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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에서 얻은 한 세겔(마태복음 17장 24~27절)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변화산 위에서 달라진 주님의 모습을 뵈었을 때,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그 광경이 얼마나 굉장했던지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습니다. 눈앞의 일은커녕 과거의 일도 가물가물해졌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던것 같습니다. 산 밑의 일도 산 위의 일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죽했으면 처자식 있는 사람들이 "그만 여기 삽시다" 했겠습니까? 눌러앉기만 하면 되겠습니까? 먹고살 일도 생각해야지요. 그런데 예수님, 엘리야, 모세를 위한 장막 셋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네 셋은 어디서 거처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들은 오직 거기에 계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만을 생각했습니다. 그야말로 자기들의 세계는 완전히 부정되는 굉장한 은혜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이 은혜로운 경험을 영원히 지속시키고 싶었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내려가자"하시고 다시 이세상으로 돌아오십니다. 앞으로 있을, 미래의 영원한 세계를 이렇게 일시적으로 잠시 보여주셨던 것일 뿐, 다시 모습을 바꾸어 세상의 육신을 입은 예수님의 모습으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내려옵니다. 내려오다가 앞에서 공부한대로 소란스러운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아홉 제자가 귀신들린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아버지의 청을 듣고도 그 어린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쫓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능력이 없었습니다. 소리는 질렀는데 능력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적을 행한 일이 있는데, 이날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기도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 아니고는 이 능력이 나갈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엊그제만 해도 능력을 행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음으로 크게 망했던 것입니다. 능력 없는 그리스도인, 맥빠진 그리스도인, 무능한 그리스도인, 무능한 제자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의 심경은 착찹했을 것입니다. 변화산에서의 능력은 그처럼 화려하고 굉장한 것이었는데, 땅에서의 일은 이렇게 귀찮습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마음은 '다시 산으로 올라갑시다'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가버나움에서의 일입니다. 회당에 들어가려 하는데 '당신들은 성전세를 내지 않았소. 당신네 선생이 성전세를 내지 않았단 말이오.' 베드로는 "내신다"라고 대답합니다. 돈을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대안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로 가면 무슨 해결이 날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일단 내겠다는 약속부터 해놓고 예수님께 와서 의논을 드립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듣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는 변화산 위에서의 굉장했던 체험과 가버나움에서 되어진 일을 연결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오늘의 본문을 이해하게 됩니다. 굉장한 체험을 가진 채 변화산을 내려오면서 제자들의 무능한 모습을 보고, 가버나움에 들어서니 성전세를 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여 문제에 부딪힌 것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면 이것은 시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하늘나라를 목적으로 살고, 주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높은 차원의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베드로가 이 땅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될 것인지를 말씀해주고 있는 줄 압니다. 첫번째 교훈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며, 두 번째 교훈은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입니다. 여기서 우선 성전세가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0장 11절로 16절에 보면, 온 유대의 남자는 이십 세가 지나면 다 성전세를 내야 합니다. 그 액수는 반 세겔입니다. 한 세겔은 네 드라코마(로마 돈으로)로 네 데나리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보통 하루 일해서 벌 수 있는 돈이라고 볼 때, 반 세겔은 이틀 동안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성전에 바쳐야 하는 것은 일년에 반 세겔입니다. 그러니까 이틀 일한 정도의 수입을 일년의 성전세로 바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임금을 많이 받는 사람도 있고 적게 받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바쁜 때에는 임금이 비싸고 한가한 때에는 임금이 더 싸기도 합니다만 평균적으로 보아 대체로 이틀 정도 일해서 벌 수 있는 돈 정도의 액수를 성전에 바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전국적으로 모아서 성전의 비용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우리가 감사헌금이나 혹은 제사를 드릴 때 드리는 헌금은 말 그대로 헌금입니다 마는 이것은 제물(祭物)과는 다른 의미의 의무금(義務金)입니다. 성전을 유지․수축․복구하기 위해서 쓰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전세에는 가난하고 부하고에 차이를 두지 않았습니다. 이 점도 우리가 한번 신중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일입니다. 가난하니 조금 내고 부하니 더 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해도 내야 하고 부해도 내야 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니 다해야 합니다.
