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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립의 의미(사도행전 15:36~41)
수 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라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앞서 보신 바와 같이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선교 현지에서 문제되었던 사건을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아주 권위 있게 또 원만하게 성령의 은혜 가운데서 문제에 해결을 보고, 또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온 교회가 아주 원만한 마음으로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점이 또한 중요합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아무리 귀한 교리와 신앙 생황의 규범을 확정해주었다 하더라도, 아시는 바와 같이 교회 법이라는 것은 세상 법처럼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이것을 받아들일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법은 높은 권세를 가집니다. 그러나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교리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의한 바를 모든 교회가 일치하여 기쁜 마음으로 잘 받아들이고 수용하게 되었다---이러니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이러한 질서 속에 있다면 어느 교회이든 문제될 것이 없고, 하나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엄연히 결의가 된 것이 분명한데, 사사로운 의견을 가지고 내 마음에 든다 안 든다, 이렇게 분분하게 반대를 하고 나선다면 그것은 끝도 없는 얘기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와 온 이방교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은혜 안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사도적 권위와 예루살렘에서의 결의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면서 온 교회가 조용해지고, 화평해지고, 하나되었다는 점을 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2차 전도여행을 떠나고자 합니다. 그런데 준비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얘기입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은 성격적으로 모험가요, 개척가 체질의 사람이었습니다. 한 교회에 오래 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다른 곳을 방문하고 또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이렇게 다녔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도 86세까지 그렇게 목회를 하셨습니다. 옛날에는 은퇴 제도가 없었으니까 돌아가실 때까지 그렇게 목회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일평생 한번도 위임 목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교회에 3년 이상 있지 않았으니까요. 어디 가서나 교회를 세우고 또 옮기고, 또 교회를 세우고 옮기고, 그렇게 평생을 사신 것입니다. 그분은 늘 말하기를 '나는 100개의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나름대로 크게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 곳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한 군데에 오래 있을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교회를 모르고 예수를 모르는 곳으로 옮겨가서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개척을 하고 전도하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모험적이요 개척적인 체질의 사람이었기에 안디옥교회에 2년 동안 있었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또 떠납니다. 전도여행 다녀와서 잠깐 쉬었다가 또 나서서 이방으로 가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복음을 전하려고 출발할 때에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생깁니다. 무릇 새로운 일을 하려고 할 때에 옛 일이 장애가 됩니다. 생각해보면, 지난날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로 향하는 데에 추진력도 되고, 지혜도 되고, 능력도 되지만, 때로는 과거라고 하는 것이 우리를 미래로 밀고 나가는 데에 방해가 될 때도 많습니다. 그러한 경우에 부딪힌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봅시다. 바나바와 바울과 마가, 이렇게 세 사람이 1차 전도여행을 떠났었습니다. 그런데 마가가 도중에 이탈해서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바울에게는 이것이 아주 못마땅한 일이었습니다. 마가의 돌아간 이유가 성경에는 이렇다하고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기에는 그가 병에 걸렸다, 그래서 말없이 고생을 하다가 그 병이 나았다, 나아서 다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야 될 때에 나약한 마음이 생겨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나약해지고보면 불평도 생기고 여러 가지 구실이 생깁니다. 결국 그는 도중 이탈자가 되고 맙니다. 많은 학자들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마가는 돌아갔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전도여행에서는 지도자는 바나바이고, 바울은 바나바를 수행하고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차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보니까 그게 아니거든요. 