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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몽학선생(갈리디아서 3:23-29)

by 【고동엽】 2022.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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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학선생(갈리디아서 3:23-29)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오늘 본문에 나온 몽학선생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지닌 비사 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몽학선생이라는 말을 항상 대하면서 그 뜻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채 넘길 때가 없지 않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에는 성경에서 몽학선생이라는 말을 읽으면서 꿈을 해몽하는 사람인가 보다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목사님이나 누구 어른들께 물어보지도 않고 그저 꿈 몽자를 써서 그러려니 하고 지냈던 것인데, 철이 나면서 사전을 찾아보고서야 몽학선생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어 성경에는 튜터(tutor;가정교사)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그 뜻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어떤 영어성경에는 트레이너(trainer;훈련자) 혹은 카스토우디언(custodian;후견인, 관리인)으로 표현되는 등 여러 가지 단어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은 어쨌든 그 뜻은 후견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후견인, 곧 몽학선생은 옛날 우리 나라의 양반 가정에서도 있었던 제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몽학선생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그 개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늘 전하고자하는 진리를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옛날 궁전이나 양반 가들의 가정에서 있었을 뿐 서민들에게는 있었던 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에 관한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야 이해를 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러면, 이제 몽학선생이라는 말을 이해하기에 앞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였느냐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바울이 말하는 주제는 언제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이와 같이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며, 그것은 오직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원론을 전개함으로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믿고 지켜온 율법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 동안은 오직 율법이라는 교리와 자세로 지내왔는데 오늘에 와서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바뀌어지게 되었으니 자연 양자의 관계성을 논해야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율법주의를 은혜로써 극복하는 교리를 전개해 나갑니다. 그리고 거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계단 더 나아가 그 은혜를 법적 관계에서 설명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율법의 논리에 의해서 설명해 나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아도 사도 바울은 참으로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의 신학적인 수준과 논리적인 전개는 20세기의 오늘에 와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실로 높은 경지의 변증적인 이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첩경이 되는 것은 그가 설명하는 율법과 은혜에 대한 이해를 갖는 일입니다. 이는 루터의 신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근간에는 율법과 은혜의 문제를 교육학적으로 풀이하는 분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과 은혜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 나가는 교육 방법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울 때에도 적당히 때리고 적당히 칭찬해야 합니다. 만약 그러한 것의 균형을 잃고 너무 자주 매질을 하거나 많이 때리면 의지가 죽어버리게 되어 의기 소침한 아이가 되고 맙니다. 반면에 너무 위해 주기만 하면 영영 버릇 나쁜 아이가 되어 방종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왼손으로 때리면 오른손으로는 어루만져 주는 이러한 균형이 잘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균형이 잘 잡히지 않으면 그 자식은 버리는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과 은혜의 문제는 어제나 오늘이나, 교육학적으로도 중요한 원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왼손은 율법이요, 하나님의 오른손은 은혜라며 하나님께서는 그 두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울이 생각하는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은혜의 대표자인 아브라함과를 대조하는 일입니다. 사실 이 모세와 아브라함, 아브라함과 모세를 어떻게 균형 있게 바로 이해하느냐하는 것에 기독교의 교리를 이해하는 첩경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를 믿고있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율법과 은혜의 관계는 충분히 이해할 정도가 되어야 믿어야할 바의 신앙이 굳게 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느 신학자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 자체가 말하고 있는 기독교의 진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는 그리스도인이 성숙되는 단계에서는 반드시 이해해야할 기본적 교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며칠 전 우편으로 책이 한 권 우송되어 왔기에 보았더니 "박태선 장로가 하나님이다"라는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표지를 넘기고 보니 사진을 근사하게 내어놓고는 이 사진은 함부로 다루지 말라고 써놓았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정신 나간 사람이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책을 읽어보니 허황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도 돈을 많이 들여서 인쇄를 하고 그것을 또 우편으로 부쳐 곽 목사까지 설득을 시키겠다며 나오는 것이란 말입니다. 