잠시 지나가는 말로, 우리 나라의 세금 제도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세금에 대한 정신이 잘못되어 있는 것 같아요. 툭하면 세무검사 한다 뭐한다 해서 세금을 많이 받아내려 한다던가, 조금 어렵다든지 인심써야 할 일이 있으면 국가가 백성의 세금을 감면해준다고 피아르합디다. 세금은 벌금으로 내는 것이 아닙니다. 뭘 잘못했다고 해서 더 많이 내게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고, 또 가난하다고 해서 감면해준다, 내지 않아도 괜찮다, 부자들은 세금 내고 가난한 사람들은 안 내어도 된다는 따위의 사고방식은 잘못인 것 같습니다.
가난해도 적게는 내야겠지요. 단돈 10원이든 100원이든 국민된 자는 누구나 세금은 내야 한다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무슨 벌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국민이면 당연히 내는 것이다'라는 사고방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서양 어느 나라의 경우를 보니 잘사는 사람이고 못사는 사람이고 간에 일단 세금을 다 냅니다. 그래놓고 12월에 가서 일정 액수 이하의 수입을 가진 사람에게는 정부에서 거두었던 것을 도로 내줍디다. 그 방법이 괜찮아 보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때가서 받으니까 목돈이 되는 것입니다. 그 돈을 크리스마스 때에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가게나 백화점에서 물건이 참 많이 팔린다고 합니다. 어떤 가게는 크리스마스 때 물건 팔아 남은 돈으로 일년 동안 살 수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아무튼 국민의 의무인 세금은 빈부에 관계없이 작든 크든 다같이 책임을 느끼고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참된 세금 정신이 아닌가 합니다.
오래 전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부자 장로님이 목사님을 찾아가 권면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 여집사님 한 분이 홀로 살면서 어린아이 다섯을 키우느라 무척 어렵게 삽니다. 남의 집 빨래를 해주는 등 고생이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분이 주일날이 되면 꼭꼭 5전(5 cents)씩을 헌금합니다. 큰 액수는 아니겠지만 그 여집사님한테는 적지 않은 액수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 장로님은 2불씩을 헌금합니다. 5전의 20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지요. 장로님의 권면인 즉 그 여집사님의 몫까지 자기가 대신할 테니 그 집사님 불러서 헌금하지 말라고 얘기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권면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루는 그 집사님을 불러 "장로님이 당신 사는 것이 너무 어려운 줄 알고 매주 헌금하는 것을 대신 내주겠다고 하니 다음 주일부터는 헌금 안 하셔도 괜찮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여집사님은 앉은자리에서 목을 놓아 우는 것이었습니다. "왜 우십니까?"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여집사님이 대답합니다. "제가 비록 남의 집 빨래를 해가며 고생스럽게 살지만 하나님께 오전씩을 바칠 때에는 더할 수 없이 기쁘답니다. 그런데 이 기쁨을 왜 빼앗으려고 하십니까?" 이리하여 장로님도 목사님도 두손들고 회개했다는 이야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친다고 할 때에 바치는 일 자체가 엄청난 기쁨입니다. 이것을 바침으로써 복 받고 어떻게 되고가 아닙니다. 헌금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선행이나 헌금은 그 행위 자체에서 기쁨과 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전세로 빈부귀천 없이 모두가 반 세겔씩 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의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출입한다면 적어도 성전에서 이틀 일한 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부터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교회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교회에 나가시다가 저희 교회로 나오시는 분들 중에 제가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는 몇 분이 있습니다. 예배당 다 지은 다음에 오셨으므로 자기는 늘 출입하는 것이 괴롭다고 하면서 건축헌금을 하게 해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해야만 마음이 편하겠다는 데야 뭐라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분은 뒤늦게 건축헌금을 바치셨습니다. 또 어떤 분은 교회 오르간 소리에 마음이 쓰인다고 하십니다. 저 좋은 오르간 소리를 들으며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을 늦게라도 감사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래서 방법을 일러드렸습니다. 지난번에 오르간을 살 때에 추가했어야 할 것이 있는데 이번에 그것을 주문할 테니 가지고 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은 헌금을 하셨고, 8월이 되면 추가설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자기 몫을 스스로 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전세는 온 국민이 내고 온 시민이 내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렇지 않습니까? 가난하고 부하고에 차이가 없습니다. 가난해도 그건 있어야 합니다. 감사절 때의 일입니다. 매일같이 얻어먹는 거지가 정상적으로 생활하는 사람보다도 오히려 더 많은 헌금을 가지고 왔더랍니다. '얻어먹고 살면서 어떻게 그토록 많은 헌금을 가지고 왔느냐'고 목사님이 물었답니다. 거지가 대답합니다. '나도 하루 세 끼를 먹지 않습니까? 남들처럼 밥상을 제대로 받아먹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 세 끼 먹는 것은 같습니다. 먹었으니 하나님께 감사해야지요.' 하긴 그렇습니다. 세 끼 먹고사는 것은 거지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거지도 헌금해야 합니다. 부자라고 해서 다섯 끼 여섯 끼씩 먹는 것은 아니니 먹는 입장에서 본다면 거지와 똑같은 것입니다. 헐벗지 않고 옷 입고 산다는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것은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이 장소. 역시 그렇습니다. 남이 지어놓은 예배당에 내가 출입한다는 것, 사실은 떳떳하지 못한 일입니다. 내 의무는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국가에 대해서도 시민으로서의 납세의 의무, 병역의 의무, 다 감당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해서 빈부의 차이 없이 똑같이 의무를 감당하기를 바라십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무슨 특별한 헌금을 할 때에도 제가 늘 부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액수의 많고 적음은 개의치 말고 모두가 참여하자는 것입니다.