바나바가 후견인이고, 바울이 지도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비중이 날로 커지고 지도권이, 지도자 된 권위가 바나바에게서 바울로 옮겨지는 것이 마가로서는 못마땅했던 것 같다, 그래서 마가가 도중에 돌아갔다--그런 해석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마가가 다 나은 후에, 선교 일행은 버가라는 곳에서 이제 비시디아 안디옥이라는 곳으로 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비시디아 안디옥은 1,100마일 고원지대에 있는 도시입니다. 더욱이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험준한 계곡을 통과해야 됩니다. 위험이 있습니다. 이 위험을 알고, 마가는 더 이상 가지 않으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해석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마가는 지금 바나바와 바울이 가는 길을 따라만 갈 뿐, 그 마음에 특별히 이방 선교적인 사명은 투철하게 가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비록 동행, 수행하고 있는 터일지라도 마음만은 바나바와 바울 못지 않게 선교적 사명으로 충만해 있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같은 사명감이 없었어요. 삼촌이 간다고 하니까 생각 없이 따라나선 것입니다. 반은 일하고, 반은 구경 삼아--이렇게 되는 사람은 언제라도 위험을 당하면 쉽사리 도중하차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원적이고 자발적이어야만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지, 그저 무심히 따라가는 것이어서는 바른 역사를 이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교우 가운데는 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어요. 마가는 부잣집 아들이니 아마도 어머니 생각을 했던가보다, '마마보이'이니 엄마 보고싶어 고향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말입니다. 이것도 일리가 있는 추측입니다. 마가는 부잣집 아들로 편하게 살아서 외국에서 겪는 것과 같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어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을 법도 합니다. 그럴 때에는 아무리 마음은 간절하다 해도, 우선 몸과 마음이 견뎌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마가는 버가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결국은 바나바와 바울의 두 사람만이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갔고, 또 다른 곳을 돌면서 많은 교회를 세우고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 고생고생 전도를 합니다. 이윽고 예루살렘에 돌아와 지난 일을 보고하게 됩니다. 마가가 그 보고하는 것을 들으면서 얼마나 후회했겠습니까? 나도 따라갔더라면 좋은 경험을 했을 것을, 나도 한몫 할 수 있었을 것을, 그랬다면 이 시간에 얼마나 신났겠는가, 아, 내가 어쩌다가 이탈자가 되었던고, 하고 말입니다. 뉘우치고, 회개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굳게 결심하여 이번에는 다시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결심하고 출발하려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의 그 결심을 인정하고, 마가를 데려가자 합니다. "데려갑시다." 그러나 바울은 거부합니다. 어쨌든 마가는 한번 실패한 것으로 인해서 새로운 결심을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13절에 보면 베드로는 "내 아들 마가"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아들이라고 불릴 만큼 그는 베드로에게 충성을 다하고 확실한 후원자가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이나 골로새서를 보면 사도 바울에게도 마가는 다시 좋은 제자가 되었고, 사도 바울은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하고 말씀합니다. 유익한 인물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사건에서는 얘기가 다릅니다.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가려고 할 때에 바울은 이를 거절합니다. 거절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자기들을 떠나 한 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38절)"--그런고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꾼의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꾼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일을 시작했으면 끝을 내야 합니다. 또한 그 일 하는 모든 일꾼들 속에서 결코 이탈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여기에 열 명의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열 명이 다같이 위험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이탈하면, 10분의 1을 담당했던 그 한 사람만이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닙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도 마음이 약해집니다.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상심을 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낙심하게 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탈자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군대에서는 최일선에서 싸울 때에 탈영병은 총살해버립니다. 저도 한번 그 장면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딱 세워놓고 쏘아버려요.