저는 그 책을 보고서 왜 이렇게 허황한 소리들에 사람들이 빠지느냐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정신병자가 아니고서는 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이야기들인지라 인쇄소 사람들이 식자를 하면서 얼마나 웃었겠는가하는 생각이 먼저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이와 같은 허황한 소리에까지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오대양의 집단자살 사건을 문제가 시끄럽습니다만 은 그것도 소위 케이(K)교단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까? 알기로는 그것이 이미20여년 전부터 한국교회를 교란시켜 왔으며, 그럼에도 따르는 사람이 수천 명이 된다는 것인데 마침내 유례없는 비극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느냐고 할 때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어떤 분은 이상한 교리가 있다고 하며 한번 알아보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매우 건방진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자체도 아직 다 모르는 처지에서 적을 알겠다며 나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모세와 아브라함을 비교하는 입장에 돌아가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을 보는 교리의 핵심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고 하는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은 것은 행함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의롭게 인정하여 주심으로 구원을 얻게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구원을 얻는 일에 있어서 원천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모세 이전, 즉 율법이 모세를 통해 가르쳐지기 이전에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교리가 율법에 앞서 있어왔던 것이며, 그것은 비록 시간적인 문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근본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율법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토록 애써 가르친 율법의 기능은 무엇이며, 그 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을 버리거나 결코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율법과 은혜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인데, 사도바울은 율법을 폐기하거나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율법 자체를 은혜 중심,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풀이합니다. 이와 같이 율법의 의미를 근본 의미인 은혜로 돌아가서 풀이하고 있다는 데에 바울의 천재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바로 그와 같은 율법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하여 오늘본문에 기록한 대로 율법을 가리켜 "몽학선생으로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비유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바와 같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은혜가 선포된다면 아브라함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이에는 모세, 곧 율법이 존재합니다. 바로 그 율법이 몽학선생의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일단, 율법에 매여 그 율법 안에서 양육되어진다고 하는 이러한 관계를 몽학선생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본문에 이어 4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보다 분명하게 그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부득불 어렸을 때에는 어느 기간 동안 몽학선생 하에 있게 된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몽학선생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그 어원을 한번 풀이해 봅니다. 몽학선생이라는 말을 헬라 원어로는 '파아이다고고스'라고 하는데, 머리 부분인 '파이도스' 라는 말은 철모르는 아주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때에는 그저 아무 것도 모르고 말썽만 부리는 것이어서 교육학에서도 말하기를 그런 나이에는 자연도 미워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무이든 꽃이든 가라지 않고 마구 뜯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런 기간의 어린아이를 가리켜 파이도스라고 하며 그 다음에 이어지는 '아고고스' 라는 말은 인도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파이다고고스라는 원어의 뜻은 어린이를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고대 헬라 사람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이 파이다고고스가 가르치는 어린아이들의 연령은 여섯 살에서부터 열 여섯 살 까지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열 여섯 살이라고 하면 상당히 자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그 때가 더욱 어려운 기간입니다. 아무튼 여섯 살 때부터 열 여섯 살까지의 기간을 몽학선생 아래에 둔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귀족의 가정이나, 경제적인 여건이 문제가 되지 않는 여유 있는 가정에서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고자 할 때 이 기간 동안을 몽학선생에게 맡겨서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몽학선생이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 그 하는 바가 여러 가지로 많겠습니다 만은 우리 나라의 몽학선생은 아주 어렸을 때에는 쉬운 천자문을 가르치고 예법을 가르치는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침에 일어나서 부모님께 문안드리는 것을 비롯하여 앉고서는 언행의 일체를 간섭하며 가르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모님께 문안드리는 것을 부모님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부모님 자신이 "아침마다 일어나서 나한테 절을 하라."고 한다면 그대로 잘 통하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몽학선생이 있어서 그 모든 것들을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배이게 버릇을 가르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와 히브리의 몽학선생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학교를 오고 갈 때에도 동행을 하면서 그 출입의 전부를 간섭합니다. 그러니까 한 어린아이에게 전적으로 한 사람이 달려서 열 여섯 살까지 간다는 것이며, 열 여섯 살이 지나야 후견인이 떨어지고 비로소 자유롭게 혼자 왕래할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해 보면 거기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혼자서 다닐 수 있는 거리가 못됩니다. 