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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의 편지(사도행전 23:25~35)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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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의 편지(사도행전 23:2535)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에게 문안하노이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송사 하는지 알고자 하여 저희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송사 하는 것이 저희 율법 문제에 관한 것 뿐이요 한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건이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게 하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도 송사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를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이튿날 마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문으로 돌아가니라 저희가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사람인 줄 알고 가로되 너를 송사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 사건 자체는 몹시도 불합리하고 당치 않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유대사람들이 시기하고 질투해서 그를 없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시간을 통해서 누누이 말씀드렸거니와 뭐니뭐니해도 세상의 무서운 죄 가운데 가장 큰 죄가 시기, 질투라고 생각합니다. 시기, 질투하기 시작하면 정신을 못 차립니다. 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큰 죄입니다. 정말로 죄의 원인이 되는 죄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흔히들 시기하는 것을 큰 죄로 생각하지 않고, 질투하는 마음을 크게 회개해야 될 죄라고 마음 아프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마음 속에 시기와 질투가 싹트기 시작하면 정신을 못 차립니다. 결국은 살인극에까지 이르고 맙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큰 죄를 면하기 위해서는, 더구나 우리가 범죄함을 피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시기와 질투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시기, 질투를 완전히 불식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인격적으로 완전한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온전하고 거룩하고 진실하다가도 시기, 질투 앞에는 넘어집니다. 그런고로 시기, 질투는 마귀의 고등 술책입니다. 높은 계책입니다. 유대사람들은 이 같은 시기, 질투로 인해서 바울을 해치려 합니다.

또 이렇다할 재판도 받기 전에, 다시 말하면 판결이 있기도 전에 바울을 찢어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문제가 됩니다. 소위 재판정이라고 하면, 원고가 있고 피고가 있고 변호가 있고 마지막으로 판결이 있습니다. 좌우간 판결이 내려진 다음에 죽이든 살리든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재판을 했거나 판결을 내린 게 없습니다. 다만 바울이 변론하는 중에, 자기 변명을 하는 중에 그를 당장 찢어 죽이려고 드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동족에게 핍박을 받고 이방인인 로마사람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로마 당국은 도저히 예루살렘에는 바울을 더 둘 수가 없어서 밤을 타 몰래 가이사랴로 호송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바울 하나 때문에 이제 470명이나 되는 많은 군사가 동원되어 그를 6킬로 밖의 바닷가에 있는 가이사랴로 호송합니다. 여기서 한번 짚고 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죄수라고 생각되는 바울이 도망갈까 저어하여 그를 감시하려고 470명이나 동원한 게 아닙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죄수냐 아니냐와는 관계없이 제 삼자로 인해서 그가 다칠까봐, 그를 경호하기 위해서 470명이 동원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인을 호송하는 데 있어서 죄인이 도망갈까 걱정되어 그런 게 아니라 죄인을 다른 사람들이 해칠까봐 그런 일없게 하기 위해서, 보호하기 위해서 경호하게 된 것입니다. 바야흐로 법이 사람을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법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까? 선한 사람을 보호하고 악한 사람을 벌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상선벌악이 법의 기본정신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그들은 죄 없다고 생각하는 이 사도 바울이 적어도 억울하게, 아무 재판도 받은 일없이 피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을 이렇게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천부장이나 백부장의 관심은 바울이 사느냐 죽느냐에 있는 게 아닙니다. 죄목을 정하지 못한, 더구나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 피살된다면 시끄럽겠지요. 그렇게 되면 백부장의 책임이 됩니다. 자기의 목이 위태롭습니다. 천부장 역시 자기 책임입니다. 그런고로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바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직위를 위해서,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에서 바울을 호송하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편지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편지를 가지고가는 사람은 백부장입니다. 