탈영병은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긴 얘기 할 것도 없습니다. 전쟁에 나갔다가 겁이 난다 하여 명령을 어기고 혼자서 도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세워놓고 쏘아버려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에 마가는 크게 잘못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서' 이탈해버렸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떠남으로' 한가지로 일하지 않았다--그런고로 여러분, 이 거룩한 대열에서 이탈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하고 일하고 합니다. 그 거룩한 역사에 이탈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아주 섭섭한 일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자체가 이적행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큰 사역 앞에서 절대로 낙오자나, 이탈자나, 배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바울은 마가가 한 가지로 함께 하지 않았으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가가 한번 실수했습니다. 그러나 그 한번 실수한 과거를 사도 바울은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같은 일이 또 반복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가, 그는 여전히 부잣집 아들입니다. 그가 가졌던 불만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 원인이 지금 해소된 것이 아닙니다. 해결된 게 없어요. 다만 그의 마음에만 변화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제 감정은 돌아왔어요. 감정적으로는 좋아요. 지식도 좋아요. 그러나 의지가 약해요. 여러분도 그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내일 아침 새벽기도에 꼭 나와야겠다고 굳게 결심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 시간에 가서는 못나옵니다. 의지가 약해요. 무슨 일이든지 우리가 한번 두 번 하기까지는 쉽습니다. 그러나 일생을 두고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 저는 생각합니다. 학교에 다니는 것도 우등생보다는 개근생이 더 좋은 학생입니다. 그 학생이 더 큰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자기 일은 별로 잘 하지 못하고 칭찬도 별로 못 듣지만 하루도 안 빠지고 매일 출석한다는 것은 훌륭한 것입니다. 여러분, 모름지기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도 좋고, 감정도 좋고, 결심도 좋습니다. 그러나 밀고 나가는 힘이 없으면 안됩니다. 신앙적 의지가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입니다. 정말로 말만 많은 것입니다. 보세요. 베드로는 '죽을지언정 저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부인해도 나는 부인하지 않겠습니다'하고 큰소리 쳤습니다. 그 때에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결심했겠지요. 그러나 예수를 모른다고 해버렸으니 어떻게 됩니까? 어제 저녁에 한 말은 거짓말이 되고 말았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고로 이제 마가가 굳게 결심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해도 바울은 안 믿습니다. 마가, 그의 진실은 믿습니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거부합니다. 아주 냉정하게 거부합니다. 바울의 이 같은 냉정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니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 옳다, 데리고 가는 거이 옳지 않다, 라고 말씀합니다. 아주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냉정하게 고지식하게 나오는 바울을 보면, 역시 덕이 없는 사람이구나 싶어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바울을 심리적으로 이렇게 분석합니다. 바울이 너무 지나쳤던 것 같다, 그에게 간질병이 있었다고 하니 아무래도 조금 신경질적인 데가 있었던 게 아닌지, 병적인 냉정함이 아닌가─그렇게까지 말합니다. 왜요? 그렇게 분석할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나바의 신세를 많이 진 사람이거든요. 바나바는 바울을 다메섹까지 가서 데려온 사람이거든요.
바울이 바울된 것은 바나바가 뒤에서 후견인 내지 후원자가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바울은 바나바에게 큰 신세를 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나바의 뜻을 거부합니다. 안 된다면 안 되는 것입니다. 대단히 고집이 셉니다. 이 때문에 바나바와 바울이 심히 다투었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니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39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다투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만큼 냉정하고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개인에게는 사랑을, 사회에는 정의를'--현대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라인홀트 니버의 이론입니다. 귀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정의와 사랑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공적인 일과 개인적인 일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공적인 일에는 정의를, 대인적인 일에는 사랑을--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에 남에게 조금 덕을 끼치기도 하고, '용서합시다'할 때도 있습니다. 나 개인적으로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전체를 위하여, 공적인 일을 위해서는 그렇게 인심을 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사랑과 긍휼로 너그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적인 일에는 냉정해야 되고, 특별히 하나님의 일에는 인간적인 감정이나 다른 사적인 것들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바나바는 역시 바울에 비해서 덕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 여기서 한번 짚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누가 옳다느니 누가 그르다느니, 이렇게 서로 말하고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두 사람의 의견이 다를 뿐이지 어느 쪽이 의롭다, 어느 쪽이 불의 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과 악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의견이 다른 것일 뿐입니다. 