특별히 개들이 많고 도적도 많으며, 아이들을 유괴해 가기가 쉽고도 많은 때에 돈 많은 귀족의 자녀가 혼자서 밖을 다닌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반드시 후견인이 따라다녀야 했던 것인데, 이 후견인으로는 물론 일반인도 없지는 않았으나 대체적으로 힘이 세면서도 성품이 좋고 믿을 만한 노예들을 세워서 돌보게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다른 일은 그만 두고 내 아이만을 맡아서 단정하고 훌륭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줄 것을 부탁 받은 이것이 바로 파이다고고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비록 왕자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가 어린아이인 이상 이파이다고고스 밑에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란 왕자이든 아니든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똑같이 맞고 때리며 욕하기 마련이요, 불의와는 상관없이 도둑질까지도 재미로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이들이란 분별력도 없거니와 스스로 자기 조정이 안 되는 유치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후견인이 필요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 결과 41절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후견인 밑에서 종과 다름이 없는 생활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몽학선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중생한 사람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 있을 동안에는 율법에 매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에는 마음으로는 예수를 믿으나 아직도 버리지 못한 좋지 않은 버릇들이 남아 있어서 아차 하면 그대로 튀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오랫동안 잘못된 습관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고치려면 매우 힘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나오는 것도 오랫동안 습관이 되고 몸에 익은 분들은 의례히 그날이 되고 시간이 되면 교회에 나갈 줄을 알지만, 처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입니다. 더욱이 새벽에 일어나서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새벽 기도가 익숙해지려면 적어도 3년은 걸려야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만사가 다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매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치한 시절을 지나 성숙해지면 그 때에는 자유인이 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이것 하지 말라, 저것 하지 말라며 거의 매사를 저지하다가도 자랄 만큼 자라고 나면 마음 대로인 것입니다. 그래서는 어렸을 때에는 귀가 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야단을 맞고 벌을 받아야하던 것이 어느 나이가 지나고 난 다음에는 밤을 새고 들어온다 하여도 상관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느 순간까지는 엄한 간섭을 받아야 제대로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굳이 오른 손으로 수저를 잡는 것이나 걸음을 걷는 일까지도 쉽게 배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크고 작은 동작 하나 하나는 상당한 후견인의 강한 간섭을 받은 훈련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계명을 보면 열 가지 계명 중 "하라"는 것은 둘 뿐이고 "하지 말라"는 것은 여덟이나 됩니다. 그러니 만큼 어느 수준까지는 율법에 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하지 말라"에 매여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라"는 그 선에 놓여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무한한 자유를 느끼면서 아무런 구속함이 없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이 대로인 것입니까? 아니면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지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로 안 된다고 하는 여기에 율법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서 아는바 대로 옛날 서당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 졸리는 것을 막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머리맡에 바늘이나 송곳 같은 것을 매달아 놓아 꾸뻑하고 졸게되면 거기에 찔려서 잠을 깨게 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다 율법인 것입니다. 아직도 다듬어지지가 않고 세워지지가 않은 유치한 때에는 이와 같은 강한 율법의 제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율법에서 세 가지의 역할을 생각나게 됩니다. 먼저는 시민법으로서의 율법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율법은 하나의 민법입니다. 동시에 율법은 이스라엘 사람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죄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이를 위해 갈라디아서 3:19말씀을 보면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가 없고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율법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죄가 없고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는 곳에는 율법 또한 필요치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범죄함이 있고 계속 죄에 대한 가능성이 있으므로 율법은 항상 있어야 합니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고 죄를 지은 결과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그 형벌까지도 가르쳐 줍니다. 율법에 기록된 형벌들을 보면 "돌로 쳐죽여라."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등 참으로 무서운 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엄한 벌들이 있기에 죄의 길을 가지 않도록 몽학선생 밑에서 인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거울을 보지 않는다면 비록 굴뚝을 청소하고 나온 후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얼굴에 새까맣게 묻은 그을음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율법을 봄으로 간음, 도적질, 살인 같은 것들이 죄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율법이 없어도 되는 충분한 양심의 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14-14). 