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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인사(4장 21절~23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본장으로 빌립보서 강해를 끝내게 되겠습니다. 이미 첫장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책의 별명이 둘이 있는데 그 하나는 '옥중서신'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과 의미를 중요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는 재판도 없이 몇 년씩 감옥에서 머물다가 죽어 가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요즘처럼 인권이 보장되는 때가 아닙니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지하감옥에서 사도 바울은 그가 세운 빌립보교회를 향해 편지를 씁니다. 그러니까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이 감옥 속에 있는 사람한테 쓴 것이 아니라 안에 있은 사람이 밖에 있는 사람에게 써 보낸 편지입니다.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는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엡4:1)"라고 말하고 있고 디모데후서에서는 내가 감옥에서 편지를 쓴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이처럼 어떤 형편에서 썼느냐가 그 편지의 무게를 말해줍니다.
빌립보서의 두 번째 별명은 '희락의 복음'입니다. 감옥에서 쓴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합니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바울 스스로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감옥에서 어떻게 고생하고, 얼마나 춥고 ,얼마나 배고프고, 또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자기 형편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기쁨에 충만하여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두 가지 특징으로 인해서, 이 편지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고난의 문제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고난 당하는 자에게 주는 고난의 복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그러면서도 희락의 복음이기에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내다보면서 우리 성도의 본분을 다하게 하는 복음입니다. 슬픔을 이기는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를 마감하면서 끝 부분에 문안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감옥 안에서 감옥 밖의 사람들에게 문안하는 내용이라는 점을 잊지 맙시다. 여기서는 사사로운 문안을 하고 있는데, 어쩌면 자기 형편이나 괴로운 사정 같은 것을 언급할 만한데도 전혀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세 가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스스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하고 고난 당하는 것을 기뻐하며, 또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복음의 역사로 인하여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밖의 사람들이 열심을 내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워서 전도를 못하던 사람도 바울을 생각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과 경쟁하던 사람들은 '우리가 열심히 전도하면 바울이 얼마나 배가 아플까'하고 그를 괴롭힐 생각으로 열심을 내었습니다. 남을 괴롭히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데 이런 것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어찌되었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기뻐하리라"고 본문 1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다는 기쁨, 또 내가 갇힘으로 인하여 밖에서 이루어지는 긍정적인 사역이 모든 것을 내다보며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고생 좀 해서 이것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돌아간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제가 옛날 인천에서 살 때에 연탄 배달하는 할아버지가 연탄 나르면서 휘파람을 불며 노래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얼굴은 새까만 채로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이 그리 즐거우십니까?"고 물었더니 그 할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내가 이렇게 일을 하면 우리 집 두 딸아이가 공부를 할 수 있고, 저녁 때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 고생한다고 얼마나 위해 주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좋아서 즐겁습니다. 어미가 5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 딸들은 어미 없이도 명랑하게 자라고 공부도 참 잘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기뻐하는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나 한 사람 고생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나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담력이 생기고,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더 힘써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잘된 일이다, 그러므로 나 하나 고생하는 것은 상관없다는 마음입니다. 그의 기쁨은 단순히 무슨 철학적인 기쁨이 아니라 신앙적인 기쁨입니다. 그 나름의 깊은 선교적 이해가 있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기쁨의 문안과 함께 교회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생각하기에 빌립보교회를 향해 이 같은 편지를 씁니다.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이롭게 하기보다 남을 위하고 남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같이 기뻐하라는 문안의 편지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위한다고 말은 많이 하지만 참으로 상대방을 위한다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런데 위한다고 하면서 이리저리 겉돌다가 결국은 자기를 위합니다. 전부가 자기를 위하기 때문에 문제이지 정말 상대를 위한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부모가 결혼을 반대한다고 아들이 집을 나가는 등 문제가 아주 복잡해진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화해시키기 위해 그 집에 갔습니다.