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한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고-----그러나 둘 다 믿음 안에 있기 때문에 절대로 저들이 서로 미워할 것도 없고, 또 서로 크게 마음 상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의견이 다르다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의 진실을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선교를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인심을 쓰고 안 쓰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길게 설명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마도 마가에게 이런 설명을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마가, 자네를 위해서도 이번은 안가는 게 좋을 걸세." 왜요? 한번은 실수했기 때문에 한번은 좀 근신하고 지낼만하거든요. 바로 이런 일로 인해서 마가는 굳게 결심하고 훗날 더 훌륭한, 더 강인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비록 그 때에는 마음이 좀 아팠겠지만, 잠깐은 마음이 좀 아팠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피차 다투고 갈라집니다. 참 안됐지요.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고 선교를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큰 그것은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쥐 한 마리 잡겠다고 독을 깨뜨리는 어리석음 같은 것을 범하지는 않았습니다.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무너뜨린다던가 하나님의 사역에 손해를 끼친다던가 하는 일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이 다 하나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선교를 위한다는 그 마음은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바나바라고 하는 사람은 아주 덕이 있는 사람이요, 아주 훌륭한 사람입니다. 마가에 대해서도 또 한번 포용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의 삼촌 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바나바의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마는, 전설에 따르면 만년에 그는 밀라노의 감독이 된 적도 있다고 합니다. 덕이 있는 사람들이 용감하게 멀리까지 나가서 선교하는 일은 별로 잘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좋으니까요. 바나바는 결국 자신의 교향인 구브로에서 일평생을 일하고, 마침내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마가는 행운아라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니, 바울을 놓고 볼 때에도 일단 바울로부터 엄한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마가는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별로 좋지 않은 얘기입니다만, 용서하고 들으십시오. 제가 중학생일 때에는 책이 참 귀할 때였습니다. 저는 당돌하게도 공부를 많이 한 어떤 어른한테 책 몇 권을 빌리러 갔습니다. 그 어른은 공부를 많이 했고, 그 아들들도 일본에서 공부한, 아주 박학다식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른은 내가 원하는 대로 책을 다 빌려주지 않고 딱 한 권 빌려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네 농사꾼 아들이면 농사나 배울 것이지 공부는 뭐하려고 해?" 저는 인사를 하고 그 집을 나와서는 집까지 엉엉 울면서 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한 시간 내내 울었고 그 다음에도 며칠을 두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굳게 결심했어요. '두고보자, 누가 공부를 더하는지.
당신의 아들이 공부를 더한, 내가 더하나, 어디 두고보자'---못된 마음이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의 그 결심이 참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은 그 어른이 저에게 좋은 교훈을 준 것이었습니다. 나한테 공부하라고는 안 했습니다. 그저 농사나 배우면 되지 않느냐고 했을 뿐이었고, 그것이 제게 준 충격은 대단했습니다. 그 어린이 나이에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여러분, 마가도 그런 마음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바울이 "자네는 집에 가서 어머니하고 신앙생활이나 잘하게나" 했을 때에 마가는 속으로 무슨 소리냐며 곧게 결심했을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될 것을 바울이 한 수 높이 내다보고 "자네는 안돼"라고 말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마가는 행운아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바울이 마음좋게 '오냐'하고 수월히 데리고 갔더라면 마가는 필경 별 볼일 없이 따라만 다니는 사람이 되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도중에 또 한번 돌아오는 나약한 사람이 되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가는 행운아인 것입니다.
또 하나, 마가에게는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그가 굳게 결심한 바의 진실을 바나바가 알아주고 있습니다. 그 점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진실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해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결심을 바나바는 믿어주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마가의 새로운 결심, 이것을 바나바는 받아주었습니다. 참 귀한 일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 마지막 진실에 대해서 알아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아는 한 청년이 군에 입대했습니다. 입대하기 전까지 그는 아주 좋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대학은 입학만 해놓고, 등록금은 다 술 먹어 없애버립니다. 부모님한테 등록금을 몇 번이나 받아갔는지 모릅니다. 방탕하고, 술 먹느라 돈 없애고, 또 속썩이고 하다가 딴에는 결심한 바가 있어서 입대를 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첫 휴가를 나왔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들판에 내놓은 망아지처럼 마냥 돌아다녔던 때와는 달리 입대해서 꽉 짜여진 군 생활을 하다가 오랜만에 밖으로 나오고 보니 기분이 썩 좋거든요. 