그러나 범죄하여 죄에 익숙한 존재가 되므로 죄에 대한 감각이 흐려지고 둔해져서 이제는 죄인지 의인지 조차도 알 수 없는 상태에 와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율법을 주어서 바른 죄의식을 갖게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몽학선생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변증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는 말은 간접적으로는 율법이 우리를 은혜의 길로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로 나와서 영생의 길을 묻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19:16-22, 18:18-23) 거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시게 되는데 이 때에 그 사람은 율법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같은 말씀을 들은 그 사람은 심히 근심하며 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과연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면서 기다리신 대답이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선생님 어떻게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지키려고 하여도 저로서는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만이 구원을 얻는다면 저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하고 나왔더라면 예수님께서는 간단하게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교만하고 건방져서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하므로 정말 지켰나 안 지켰나를 어디 시험해 보자시며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시니 여기에서 넘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율법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정말 율법을 바로 지켜보겠다고 노력하면 하느니 만큼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오직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구원받을 길은 없는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죄의 문제를 자꾸만 깊이 생각하고 보면, 요즈음 같이 어려운 때에는 살아있는 것까지도 죄가 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율법적으로 생각해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베풀지 않는 것은 도적질하는 것이다"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격언이 있는데 이는 생각해 보면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이겠습니까? 또한 베푼다면 어디까지 베풀어야 도적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율법을 놓고는 아무도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예수님 앞에 나온 것도 그 때문인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인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다 지켜보았으나, 그것으로서는 안되겠기에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영생의 도리를 묻고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진실해 보겠다며 애쓴 사람은 진실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정말 지키려고 했던 사람은 그 일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지킨다고 해보았자, 지키지 않는 것과 오십 보 백 보일 뿐 그게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율법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자기가 의를 행했다는 말을 조금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나 저러나 다 죄인으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행하는 것, 그 무엇이고 죄 아닌 것이 어디 있더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오직 은혜와 오직 긍휼로 구원에 이르게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는 그 무서운 율법은 몽학선생이 되어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여기에서 나아가 율법은 그리스도인이기에 지켜야하는 중요한 생활윤리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의 원하심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하나님의 마음의 계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율법을 대하는 것은 벌을 면하고자 하거나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형벌이 무서워서도 아니며, 이것을 지켜서 구원을 받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하나님의 뜻이 여기 있으니까?'하는 생각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식을 지키는 것도 '이것 지키지 않으면 벌받는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안식일을 주셔서 나로 하여금 쉬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가'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범사에 감사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이제는 율법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모세의 때가 지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더 이상 몽학선생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로부터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는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감사와 기쁨에 가득찬 감격 속에서 그저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유로움 속에서 의롭게 살아가는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것은 안되고, 저것은 못한다며 벌벌 떠는가하면 감기만 걸려도 내가 또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며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은데 언제까지 꼭 이래야만 되겠습니까? 