그러나 원래 편지를 쓴 사람은 천부장이라고도 생각됩니다. 예루살렘을 호위하고, 보호하고, 군사로 지키고 있는 사람은 천부장입니다. 그리고 지방 전체를 다스리고 있는 자는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입니다. 우선 총독이 있고, 그 밑에 천부장이 있고, 다시 그 밑에 여러 백부장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편지는 근본적으로 천부장이,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의 군사적 지배를 책임지고 있는 천부장이 자기보다 권세가 더 위에 있는 총독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지역의 로마측 통치부가 있는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고 가이사랴입니다. 또 예루살렘은 좁은 내지(內地)에 있고, 가이사랴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 도시입니다. 때문에 모든 문물이 다 그리로 오고가고 했습니다. 지금도 가이사랴는 대단히 크고 번화한 도시입니다. 그 당시 여기에 소로마라고 하는 문화도시를 건설하고 로마군인들이 주재하고 있었는데, 군사본부로 헤롯의 궁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헤롯 궁전은 헤롯 때에 헤롯이 만들었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고 있지, 거기에 헤롯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벨릭스 총독이 주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부장의 입장에서는, 보다 상위 기관으로 바울을 호송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번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가이사랴로 호송되는 과정에서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그것을 알 수가 없어요. 바울은 이리 끌려가고 저리 끌려가고, 이리 죽을 뻔하고 저리 죽을 뻔합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바울은 로마로 가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바울은 지금 믿음으로 순종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 상황은 바울을 로마로 보내고자 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2년이라는 시간이 걸리는데, 그런고로 이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바울에게 비장한 결심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 된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게 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그는 유대사람들에게 쓸데없는 미련을 가졌어요. 그것은 분수 밖의 일입니다. 자기 기능 밖의 일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는 몇 번이고 재확인해야 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어디까지나 이방인을 상대로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 당시 이방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의 중심인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기의 전략이나 계획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했던 일은 다 무너지고 깨지고 막혔습니다. 그래 이제 와서는 그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쇠고랑을 차고 하릴없이 끌려갑니다. 하지만 이렇게 로마까지 갑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다루겠습니다마는, 아무튼 바울 자신은 미처 알고 있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여기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이사랴로 호송 당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당시 이 지역 유대 지방을 다스리고 있는 총독 벨릭스에대해서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그는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본명은 안토니오스 안토니우스 벨릭스입니다. 로마 황제 클라디우스 때에 그는 노예 신분에서 자유인이 되고, 자유인이 된 지 얼마 안되어 총독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벨릭스에게는 팔라스라고 하는 형이 있었는데, 그가 네로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덕에 벨릭스가 노예로서는 특혜 중의 특혜인 자유인으로, 평생 노예로 죽어가야 할 사람이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다시 지위가 올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지방장관으로 유대 지방에 왔던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 이 사람을 썼는지-아마도 보통의 로마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유대 지방이 하도 말썽이 많은 곳이니까 서로 안가겠다고 해서 보냈는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유대지방은 로마로서는 다스리기 아주 골치 아픈 곳입니다. 그래서 자기네생각에 가장 잔인한 사람, 가장 강팍한 사람을 보내서 이 지역을 완전장악 하도록 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노예로서 로마의 지방장관이 된 사람-그가 벨릭스입니다. 어떤 사람이기에 그리되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벨릭스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노예정신으로 왕의 특권을 행사한사람"이라고. 벨릭스는 총독이므로 왕의 특권을 행사하는 사람입니다.