그래서 친구들하고 신나게 놀다가 귀대하는 날짜를 그만 이틀이나 넘겨버렸습니다. 큰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결국은 이 아들, 아버지 어머니한테 부탁을 합니다. "귀대해야 할 날짜가 이틀이 지났습니다. 그냥 갔다가는 맞아죽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좀 사 가지고 가야 되겠어요. 돈을 좀 주십시오." 그 어머니는 "네 말을 어떻게 믿냐?"합니다. 아버지도 안 믿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했던지 그 청년이 저한테까지 왔습니다. 저 역시 "네 말을 어떻게 믿냐"했지요. 휴가증을 보면 간단한 일이었을 텐데 누구도 그에게 휴가증을 보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본인은 정말이라고 했지만 그것을 아무도 안 믿었습니다. 그래서 빈손으로 귀대했고, 정말로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게 여겨졌던지 유서를 써놓고 자살해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그 아버지 어머니는 마음이 많이 상해서 결국은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저도 그 때의 일을 너무나 후회합니다. '다만 얼마라도 주어서 보낼걸'하고 말입니다. 보십시오. 지금까지는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마디만은 진짜였습니다. 이 한마디를 믿어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이를 가리켜 잘못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워낙 거짓말을 많이 했으니까요.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여러분 자신은 안 그렇습니까? 그 동안에 내가 실수하고 맹세하고, 맹세하고 또다시 실수하고 했지마는 이번만은 진짜일 때, 그것을 누가 믿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새벽마다 못 일어났지만 내일 아침에는 꼭 일어날 거예요"했을 때에 "그래, 그래야지"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공부하는 아이들이 졸리니까 자면서 부모님께 "내일 아침에 깨워주세요"합니다. 깨워주어야 잘 못 깨어나면서도 내일 아침에 깨워달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럼, 깨워주고말고"라고 말해준다면 참 좋겠는데 "네가 퍽이나 잘도 일어나겠다, 네 결심은 해보나마나 한 것이야"한다면 그는 불행한 아들입니다. 백 번 거짓말을 했더라도 마지막 한마디는 믿어줘야 합니다. 믿어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살만한 것입니다.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보세요. 바울은 안 믿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했을 법합니다. 그러나 바나바 한 사람만은 나는 자네를 믿네"하고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갑니다. "바울이 싫다면 나하고 가세." 그리고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자 마가는 얼마나 행운아입니까? 나를 믿어주는, 내 진실을 믿어주는 한 사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니 행운아인 것입니다. 그 마지막 한 사람을 못 만나고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선교 일행은 두 대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몹시 다투고 나누어집니다. 이 일을 두고 칼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 불화에 대하여 알고 계셨다"--하나님께서 주관하셨고, 그래서 그들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벵겔이라고 하는 주석학자는 "한 쌍에서 두 쌍을 만들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 이렇게 한 쌍이 다녔는데 이제는 바나바와 마가, 바울과 실라----이렇게 두 대로 나누어지게 되었으니 얼마나 효과적이냐, 비록 그들이 다툰 것은 안됐지마는 이 일로 인하여 더 효과적인 전도가 가능해지지 않았는가, 그 말입니다.
그리고 또 나의 유익이 있습니다. 실라라고 하는 중요한 교역자를 얻은 것입니다. 마가가 같이 갔으면 실라는 선교 일행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와 바나바가 함께 했기 때문에 바울은 이제 실라를 발탁하게 됩니다. 실라라고 하는 이름은 실루아누라고도 발음합니다.
성서학자들이 보는 바로는 실라는 로마사람입니다. 로마사람이면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요, 그래서 유대사람이 된 것입니다. 로마시민이 바울과 동행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끝내 이 복음을 들고 로마까지 가려고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행함에 있어서 실라와 동행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바울이 전하고 있는 기독교를 세계적 종교로 전파함에 있어서 실라가 교역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또한 잘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실라와 함께 다니면서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또 들었을 것입니다. 로마가 어떤 곳이냐, 로마에는 사람이 얼마나 사는가, 로마의 거리는 어떠한가, 정치는 어떠한가…… 로마에 대해서 많은 것을 계속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를 위해서 기도했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바울에게 로마에 대한 지식을 주고, 로마에 대한 선교적 정열을 가지게 하는 측면에서 실라가 크게 공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전히 신앙적으로 하는 일이라면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다 하더라도 결코 그것은 잘못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미처 인간이 모르고, 서로 분분하게 다툴 수도 있고, 또 갈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는 크게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면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이점을 잊지 맙시다. 불화는 나쁩니다. 그러나 분립은 좋은 것입니다. 불화와 분립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바울과 바나바는 불화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립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큰 뜻이 있을 것입니다. 참된 믿음, 참된 충성, 참된 선교적 열정이 앞에 있을 때에 비록 지금은 의견이 하나가 못된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일은 무너지는 게 아니라, 더 크게, 더 놀랍게,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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