그러자니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다 아직도 몽학선생 밑에 있음으로 매를 맞을까 염려하여 두려워 떨고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를 두고 기억할 것은 그렇게 하고 있는 한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이는 아직도 몽학선생에 매여 있어야하는 유치한 단계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제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의 성숙된 자녀로서 율법으로부터 벗어난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몽학선생(갈리디아서 3:23-29)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오늘 본문에 나온 몽학선생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지닌 비사 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몽학선생이라는 말을 항상 대하면서 그 뜻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채 넘길 때가 없지 않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에는 성경에서 몽학선생이라는 말을 읽으면서 꿈을 해몽하는 사람인가 보다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목사님이나 누구 어른들께 물어보지도 않고 그저 꿈 몽자를 써서 그러려니 하고 지냈던 것인데, 철이 나면서 사전을 찾아보고서야 몽학선생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어 성경에는 튜터(tutor;가정교사)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그 뜻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어떤 영어성경에는 트레이너(trainer;훈련자) 혹은 카스토우디언(custodian;후견인, 관리인)으로 표현되는 등 여러 가지 단어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은 어쨌든 그 뜻은 후견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후견인, 곧 몽학선생은 옛날 우리 나라의 양반 가정에서도 있었던 제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몽학선생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그 개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늘 전하고자하는 진리를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옛날 궁전이나 양반 가들의 가정에서 있었을 뿐 서민들에게는 있었던 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에 관한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야 이해를 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러면, 이제 몽학선생이라는 말을 이해하기에 앞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였느냐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바울이 말하는 주제는 언제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이와 같이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며, 그것은 오직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원론을 전개함으로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믿고 지켜온 율법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 동안은 오직 율법이라는 교리와 자세로 지내왔는데 오늘에 와서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바뀌어지게 되었으니 자연 양자의 관계성을 논해야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율법주의를 은혜로써 극복하는 교리를 전개해 나갑니다. 그리고 거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계단 더 나아가 그 은혜를 법적 관계에서 설명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율법의 논리에 의해서 설명해 나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아도 사도 바울은 참으로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의 신학적인 수준과 논리적인 전개는 20세기의 오늘에 와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실로 높은 경지의 변증적인 이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첩경이 되는 것은 그가 설명하는 율법과 은혜에 대한 이해를 갖는 일입니다. 이는 루터의 신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근간에는 율법과 은혜의 문제를 교육학적으로 풀이하는 분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과 은혜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 나가는 교육 방법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울 때에도 적당히 때리고 적당히 칭찬해야 합니다. 만약 그러한 것의 균형을 잃고 너무 자주 매질을 하거나 많이 때리면 의지가 죽어버리게 되어 의기 소침한 아이가 되고 맙니다. 반면에 너무 위해 주기만 하면 영영 버릇 나쁜 아이가 되어 방종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왼손으로 때리면 오른손으로는 어루만져 주는 이러한 균형이 잘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균형이 잘 잡히지 않으면 그 자식은 버리는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과 은혜의 문제는 어제나 오늘이나, 교육학적으로도 중요한 원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왼손은 율법이요, 하나님의 오른손은 은혜라며 하나님께서는 그 두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울이 생각하는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은혜의 대표자인 아브라함과를 대조하는 일입니다. 사실 이 모세와 아브라함, 아브라함과 모세를 어떻게 균형 있게 바로 이해하느냐하는 것에 기독교의 교리를 이해하는 첩경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를 믿고있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율법과 은혜의 관계는 충분히 이해할 정도가 되어야 믿어야할 바의 신앙이 굳게 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느 신학자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 자체가 말하고 있는 기독교의 진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는 그리스도인이 성숙되는 단계에서는 반드시 이해해야할 기본적 교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며칠 전 우편으로 책이 한 권 우송되어 왔기에 보았더니 "박태선 장로가 하나님이다"라는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표지를 넘기고 보니 사진을 근사하게 내어놓고는 이 사진은 함부로 다루지 말라고 써놓았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정신 나간 사람이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책을 읽어보니 허황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도 돈을 많이 들여서 인쇄를 하고 그것을 또 우편으로 부쳐 곽 목사까지 설득을 시키겠다며 나오는 것이란 말입니다. 