지방에서는 어디까지나 왕입니다. 그러나 비록 로마 황제의 권세를 업고 왕권을 행사하고 있지만 그가 하는 짓은 노예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노예정신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노예를 총독으로 만들어놓았다 하더라도 생각은 노예더라는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분을 높여서 귀족을 만들어놓았지만, 하는 짓은 여전히 천한 노예의 성분, 노예의 문학, 노예의 언어, 노예의 행위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더라는 말입니다.

, 그는 가정도 복잡했습니다. 세 여인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래 이 문제에서도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첫 번째 여자는 성경이나 역사에 나오지 않으므로 누군지 알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여자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손녀입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애사건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의 손녀입니다. 이렇게 그는 정략적인 결혼을 했어요. 그러니까 노예 신분에서 출발했고, 자기신분을 더욱 더 굳히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유대 근방에 와서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맏딸 드루실라를 아내로 삼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에서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클레오파트라의 손녀를 아내로 삼고, 유대 지방에 와서는 다시 헤롯 아그립바의 딸과 정략적인 결혼을 한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 명예와 지위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사람은 아주 무자비했습니다. 자신의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측근에 있는 가장 친한 친구나 자기를 위해서 제일 충성을 다해주던 사람도 가차없이 없애버렸습니다. 죽이기 거북하면 다른 사람을 시켜서, 돈을 주고 암살자를 사서라도 없애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그는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폭동을 진압할 때에는 악한 사람만 골라서 죽이기는 어려운 일일 테지만 유독 그는 폭동을 진압하는 때에는 가차없이 그 언저리에 관계된 사람들까지, 주변 사람들까지 다 죽여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폭동을 진압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잔인성은 소문날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심지어는 대제사장 요나단도 살해해버렸습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말년에 이르러 마침내 그 악명이 로마에까지 전달되어서 총독 임무를 잘 수행하지 못했다 하여 로마로 소환됩니다. 그래서 사형될 뻔했으나 형의 도움을 입어서 죽음만은 간신히 면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 이러한 벨릭스가 지금 유대나라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다스린지 벌써 5년입니다. 그 전에 그는 사마리아의 총독으로 2년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만난 다음에 또다시 2년을 더 있었습니다. 그런고로 그는 유대 지역에 무려 9년 동안을 총독으로 재직한 것입니다. 그 동안 잘만 다스렸으면 그는 정말 노예에서 총독에까지 이른 입지전적 인물로 좋은 평판을 받을 수 있을 뻔했지요. 그런데 벨릭스에게는 한마디로 컴플렉스(complex)가 있었어요. 자기 신분이 천했기 때문에 이것을 덮기 위하여, 이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는 잔인한 방법을 써야 했고, 지나친 행동을 취해야 했고, 부도덕한 행동을 해야 했습니다. 특별히 그는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다시 노예로 돌아간, 그런 불행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바로 이런 사람, 파렴치한이고 비도덕적인 벨릭스의 재판을 받기 위해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이 가이사랴로 오게 된 것입니다. 생각하면 사면초가(四面楚歌)입니다. 유대사람에게 재판 받자니 그들은 가야바를 비롯해서 다 형편없는 사람들이고, 또 로마사람에게 의뢰하자니 벨릭스 같은 사람이 앉아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도대체 어디서 재판을 받아야 합니까? 세상 어디서든지 정의를 찾을 수 없고, 정의로운 보호를 받을 수 없고, 정의로운 재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바로 이 벨릭스에게 재판받기 위하여 이 자리에 왔습니다. 정말 악법도 법입니다. 바울은 온유 겸손하게 이 재판에 응해야 했습니다. 그로서는 벨릭스가 이런 사람이다 저런 사람이다 하고 비판할 계제가 못됩니다. 또 그럴 일도 아닙니다. 그는 이대로 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입니다.

후에 바울은 이 재판이 마지막까지 너무나도 못마땅해서 이를 참지 못하고 아그립바 왕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에 부득불 로마로 상소하게 됩니다. 벨릭스가 재판을 제대로 하고 총독답게 처신했더라면 바울이 로마에까지 이렇게 상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로마로 가야 할 사람입니다. 바울에게 '내가 로마로 상소합니다'하는 그 말이 나올 때까지, 그런 생각이 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이 자리에 두신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찌 생각하면 이 벨릭스가 착하고 선한 재판장, 선한 정치가였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것이니 말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2년을 기다리면서 애써봤지만 별도리가 없어요. 그래, 도저히 여기서는 안되겠다 하고 그는 가이사에게 가겠다고 합니다.

로마사람인고로 가이사에게 가겠다고 한 이상 그는 로마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몸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감옥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거기에 계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감옥에서 얼마를 지내다가 뒤늦게 생각합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12)"-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그 때에 가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생각하면 한 3년 동안 사도 바울은 그야말로 안개 속에서 살았습니다. 아마 그는 이렇게 수없이 물었을 것입니다. '왜 이래야 합니까? 왜 내가 이 고생을 해야 합니까? 이게 어떻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감옥에서 억울하게 썩고 있으니 말이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바울은 이렇듯 답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마는, 3년 후에야 비로소 ',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구나'하고 오묘한 주의경륜을 깨달아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됩니다.

