 하는데 바울은 왜 괴로워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누구의 말이든 좌우간 칭찬이라면 좋아합니다. 심지어는 거짓말 칭찬도 좋아합니다. 칭찬만 들으면 덮어놓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註)까지 답니다. "거짓말인 줄 알지만 듣기에는 괜찮습니다." 언제든지 무조건 칭찬은 좋아합니다. 어떤 의도로 하는지, 누가 하는지도 상관없습니다. 거짓말이라도 칭찬이라면 좋아합니다. 반대로, 자기를 조금 책망하는 말이라든가, 자기의 잘못을 조금 지적하는 말, 충고하는 말은 무조건 싫어합니다. 나를 위해서 하는 건지 어떤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충고를 싫어하는 사람, 이 사람은 수준 이하의 인물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칭찬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마귀가 칭찬하는 것은 세워주고자 함이 아닙니다. 넘어뜨리려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올무에 걸려고 함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칭찬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는, 만약 그가 이런 칭찬을 듣고 좋아라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틀림없이 몇 마디의 칭찬 뒤에 그를 걸고 넘어가서 싹 뒤집어놓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괴로워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시원치 않은 사람, 변변치 않은 사람의 인격은 누구의 칭찬이든 다 좋아하고, 자기에게 좀 언짢은 말은 무엇이든지 다 싫어합니다. 정말로 나를 사랑해서 나를 위하여 충고하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특별히 나를 지극히 위하는 분의 말이라면 귀담아들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오히려 고맙게 여겨야 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 귀신들린 여자의 칭찬이 반갑지 않았습니다. 악령이 여기서 듣기 좋은 말을 한 것 같으나, 중요한 문제는 이 귀신들린 여자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바울을 믿는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만,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에 대해서는 귀신도 안다고 했습니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합니다. 알고 떠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 뿐이요, 떨 뿐이요, 두려워할 뿐입니다. 회개도 안하고,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알고 교리를 압니다. 그러나 아는 것 가지고는 교리 되지 않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알고 있는 바 그 지식을 가지고 정직해야 하고, 그 진리에 내 생명을 의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진실입니다. 알기는 알면서 따르지 않습니다. 분명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자기는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것은 거짓말이요, 진리에 재한 모독입니다. 보십시오. 자신은 믿지 않습니다. 진실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선전을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증거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믿음은 있는 것 같은데 증거할 줄을 모릅니다. 행함이 없습니다. 그런 믿음은 문제가 많습니다. 그런가하면 믿음 없는 증거도 문제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의 주제입니다.
믿음이 없어요. 진실도 없어요. 그러나 말은 곧잘 그럴듯하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얼마나 크고 무서운 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기뻐하지 않습니다. 심히 괴로워합니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저는 언젠가 한번 기막힌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기독교 대학과 일선에 있는 군부대와 자매결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어디까지나 한쪽은 기독교 학교이고 한쪽은 군부대입니다. 그 둘이 자매결연을 하는 예식에 제가 설교를 맡게 되었는데, 다른 순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모르고 그저 설교만 하면 되겠거니 생각하고 그곳에 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식을 치르는 군부대에 가보니, 제가 담당할 부분이 참 난처했습니다. 사단장부터 시작해서 사단사령부의 군인들이 앞에 죽 앉아 있는데, 마침 그 해의 군목 참모가 군승(軍僧)인 것입니다. 불교의 중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도대체 예식 순서가 어떻게 진행되나 하고 살펴보았습니다. 처음에 찬송을 부르고 사단장이 인사를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이 있었습니다. 기도 순서를 보니 그 기도를 하는 사람이 군승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나 의아했습니다. 어찌하려고 이렇게 만들었나 싶었지만 그분들이 주관해서 진행하는 것이니 내가 뭐라고 하면서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알고 보니, 그 군부대의 사단장이 불교인이라서 예식 내용을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어쨌든 기도 순서에 이르자 어정쩡하게 군승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모자를 벗으니 박박 깎은 머리가 드러났습니다. 어떻게 기도하는지 가만히 들어보니 "하나님 아버지……"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원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저는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기독교 학교가 어떻고, 기독교 역사가 어떻고 하면서 누가 써주었는지 기도를 썩 잘합니다. 가장 궁금했던 것은 기도의 마지막을 무슨 말로 끝낼 것인가였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하고 끝내는 것이 아닙니까? 얼마나 기분이 나빴는지 모릅니다. 이런 모독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된 것입니까? 중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서 되느냐, 그 말입니다. 그래,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고 했으니 됐다, 그러겠습니까?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께 욕 돌린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일이 또 있습니다. 우리는 듣는 입장만 생각해서 "어느 대통령도 그랬고, 이 장관도 이렇게 하는데……"라고 얘기를 합니다마는, 대통령이든 누구든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이 신앙이 없는데, 앞에 나와서 말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욕 돌리는 것인지 아십니까? 안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니 얼마나 잘했느냐고요? 말도 안됩니다. 그것이 어떻게 잘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그래, 우리 기독인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하나님의 은혜로'한다고 해서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크게 욕 돌리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신앙이 없는 자가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죄입니다.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 없는 정치인들이 표 좀 얻으려고 교인들이 있는데 가서는 교인인 척하며 하나님이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에 대해여 엄청난 모독입니다. 더구나 믿지도 않는 사람들이 선거 때가 되면 교회에 들락날락합니다.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순한 믿음이 있고, 신앙 고백이 있고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저는 그 때에 너무도 기분이 나빠서 그들보고 이렇게 얘기를 해버렸습니다. "자! 만일에 기독교 목사가 '그 목탁 좀 빌립시다'하고 목탁을 두드린다면 당신네들은 용납하겠습니까?"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모독이 죄가 됩니다. 믿음 없이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께 욕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명에 나와 있습니다. 제 3계명에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헛되게 부르지 말라, 함부로 부르지 말라 하심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신앙 간증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믿음도 없이 고백도 없이 아무렇게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당찮은 일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귀신들린 자로부터 증거를 받는다는 것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기분 나빴던 것 같습니다. 신앙 있는 분이 소개를 하고 그래야지, 모두가 미치광이로 아는 귀신들린 사람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요……'하는 것이니 기분 나쁠 수밖에요.