'남들은 천만 원씩 한다는데 나야 십만 원, 만 원따위 해서 뭐하나.' 이런 생각은 금물입니다. 과부의 엽전 두 닢이 더 귀중한 것입니다. 많건 적건 간에 함께 참여하는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관해서는 부자의 더 큰 돈도. 가난한 사람의 더 작은 돈도 원치 않으셨습니다. 똑같이 반 세겔, 일년에 반 세겔씩을 내라, 그것으로 성전을 건사하라 하셨습니다. 성전을 한번 봅시다. 그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이 온 국민의 반 세겔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의미가 좋지 않습니까? 부자 한사람이 다 내고 다른 사람들은 구경이나 하게 되었다면 말이 안됩니다. 성전세의 근본정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성전에 대해 원하셨던 바임을 생각할 때, 거기에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전세를 걷는 방법을 보아도 그 점은 잘 드러납니다. 성전세는 유대력으로 아달월에 거두었습니다. 아달월이란 우리의 3월 무렵에 해당합니다. 아달월 1일에, 즉 우리의 3월 1일에 고시를 합니다. 온 국민에게 알립니다. 그리고 15일부터 24일 사이에 각 지역, 각 회당에서 거두어들인다고 합니다. 이때에 못낸 사람들은 그달 25 일 이후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을 때에 직접 가지고 가서 내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회를 여러 번 주어서 아무도 빠지지 않도록 합니다.
그러면 오늘의 본문을 봅시다. 회당에 들어섰는데 "당신네 선생도 세금을 내야 되는데 내지 않았다"고 하자 베드로가 "내겠습니다" 해놓고 예수님께 아룁니다. 생각해보겠다거나 좀더 두고보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내야 할 것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당연시하고 예수님을 찾아 의논합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문제의 해결도 주시고 교훈도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 교육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건에 부닥치든지,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어떤 환자를 고치시든지간에 만나는 순간에 그것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심오한 진리를 가르치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건을 교육의 소재로 쓰셨습니다. 예수님의 행위, 말씀, 그 어느 것도 교육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한 장 앞인 16장에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예수님께 신앙고백 한 바 있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거든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오늘의 본문에서 베드로의 그 고백 속에 들어 있는 메시야 의식, 메시야 사상의 현실성을 가르치려 하십니다. 메시야라고 해서 지금 당장 '당신은 왕입니다. 우리는 당신 옆에 앉을 장관입니다'하고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갈 성격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겨자씨와 같습니다.