아마 우리네 생활도 그러할 것 같습니다. 어디 가서 호소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대부라고 하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저는 언젠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신학생들과 교수님을 모시고 같이 봤어요. 그 날은 대부를 교과 과목으로 해서 신학을 공부한다고 하여 영화를 본 후에 여러 시간 동안 토론을 했었습니다. 그 영화의 줄거리가 복잡합니다만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여자가 길거리에 나갔다가 깡패들한테 강간을 당합니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온 이 딸의 아버지는 너무너무 분했습니다. 그래서 법에다 호소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여자가 좀 꼬리를 쳤으니까 그랬겠지, 서로 아는 사이라는데 뭐……"하며 잡아들였던 사람들을 그냥 놓아주고 맙니다. 아무리 호소해도 안됩니다. 사실 미국에서는 강간죄를 그리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는 마피아 조직의 한 두목을 찾아가 호소를 합니다. 그러니까 두목은 "내가 갚아주지"합니다. 눈에는 눈으로-여기서부터 마피아들끼리 싸우게 됩니다. 사건이 커져갑니다. ,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입니까? 보십시오. 재판이 영 시원치가 않아요. 그렇다고 마피아한테 가서 갚아달라고 하면 됩니까? 그러면 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 법이 그렇습니다. 억울하고 분한 것, 아무리 원통하다고 호소해봐도 시원하게 해결해주지 못해요. 이 세상 어디서든지 그래요. 그렇다고 해서 폭력으로 해결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심판을 해버리겠다고, 내가 복수해버리겠다고 할 수는 없어요. 무릇 기다려야 됩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끝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로마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 이제 천부장의 편지 내용을 잠깐 생각해봅시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편지는 언뜻 무죄를 확인하는 '무죄 확인 통지서'같은 인상을 줍니다. '아무리 보아도 이 사람은 죄가 없습니다'라고 씌어있어요. 또 어찌 생각하면 추천장 같기도 합니다. '이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다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석방하면 살해될까 겁이 나서, 어찌할 길이 없어서 당신에게 보냅니다'라는 내용입니다. 또 여기에 깔려있는 내용 가운데 하나가 '이 사람이 죽게 되었기 때문에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구원했습니다'-바울이 로마사람인 줄 알고 은근히 자기 공로를 내세우고 있어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저가 바울을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이 크고 작고 의가 무너지고 선이 어떻고…… 하는 차원에서가 아닙니다. 만일에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죽어버리면, 암살 당하거나 피살당하고 만다면 천부장 자기의 목이 달아나거든요. 너는 어떻게 로마사람 하나 죽는 것도 보호하지 못했느냐, 하고 문제가 됩니다. 또 이렇게 되면 복잡해지니까, 정치 문제화하니까 아주 시끄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를 구원했습니다. 그가 살해될까봐 이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보냅니다'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이것은 민사 사건도 아닙니다. 도둑질한 것도, 사기를 친 것도 아닙니다. 그런가하며 형사 사건도 아닙니다. 사람을 죽인 것도, 혁명을 일으킨 것도 아닙니다. 다만 종교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그실 천부장의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 일은 내게 흥미가 없습니다. 저희들끼리 싸우든 말든 나와는 상관이 없어요. 문제는 이 사람이 자기가 로마사람이라고 하기 때문에 부득불 그를 체포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총독에게 바울을 보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붙들고 있자니 골치 아픕니다. 당신이 맡아서 하시오. 이런 문제는 내가 취급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관할하는 이 예루살렘 영내에서 그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죽이든 살리든 가이사랴에서 해결이 나기 바랍니다'-그런 속셈에서 그를 가이사랴로 호송한다는 얘기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바울을 위하는 것 같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바울을 위하는 생각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정의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 옛날 빌라도가 예수님 죽일 때를 생각해보세요. 빌라도는 오직한 가지, 자기 지위만 생각합니다. 그는 예수 한 사람 때문에 시끄러워지는 게 싫었습니다. 온 민족이 술렁술렁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제발 좀 조용해다오, 내가 여기서 편안히 있도록, 내가 이 총독의 지위에서 편안히 있도록 그를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라'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대야에 물을 떠 손을 씻으면서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27:24)"하지 않습니까? 이런 무책임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천 년 동안 욕을 먹지요.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하지 않습니까? 사실은 가야바가 잘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사도신경을 외면서 그를 한번씩 욕하는 것 아닙니까? , 바로 이런 것이 잘못입니다. 엄청난 사건을 앞에 놓고 제 생각만 해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이득만 생각합니다. 그러고로 그는 의로울 수가 없었어요. 진리를 따라 살수가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천부장은 로마 시민을 보호하고, 종교문제에는 개입하고 싶지 않아서 지금 이렇게 바울을 체포해서 가이사랴로 보내는 것이예요. 바울이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구원했습니다, 그리고 당신 앞에 보냅니다, 당신 앞에서 그와 그를 송사한 사람들이 말할 것입니다, 난 더 이상 모르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몰라서 모른다는 게 아니에요. 나는 모르겠어요,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송사한 사람도 당신에게 보낼 테니까 양쪽에 다 들어보고 당신이 마음대로 판단하시오, 라고 책임을 기피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하고 넘어갑시다. 우선, 착한 일은 서둘러야 합니다. 착한 일을 남에게 미루어서는 안됩니다. 아마도 이 때가 천부장이 정말로 귀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듯 비겁하게 남에게 떠맡기고 마는 것입니다. 기회는 늘 있는 게 아니예요. 좋은 자리에 있을 때에 좋은 일 해야 합니다. 힘있을 때에 좋은 일 해야 합니다. 젊었을 때에 좋은 일 해야 합니다. 돈 있을 때에 좋은 일 해야 합니다. 특별히 내 앞에 기회가 올 때에 좋은 일 해야 합니다. 천부장이 조금 더 마음을 넓히고 백부장과 더불어 바울에게 "당신 도대체 누구요?"하고 하룻밤 얘기하면서 말을 들었더라면 그도 예수 믿었을 것이고, 엄청난 일을 한 역사적인 인물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자기는 쏙 빠졌습니다. 천부장 노릇을 몇 년이나 더 해먹었는지 몰라도 그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바울을 만난다는 게 쉬운 일입니까?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오네시모 같은 노예도 바울을 딱 한 번 만나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천부장은 아깝게도 귀중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어요. 다시 말하자면, 착하고 선한 일은 빨리 서둘러야 하고 그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선한 일을 하려면 언제든지 자기희생이 필요합니다.