또 한 가지 생각해야 될 것은, 이 귀신들린 여자의 주인이 되는 사람에 대해서도 분노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정신나간 사람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그 인간성에 대해서 말입니다.
어쨌든 이런 일이 있고,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나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마침내 이 여자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18절)"하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귀신을 즉시 내쫓고 맑은 정신을 찾아주었습니다. 문제는 '여러 날'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제 대하여 의문을 제기합니다. '왜 여러 날이냐? 첫날에 나가라고 하지 왜 며칠을 두고 봤느냐'--이것, 말이 됩니다. 이것은 바울보고 물어봐야 할 일입니다. 왜 며칠동안을 두고 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굳이 설명을 붙인다면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지요. 바울이 이 여자를 귀찮게만 여기고, 그것을 고쳐주겠다든가 하는 생각을 미처 안 했던 것 같습니다. 단지 복음을 전하는 데만 힘썼습니다. 특별히 선교 전략적으로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사람들에게 복음을 먼저 전한 것 같습니다. 이 빌립보에서의 전도는 이것부터 전하고, 그 다음에 이방사람에게 전하고…… 이렇게 하려고 했는데 이 선교 사업의 벽두에, 빌립보 지역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벽두에 귀신들린 사람이나 챙겨서 유명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이미 다른 교회에서 해봤으니까 알거든요. 나중에 귀신들린 사람은 다 데려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병자들도 온통 다 데려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다 일일이 고치고 내쫓다보면 참으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것을 알기 때문에 병 고친다던가 귀신 내쫓는다던가 하는 일(exorcism)을 좀 삼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뒤로 미루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여러 날을 괴롭히니까 마지못해서 귀신을 내쫓았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예수님께도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을 못하게 하시고, '귀신아 나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났던 귀신들린 사람들도 예수님께 대해서 증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증거를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좀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시험 당하신 사건을 한번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신 다음에 시험을 당하시는 그 때에, 마귀가 와서 무슨 말을 합니까? 첫째로, 아주 동정이 많습니다. '얼마나 배고프냐?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예수님을 위함인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돌로 떡을 만드는 능력이 있지 않느냐,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그렇다면 왜 굶고 앉아 있느냐,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언뜻 생각하면 위안이 될 것도 같으나 이것은 시험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 그 말을 들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높은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뛰어내리라 합니다. 뛰어내리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고 놀라겠느냐, 그러면 네가 당장 유명해질 텐데 왜 이렇듯 쓸데없는 고생을 하려고 하느냐-이 역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 하시는데 가로막고 편한 길을 가르쳐주는 양입니다. 특별히 마귀는 예수님께 천하만국과 영광을 보이면서 '내게 절하라, 그러면 이것을 네게 주겠다.'합니다. 이 세 가지 시험을 자세히 보면, 전부가 오히려 예수님을 편하게 하고, 예수님을 성공하게 하고,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를 칭찬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시험입니다. 그런고로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하고 단호하게 시험을 이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당한 형편도 그런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칭찬하는 귀신들린 연인의 말을 듣고 괴로워했습니다.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사도 바울의 총명함과 그의 바른 신앙과, 그의 이 같은 정직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그저 무슨 말이든지 좋은 말이면 다 들으려 하고, 다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지 믿음으로 경건하게, 진실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행여라도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는,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를 범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 기회를 만들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의 이 상황을 당하면서 괴로워했던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에 그실 우리가 괴로워해야 할 것이 많으나 괴로워야 할 시간에 괴로운 줄 모르고 있다면 벌써 시간에 넘어간 것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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