복음은 겨자씨와 같습니다. 씨는 틀림없이 씨요 생명은 분명 생명인, 질적으로는 완벽한 것이지만, 일단 땅에 떨어져야 자라서 겨자나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만왕의 왕이요 메시야시지만 현실 속에서 어떻게 고백되어야 하며, 저들의 세계. 저들 사이에 어떻게 나타나셔야 하는지를 말씀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점진적으로 저들에게 나타나시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현실 안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셨습니까? 장차는 만왕의 왕이요 온 세계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본래도 예수님께서는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지금도 내적으로, 내용적으로는 분명히 왕이십니다. 메시야십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그랬지만 사실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지혜롭게 대처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왕됨이 그대로 나타나게 될 때에 저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정치적인 적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같은 큰일날 오해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정부가 가만둘 수 없고, 헤롯왕이 그냥 둘 수 없고, 대제사장이 그냥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나타나실 때에 저들은 그 왕이라는 것을 세속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적으로 대할 것이며, 그 당장에 저들과 적대 관계에 서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저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으셨습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 성도의 생활로 시선을 돌려봅시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지혜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물론 질적으로는 완전합니다만 양적으로는 우리가 당장에 완벽한 성도로서 세상에 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층돌을 불러오는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자기 계시가 여기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성전세를 받으실 분이지 내실 분이 아닌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 당신이 왕이요 메시야임을 분명하게 재확인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비록 우리가 땅에 살지만 하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자기 신분에 대한 정체 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에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에는 신학적으로 말하여 성육신적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말씀으로 오셨지만 육신을 입어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야시면서 종의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대로 그는 분명히 왕이지만 육신을 입어 스스로를 비하시킴으로 종의 멍에를 메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신앙고백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오해 없게 하기 위하여-오해될 것이 아닌 오해, 먼 훗날에는 이해가 될 오해이지만 지금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성전세를 내지 않는 것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비난을 공연히 받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부득불 그 세금을 내게 하십니다. 덕을 이루기 위함이요, 큰 역사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 좋은 예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일입니다. 세례란 본래 죄인이 받는 것입니다. 죄인은 세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받는 것입니다. 죄를 씻는 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표입니다. 그런데 왕이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당황해서 주객이 바뀌었다고 사양하려 합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베풀라,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라고 말씀하시며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 세례 자체에 성육신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대표해서 하나의 완전한 사람으로 나타나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성전세를 내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백성의 위치로, 사람의 위치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을 '비하'라고 합니다. 스스로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세금을 내실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셨습니다. 율법에 매일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매이셨습니다. 율법의 모든 규범에 붙잡힐 필요가 전혀 없는 자유 하신 분인데도 지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요 길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 살면서 때때로 보면 '이런 일은 안 해도 좋겠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 하나로 밀어붙이겠다'라고 생각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군대에 나가는 일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인데 이것을 꼭 해야 하나?'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어떤 교파를 보면 '나는 총을 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인 내가 누구한테 총을 쏘겠는가'라고 하면서 매를 맞아가면서도 집총(執銃) 거부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신앙을 빙자해서 국민의 의무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께 바친다고 빙자하여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바칠 것이므로 부모에게 줄 수 없다'고 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을 그런 식으로 빙자하면 못씁니다.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오늘 본문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복음서에는 베드로와 관련된 이적이 참으로 많습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고,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게 하여 물고기를 많이 잡게 역사 하셨고, 물위를 걸어오게도 하셨습니다. 또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드로가 칼로 쳤을 때, 떨어진 그 귀를 다시 붙여주신 것이라든가 오늘의 사건들이 베드로와 개인적으로 관련된 이적들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큰 이적입니다. 그러나 이 이적이 있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중요한 문제가 전제됩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는 물고기의 세계까지도 다스리시는 주관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고기를 몰아주시고 흩어주시는 능력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미물의 세계도 주님의 능력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베드로를 주관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어느 시간에 가서 낚시를 드리우느냐 하는 것까지 알고 계셨으며, 베드로를 통해서 역사 하는 능력이 그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중요한 점은 베드로의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셨을 때 '될까요?' 따위로 추호라도 의심을 하거나 불순종했다면 이 이적은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치에 맞든 안 맞든, 될는지 안될는지를 개의치 않고 오직 시키시는 대로 순종합니다. '물고기를 잡으라' 하시니 잡을 뿐입니다. 아름다운 순종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실로암 연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하셨을 때, 그대로 순종하여 눈을 떴던 것과도 같이 베드로는 군 말없이 따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한 것이요, 말씀이 있어서 이루어진 이적이었습니다. 말씀이 없고는 이 순종, 이 행동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했더니 그대로 되니라'-이것이 이적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인 된 의무가 많습니다. 국가적, 사회적, 가정적으로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에 대해서는 마치 성전세를 반 세겔 내야 하는 것처럼 빈부의 차이 없이, 내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내가 치러야 할 의무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혹 나 대신 다른 누가 내주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내가 해야 될 몫은 내가 해야 합니다. 또 신앙을 빙자해서 어떤 의무든 소홀히 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의무를 수행할 때에는 겸손히 순종해야 합니다. 모든 일의 깊은 속에는 하늘에 속한 신분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금을 내지 않으실 분인데도 내셨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신앙인으로서, 신앙인의 자세로 밀어붙여야 될 일일지라도 덕을 세우기 위해서 융통성 있게 따라주어야 할 일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남들로 오해 없게 하기 위해서 감당해나가야 할 의무가 세상에는 있는 것입니다.
필요한 이적은 이 겸손, 순종과 함께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나가는 길에 필요한 이적은 반드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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