저는 그 책을 보고서 왜 이렇게 허황한 소리들에 사람들이 빠지느냐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정신병자가 아니고서는 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이야기들인지라 인쇄소 사람들이 식자를 하면서 얼마나 웃었겠는가하는 생각이 먼저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이와 같은 허황한 소리에까지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오대양의 집단자살 사건을 문제가 시끄럽습니다만 은 그것도 소위 케이(K)교단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까? 알기로는 그것이 이미20여년 전부터 한국교회를 교란시켜 왔으며, 그럼에도 따르는 사람이 수천 명이 된다는 것인데 마침내 유례없는 비극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느냐고 할 때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어떤 분은 이상한 교리가 있다고 하며 한번 알아보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매우 건방진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자체도 아직 다 모르는 처지에서 적을 알겠다며 나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모세와 아브라함을 비교하는 입장에 돌아가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을 보는 교리의 핵심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고 하는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은 것은 행함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의롭게 인정하여 주심으로 구원을 얻게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구원을 얻는 일에 있어서 원천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모세 이전, 즉 율법이 모세를 통해 가르쳐지기 이전에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교리가 율법에 앞서 있어왔던 것이며, 그것은 비록 시간적인 문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근본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율법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토록 애써 가르친 율법의 기능은 무엇이며, 그 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을 버리거나 결코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율법과 은혜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인데, 사도바울은 율법을 폐기하거나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율법 자체를 은혜 중심,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풀이합니다. 이와 같이 율법의 의미를 근본 의미인 은혜로 돌아가서 풀이하고 있다는 데에 바울의 천재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바로 그와 같은 율법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하여 오늘본문에 기록한 대로 율법을 가리켜 "몽학선생으로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비유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바와 같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은혜가 선포된다면 아브라함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이에는 모세, 곧 율법이 존재합니다. 바로 그 율법이 몽학선생의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일단, 율법에 매여 그 율법 안에서 양육되어진다고 하는 이러한 관계를 몽학선생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본문에 이어 4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보다 분명하게 그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부득불 어렸을 때에는 어느 기간 동안 몽학선생 하에 있게 된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몽학선생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그 어원을 한번 풀이해 봅니다. 몽학선생이라는 말을 헬라 원어로는 '파아이다고고스'라고 하는데, 머리 부분인 '파이도스' 라는 말은 철모르는 아주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때에는 그저 아무 것도 모르고 말썽만 부리는 것이어서 교육학에서도 말하기를 그런 나이에는 자연도 미워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무이든 꽃이든 가라지 않고 마구 뜯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런 기간의 어린아이를 가리켜 파이도스라고 하며 그 다음에 이어지는 '아고고스' 라는 말은 인도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파이다고고스라는 원어의 뜻은 어린이를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고대 헬라 사람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이 파이다고고스가 가르치는 어린아이들의 연령은 여섯 살에서부터 열 여섯 살 까지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열 여섯 살이라고 하면 상당히 자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그 때가 더욱 어려운 기간입니다. 아무튼 여섯 살 때부터 열 여섯 살까지의 기간을 몽학선생 아래에 둔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귀족의 가정이나, 경제적인 여건이 문제가 되지 않는 여유 있는 가정에서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고자 할 때 이 기간 동안을 몽학선생에게 맡겨서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몽학선생이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 그 하는 바가 여러 가지로 많겠습니다 만은 우리 나라의 몽학선생은 아주 어렸을 때에는 쉬운 천자문을 가르치고 예법을 가르치는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침에 일어나서 부모님께 문안드리는 것을 비롯하여 앉고서는 언행의 일체를 간섭하며 가르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모님께 문안드리는 것을 부모님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부모님 자신이 "아침마다 일어나서 나한테 절을 하라."고 한다면 그대로 잘 통하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몽학선생이 있어서 그 모든 것들을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배이게 버릇을 가르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와 히브리의 몽학선생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학교를 오고 갈 때에도 동행을 하면서 그 출입의 전부를 간섭합니다. 그러니까 한 어린아이에게 전적으로 한 사람이 달려서 열 여섯 살까지 간다는 것이며, 열 여섯 살이 지나야 후견인이 떨어지고 비로소 자유롭게 혼자 왕래할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해 보면 거기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혼자서 다닐 수 있는 거리가 못됩니다. 