그 부모에게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고 물었더니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가, 불행하기를 바라는가" 물었더니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 되었습니다"하고 일어서 나오려니까 "되기는 무엇이 되었습니까? 우리 아들은 그 아이와 헤어져야 돼요"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그 아들을 사랑한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해야지 아들을 슬프게 만들면서 아들을 사랑한다고 하니 될 말이냐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실 여러 가지 걱정도 하고, 도덕적인 이야기, 윤리적인 이야기, 별 이야기를 다 하고 있지마는 다 헛것입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걱정될 것도,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이 참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위해 보탬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문안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남을 위로하고 남을 문안하는 자격은 고난 당하는 자에게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남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만사가 형통한 사람이 남을 위로할 때에는 오히려 '그래, 너는 형편이 좋으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지. 어디 나 같은 처지가 되어 보아라, 그런 말이 나오는지!' 하는 원망을 듣기 십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문안하고 위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가난한 자가 부자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또 건강한 사람은 병든 자를 위로할 수 없으나 병든 사람이 건강한 사람에게 진정한 위로의 말을 할 수는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도 그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기 때문에 지금 누구에게든지 문안을 할 자격이 있고 또 무슨 말을 해도 상대방에게 감동을 줍니다.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한다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생각해 볼 때에 수난자가 위로할 자격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말씀 가운데에서 그 문안의 대상을 찾아봅시다. 21절에"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하는 말이 나옵니다. 성도는'하기오스'입니다. 이 성도라는 말의 신학적인 의미를 네 가지측면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성도라는 말의 의미는 참 이스라엘이라는 뜻에서 주어지는 이름입니다. 성도란 보통사람과 섞여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무리,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특별히 구별된 백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에 나타난 바울 신학을 훑어보면 그가 말하는 참 이스라엘은 지역적인 의미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기독교인이요 그리스도인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소위 민족적 의미의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 영적인 이스라엘의 예표(prototype)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을 바로 설명하기 위해서 역사적인 예표로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 무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철저한 신학입니다. 그런고로 참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인이고 바로 이 그리스도인이 모인 곳이 교회요, 이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성도, 거룩한 무리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로 '선택받은 무리'라는 높은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존재론적 의미가 있습니다. 도덕적 의미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보다 더 깨끗하다, 다른 사람 먹는 것 안 먹고, 윤리적으로 몸도 마음도 남보다 깨끗하다는 의미에서 성도가 아닙니다. 여기서 성도라는 말의 특별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 즉 그리스도의 선택을 받은 사람,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중생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오묘한 경륜 속에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십니다. 여러분,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때때로 교인들이 이런 질문을 해옵니다. "나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것을 감사합니다마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참 착한 분들인데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천당을 갔을까요? 못 갔을까요?" 이것은 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착한 사람이니까 복음을 들을 기회만 있으면 틀림없이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제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사실뿐입니다. 그 부모가 복음을 전하면 믿을 사람인지 아닌지는 전해 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복음을 들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또 듣는 사람이 많은 중에도 마음 문을 열고 영접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오늘도 어떤 분과 일본의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100년이나 먼저 복음이 들어갔는데 교인이 아직 1%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20%에서 25%까지 보고 있으니 얼마나 굉장합니까? 가끔 일본 목사들이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데 얼마 전에도 30여 명의 목사가 와서 우리가 주일예배 드리는 것을 보고는 감격해하면서 "우리는 왜 이렇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예수를 이렇게 믿지 못할까요?" 하고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모릅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달리 할말이 없습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적이고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그밖에는 달리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늘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것이 북한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40년간 전혀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이렇게 가깝게 살면서 이 밝은 세상에 살면서 한번도 예수님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고 성경책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그런고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무리라는 것은 복음이 전해지는 경로와 성령의 감화로 그 마음 문이 열리고 또 그 믿음이 굳게 서도록 하나님께서 많은 교훈과 때로는 책망과 시련을 통해서 그 믿음의 뿌리를 튼튼하게 내리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일날 많은 사람이 교회에 나오지만 이 수요 기도회에 나오는 사람은 선택받은 사람 중에서도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더구나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교인은 한 단계 더 높습니다. 그렇게나오고 싶어하면서도 많은 사람이 새벽기도회에 못 나옵니다. 왜 못 나옵니까? 이유야 가지각색이겠지만 어쨌든 이것은 알아야 합니다. 선택받은 무리, 내가 가진 신앙, 이것은 다 내 것이 아닙니다. 성도란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의미요 하나님이 구별해 놓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 선택의 문제에 대하여 유명한 버거프의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고아원에 와서 한 아이를 양자로 택했습니다. 인물을 본 것도, 특별히 고른 것도 아니요 그저 많은 아이 중에서 원장이 정해 준 아이 하나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얼마 후 이 아이가 양아버지와 합께 고아원에 놀러 왔는데 얼굴이 몰라보게 훤해진 데다 훌륭한 마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부러워서 그 양아버지에게 항의했습니다.
"이 아이만 데려가고 나는 안 데려 갔으니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고아원에 있을 수밖에 없는 형편의 아이들 중 하나를 선택해서 구제해 주었기로 이것이 어찌 불공평한 처사라고 비난받을 일이겠습니까? 이 점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 중에서 나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 뿐이요 왜 나는 택하고 저 사람은 버렸느냐는 항의가 하나님 앞에 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있을 자리에 있을 뿐이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구별된 무리라는 뜻에는 도덕적 의미도 따라갑니다. 성도란 모름지기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고 우상으로부터 떠난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방 종교와 세속적인 생활 풍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믿는 사람들한테는 기독교인만이 가지는 높은 차원의 도덕률이 따로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남의 물건 도둑질하지 않으면 죄가 없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랑하지 않은 것이 죄가 됩니다. 세상에서는 남의 물건을 빼앗지 않으면 좋은 사람이라 인정받지만 그리스도인은 도와주어야 할 시간에 외면하는 것도 죄가 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레위사람도 제사장도 살인죄를 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도 내버려 둔 것이 살인한 것만큼이나 큰 죄였습니다.