얼마간의 희생이 없이는 선한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손해를 좀 봐야 합니다. 이것저것 다 챙기고 좋은 일 하려고 하지 마세요. 가만히 보니,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자기 이득도 보려고 합니다마는 이것은 사는 길이 아닙니다. 진리의 길이 아닙니다. 적어도 예수님 말씀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받고 바울을 영접하려면 적어도 바울과 함께 상당한 부분의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것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아마도 천부장이 조금만 더 자기희생을 했더라면 얼마나 귀한 일이 많이 진척됐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선한 일 하려고 할 때, 손에 아무 것도 묻히지 아니하고 오히려 명예를 얻어가면서 하려는 생각은 안됩니다. 오해도 받을 수 있고, 상처도 입을 수 있고, 허물을 쓸 수도 있고 누명을 쓸 수도 있어요. 엄청난 손해를 입을 수도 있어요.

이것을 언제든 각오해야 선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신앙인이 아니고는 진실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요. 지극히 정치적인 사람이고 로마사람답습니다.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있어요. 그 좋은 복음을 들으면서도 몰라요.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갈 때의 그 놀라운 체험을 생생하게 들으면서도 귀가 열리지 않습니다. 마음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이 천부장은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설교를 조금 더 귀담아 들을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는 일을 이렇게 처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꼭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실할 수 있어요. 대단한 위인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기도하고, 적어도 하나님 무서운 줄 알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라야, 신앙의 사람이라야, 진실도 가능하고 선도 가능한 것입니다.

요새 정치적으로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특별히 남북회담이다, 정상회담이다, 하는 일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제가 본래 기도를 많이 못합니다만 요새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마음이 답답해서 아침에도 기도하고, 저녁에도 기도하고, 시간 시간 기도를 많이 합니다. 정말이지 저에게 지혜가 필요하고 용기가 필요합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이런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정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라야 작은 일에든 큰 일에든 간에 진실할 수 있어요.

또 한 가지, 천부장, 이 사람은 소극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그저 편지 한 장을 백부장편에 보내서 떠넘겨버립니다. 그리고 손 털고 마는 거에요. '나는 이젠 무사하다'-아주 소극적이예요. 여러분, 이렇게 소극적인 사람이 되면 죄를 면치 못합니다. 위험도 있고, 모험도 있겠지요. 그러나 언제든지 적극적이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저는 권투시합을 구경할 때마다"공격은 최대의 방어다"라는 진리의 말을 듣습니다. 자꾸 뒤로 물러서다가는 맞아 죽어요. 자꾸 공격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 손을 내밀어야 된다고 합니다. 천부장은 너무 소극적이었어요. 그래서 참으로 유감스러운 사람이 되고 맙니다.

사도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좋은 기회가 왔는데 천부장은 유감스러운 사람이 됩니다. 바울은 왜 이런 엄청난 고난을 당해야 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는 묵묵히 참습니다. 또 당해야 했습니다. 믿음으로 기다렸습니다.

먼 훗날, 그 언젠가 이 모든 일들이 왜 있어야 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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