특별히 개들이 많고 도적도 많으며, 아이들을 유괴해 가기가 쉽고도 많은 때에 돈 많은 귀족의 자녀가 혼자서 밖을 다닌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반드시 후견인이 따라다녀야 했던 것인데, 이 후견인으로는 물론 일반인도 없지는 않았으나 대체적으로 힘이 세면서도 성품이 좋고 믿을 만한 노예들을 세워서 돌보게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다른 일은 그만 두고 내 아이만을 맡아서 단정하고 훌륭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줄 것을 부탁 받은 이것이 바로 파이다고고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비록 왕자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가 어린아이인 이상 이파이다고고스 밑에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란 왕자이든 아니든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똑같이 맞고 때리며 욕하기 마련이요, 불의와는 상관없이 도둑질까지도 재미로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이들이란 분별력도 없거니와 스스로 자기 조정이 안 되는 유치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후견인이 필요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 결과 41절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후견인 밑에서 종과 다름이 없는 생활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몽학선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중생한 사람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 있을 동안에는 율법에 매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에는 마음으로는 예수를 믿으나 아직도 버리지 못한 좋지 않은 버릇들이 남아 있어서 아차 하면 그대로 튀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오랫동안 잘못된 습관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고치려면 매우 힘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나오는 것도 오랫동안 습관이 되고 몸에 익은 분들은 의례히 그날이 되고 시간이 되면 교회에 나갈 줄을 알지만, 처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입니다. 더욱이 새벽에 일어나서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새벽 기도가 익숙해지려면 적어도 3년은 걸려야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만사가 다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매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치한 시절을 지나 성숙해지면 그 때에는 자유인이 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이것 하지 말라, 저것 하지 말라며 거의 매사를 저지하다가도 자랄 만큼 자라고 나면 마음 대로인 것입니다. 그래서는 어렸을 때에는 귀가 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야단을 맞고 벌을 받아야하던 것이 어느 나이가 지나고 난 다음에는 밤을 새고 들어온다 하여도 상관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느 순간까지는 엄한 간섭을 받아야 제대로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굳이 오른 손으로 수저를 잡는 것이나 걸음을 걷는 일까지도 쉽게 배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크고 작은 동작 하나 하나는 상당한 후견인의 강한 간섭을 받은 훈련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계명을 보면 열 가지 계명 중 "하라"는 것은 둘 뿐이고 "하지 말라"는 것은 여덟이나 됩니다. 그러니 만큼 어느 수준까지는 율법에 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하지 말라"에 매여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라"는 그 선에 놓여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무한한 자유를 느끼면서 아무런 구속함이 없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이 대로인 것입니까? 아니면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지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로 안 된다고 하는 여기에 율법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서 아는바 대로 옛날 서당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 졸리는 것을 막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머리맡에 바늘이나 송곳 같은 것을 매달아 놓아 꾸뻑하고 졸게되면 거기에 찔려서 잠을 깨게 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다 율법인 것입니다. 아직도 다듬어지지가 않고 세워지지가 않은 유치한 때에는 이와 같은 강한 율법의 제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율법에서 세 가지의 역할을 생각나게 됩니다. 먼저는 시민법으로서의 율법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율법은 하나의 민법입니다. 동시에 율법은 이스라엘 사람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죄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이를 위해 갈라디아서 3:19말씀을 보면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가 없고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율법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죄가 없고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는 곳에는 율법 또한 필요치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범죄함이 있고 계속 죄에 대한 가능성이 있으므로 율법은 항상 있어야 합니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고 죄를 지은 결과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그 형벌까지도 가르쳐 줍니다. 율법에 기록된 형벌들을 보면 "돌로 쳐죽여라."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등 참으로 무서운 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엄한 벌들이 있기에 죄의 길을 가지 않도록 몽학선생 밑에서 인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거울을 보지 않는다면 비록 굴뚝을 청소하고 나온 후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얼굴에 새까맣게 묻은 그을음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율법을 봄으로 간음, 도적질, 살인 같은 것들이 죄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율법이 없어도 되는 충분한 양심의 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14-14). 