넷째, 성도란 율법주의로부터 구원받은 구별된 무리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옛날 로마시대에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없는 사람, 곧 무신론자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저들이 섬기는 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비도덕적이라는 오해도 받았습니다. 당시 노예는 짐승 취급을 했는데 기독교인들이 이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니까 도덕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다섯째,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성도라는 말은 앞으로 다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갈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주님 오실 때에 하늘나라에 갈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 모여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의 재림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사람들, 세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마음과 뜻을 항상 하늘나라에 두고 사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란 구원과 약속과 그 신령한 생활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에 마지막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의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의 몇이니라." 가이사집 사람 -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가이사(Caesar)는 황제를 가리키는 말인데, 가이사집 사람이란 꼭 그 친척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정치권 밑에 있는 측근자를 말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왕족이요 공식, 비공식적으로 황제에 속한 특별 귀족으로서 많은 사람에게 영향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각 지방에 많이 나가있었고, 사람들은 '가이사집 사람이다'하면 그를 존경하고 우러러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덧 이 사람들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22절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좀더 설명을 덧붙이면 '로마 황제의 집에 속한 고관들 가운데 몇 사람이 나 때문에 예수를 믿고 친하게 지내는데 이들이 멀리 있는 당신들에게 문안한다'는 뜻입니다. 여기 암시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빌립보는 로마의 속국이기 때문에 '가이사의 집'하면 "아이구 이것 굉장한데"하고 놀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이사 집'을 들먹이는 것은 결국 정치적으로 기독교를 높이는 것입니다. 내 옆에 있는 노예 몇 명이 너희에게 문안한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자 빌립보 사람들은 복음 전파의 길이 막혀 버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안 바울은 본문 1장에서 도리어 그가 감옥에 있기 때문에 친위대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다고 말한 바 있고, 이번에는 또 가이사 집 사람들도 예수 믿게 되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편지에는 간단히 썼지만 에바브로디도가 돌아오면 빌립보 교인들이 그에게 물어 볼 것입니다. "가이사 집 사람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그러면 에바브로디도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겠지요. "아, 이것은 비밀이라 이름을 밝힐 수 없으나, 로마 황제의 친척들 중에서 이런저런 사람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영혼이나 인권의 가치로 볼 때에 인간은 똑같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선교적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군대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부대에 예수 잘 믿는 사단장이 있는 동안은 군목 활동이 최고로 잘 됩니다. 사단장이 기독교인인 경우에는 교회 세우는 일도 쉽습니다. 부대 안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세우도록 사단장이 아예 장소까지 딱 지정해 줍니다.
이처럼 군대에서는 사단장, 군단장이 예수를 믿으면 전도하기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회사에서는 사장이 믿으면 전도가 잘 되고 대학교에서는 존경받는 교수가 예수를 믿으면 전도 활동이 활발해집니다 대학생들이 기독교 모임을 가질 때에 그 교수가 나와서 떡 앉아 있기만 해도 저절로 훌륭한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왕을 위해 기도하라, 고관과 권세자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 은근히 말합니다 .'가이사집 사람들이 예수 믿고 너희에게 문안한다. 내가 여기 와서 아무 것도 못한 것 같으나 천만의 말씀, 벌써 전도는 다 되었다.' 사실 그로부터 300년 후, 물론 많은 핍박이 있었지만 이들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로마를 점령합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사실까지 미리 볼 수 있었다면 아마 감옥에서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가 여기까지는 모르고 죽은 것 같지만,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앞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알라' '가이사집 몇 사람이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의 선교적 의미와 하나님의 높은 선교적 경륜을 말하는 것입니다.
썩어서 열매맺는 밀알의 역할 말하는 것이요 겨자씨와 같이 시작되는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룩과 같이 스며드는 복음의 역사를 내다보며 오늘 이와 같은 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23절을 봅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주 예수 그리스도 여기서 '주'는 사도행전적인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호칭이 바로 '주'입니다. 또 '예수'는 개인적인 이름이요 히브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도'는 직명(職名)입니다. 메시야라는 뜻이 아닙니까? 그런고로 이세 마디 속에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말을 쓰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라는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한 것처럼 축복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능력 있기를 빕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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