그러나 범죄하여 죄에 익숙한 존재가 되므로 죄에 대한 감각이 흐려지고 둔해져서 이제는 죄인지 의인지 조차도 알 수 없는 상태에 와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율법을 주어서 바른 죄의식을 갖게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몽학선생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변증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는 말은 간접적으로는 율법이 우리를 은혜의 길로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로 나와서 영생의 길을 묻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19:16-22, 18:18-23) 거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시게 되는데 이 때에 그 사람은 율법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같은 말씀을 들은 그 사람은 심히 근심하며 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과연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면서 기다리신 대답이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선생님 어떻게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지키려고 하여도 저로서는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만이 구원을 얻는다면 저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하고 나왔더라면 예수님께서는 간단하게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교만하고 건방져서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하므로 정말 지켰나 안 지켰나를 어디 시험해 보자시며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시니 여기에서 넘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율법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정말 율법을 바로 지켜보겠다고 노력하면 하느니 만큼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오직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구원받을 길은 없는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죄의 문제를 자꾸만 깊이 생각하고 보면, 요즈음 같이 어려운 때에는 살아있는 것까지도 죄가 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율법적으로 생각해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베풀지 않는 것은 도적질하는 것이다"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격언이 있는데 이는 생각해 보면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이겠습니까? 또한 베푼다면 어디까지 베풀어야 도적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율법을 놓고는 아무도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예수님 앞에 나온 것도 그 때문인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인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다 지켜보았으나, 그것으로서는 안되겠기에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영생의 도리를 묻고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진실해 보겠다며 애쓴 사람은 진실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정말 지키려고 했던 사람은 그 일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지킨다고 해보았자, 지키지 않는 것과 오십 보 백 보일 뿐 그게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율법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자기가 의를 행했다는 말을 조금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나 저러나 다 죄인으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행하는 것, 그 무엇이고 죄 아닌 것이 어디 있더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오직 은혜와 오직 긍휼로 구원에 이르게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는 그 무서운 율법은 몽학선생이 되어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여기에서 나아가 율법은 그리스도인이기에 지켜야하는 중요한 생활윤리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의 원하심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하나님의 마음의 계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율법을 대하는 것은 벌을 면하고자 하거나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형벌이 무서워서도 아니며, 이것을 지켜서 구원을 받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하나님의 뜻이 여기 있으니까?'하는 생각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식을 지키는 것도 '이것 지키지 않으면 벌받는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안식일을 주셔서 나로 하여금 쉬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가'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범사에 감사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이제는 율법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모세의 때가 지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더 이상 몽학선생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로부터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는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감사와 기쁨에 가득찬 감격 속에서 그저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유로움 속에서 의롭게 살아가는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것은 안되고, 저것은 못한다며 벌벌 떠는가하면 감기만 걸려도 내가 또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며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은데 언제까지 꼭 이래야만 되겠습니까? 그러자니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다 아직도 몽학선생 밑에 있음으로 매를 맞을까 염려하여 두려워 떨고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를 두고 기억할 것은 그렇게 하고 있는 한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이는 아직도 몽학선생에 매여 있어야하는 유치한 단계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제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의 성숙된 자녀로서 율법으로부터 벗어난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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