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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듣는 사람(전도서 5:1-7)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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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듣는 사람(전도서 5:1-7)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화창한 봄날, 어미 꿩이 새끼 꿩들을 들판에 데리고 나가 먹이를 주워먹고 있습니다. 어미 꿩은 졸졸 따라다니는 새끼 꿩들을 모아놓고 단단히 주의를 줍니다.

"얘들아, 너희들 땅 위에서 먹이를 찾아먹을 때에는 입으로는 먹이를 먹고, 눈으로는 먹이를 찾고, 발로는 더듬고 뒤집겠지만, 귀만은 언제나 열어놓고 내 음성을 듣도록 해라. 어느 때에 갑자기 여우가 와서 우리를 헤칠는지 모르니까, 내가 큰 소리를 치면 빨리 내게로 달려오도록 해라." 이렇게 간곡하게 주의를 주어서 이 새끼 꿩들은 먹이를 먹다가도 어미 꿩이 큰 소리로 위험을 알리면 모두들 모여듭니다. 그런데 어미 꿩이 한 말을 별로 마음에 두지 않고 유독히 자기 멋대로 여기저기 좋은 먹이를 찾아 자꾸 멀리 가는 한 마리 새끼 꿩이 있었습니다. 너무 멀리 나간 그 새끼 꿩은 여우가 왔을 때에 어미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게 되어 결국은 여우에게 잡혀 먹히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멀리가도 들을 말은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들어야 할 음성은 들으며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들어야 할 말씀은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듣는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농아학교를 방문해보면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곳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 아이들이 다 농아는 아니랍니다. 귀가 들리지 않음으로 벙어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 가운데 90퍼센트 정도는 발성구조가 온전하답니다. 그러나 듣지 못했기 때문에,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입의 기능과 구조가 완전하다고 하더라도 듣지 못하면 다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얼마나 귀중한 교훈입니까? 중요한 것은 마음의 귀입니다. 또한 들으면 무엇합니까? 들리지 않는 대화는 도리가 없습니다. 들리어야 하고, 들어야 합니다. 이는 모두 마음이 열려야만 가능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16:18)." 여러분, 교만이 무엇입니까? 교만하면 되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거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느 자리에 앉아서도 한마디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안 들음으로 멍청해지고, 멍청해짐으로 망하게 됩니다. 교만, 이것이 문제입니다. 아내의 말도, 남편의 말도, 어른의 말도, 양심의 소리도, 하나님의 말씀도 들리지 않는다면 끝난 것입니다. 성경말씀도 "패망의 선봉이다"라고 하여 이를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한 말씀을 합니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10:14,15)"--결국 구원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함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보는 대로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비유말씀 가운데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씨뿌리는 자가 밭에 나가서 씨를 뿌립니다. 이 종자는 좋은 것이요, 완전한 것이요, 생명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자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길가와 같은 마음, 돌밭과 같은 마음,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말씀의 역사는 나타날 수 없습니다. 옥토와 같은 마음, 열린 마음, 부드러운 마음, 순종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그 종자를 받아들일 때에 그 마음속에 종자가 들어가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3060100배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평범하면서도 완전한 진리의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마음의 밭,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입니다.

여러분, 전도자가 있다는 것이 큰복입니다. 성경도 이에 대하여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가 있은 줄은 알지니라(2:5)"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은 큰복입니다. 이것이 떠나면 끝나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린다는 사실, 그 자체가 얼마나 큰복입니까? 그렇습니다. 들리어야 하고, 믿어져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안 믿어지면 도리가 없습니다. 가끔 저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하소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습니다.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들리지 않습니다"라고. 사실, 지금 여기서 잠깐 예배드리는 시간에도 보면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무지 들리지 않습니다.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도리가 없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산다----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말씀을 들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이 곧 생명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있는데 들리지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말씀은 들리는데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결국은 아무 역사도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별사람입니까? 입맛 좋은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음식만 봐도 속이 거북한 것이, 절로 인상이 구겨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벌써 반은 간 사람입니다. 입맛이 좋고 먹는 대로 소화가 되어야 건강한 것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고 나면 영 입맛이 없습니다. 음식 냄새가 역겹고, 아주 싫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도 더 달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도 말씀이 이렇듯 입맛 당깁니까? 말씀에 심취되어 있습니까? 말씀이 즐겁게 받아들여지고 믿어집니까? 그렇다면 분명히 축복입니다. 여기에 구원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잠언이나 전도서에는 이 '말씀'이 늘 대조적인 구조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도 지혜자와 우매자를 비교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매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말을 듣기보다는 더 많이 하는 사람이 우매자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매자는 경청을 하기보다는 늘 자기 의견을 앞세우고, 자기 지식을 앞세워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신학대학에서 30년 동안 강의를 해오면서 터득한 것이 있습니다. 훌륭한 학생은 강의를 끝까지 놓치지 않고 잘 듣습니다. 듣고나서 생각하고, 거듭 생각한 다음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시원치 않은 학생은 강의하는 도중에 질문을 합니다.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앞질러 "교수님"하고 질문을 합니다. 들어보면 그 질문이라는 것이 맹랑할 뿐더러 강의를 다 듣고 나면 절로 해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 참고 앞질러 질문을 합니다. 자기가 아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자기 생각이 앞서서 그런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학생입니다. 그 학생, 시험칠 때에 보면 영락없이 형편없는 답을 적고 앉아 있습니다. 왜입니까? 자기 말하느라고, 마음속에서 자기 생각을 하느라고 강의를 듣지 못했거든요.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2)"라고 말씀합니다. 함부로 입을 열게 되면 자연히 나의 나됨을 잊어버리게 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급한 마음은 자기 생각을 관철하려는 마음으로, 이로써 욕망의 노예가 되고 감정의 노예가 됩니다. 이러한 욕망에 사로잡혀 말씀을 들어도 들리지 않고, 기도를 해도 몸부림뿐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끔 이런 분들이 저를 찾아와서는 자신의 답답한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자기 이야기만 실컷 늘어놓고는 "목사님, 안녕히 계십시오"하고 그냥 돌아갑니다. 이런 분들, 도대체 왜 저를 찾아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자기 말만 하고, 조급해하고, 원한에 사로잡혀서야 무엇이 들리겠습니까?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지요.

논어(論語)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군자와 소인의 차이는 이렇다. 군자는 학문을 함에 귀로 들으면 그것이 곧 마음으로 전해지고, 몸에 배어서 실천을 한다. 그러므로 인격과 성품이 높아진다. 그러나 소인은 학문을 함에 귀로 들으면 곧 입 밖으로 내뱉는다. 아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버리고 만다. 학문이 자기 마음이나 자기 인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귀와 입이 사촌간이다. 학문이 귀에서 입으로 뱅뱅 돌아다니고 만다.'

그렇습니다. 가만히 보면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그 당장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명상하고 가슴에 두고, 나아가 실제로 자신의 생활에 옮겨봅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자기의 성품으로 된 다음에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우매한 사람은 듣자마자 바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정작 자기 마음에는 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인격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여러분, 주위를 한번 보십시오. 별로 배우지도 않았으면서 남을 가르치겠다고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은 배울 시간입니다. 지금은 묵묵히 생각하고, 실천할 시간입니다. 그런데 생활 속에서 먼저 배우고 익혀야 할 사람이 지금 가르치겠다고 합니다.

어제 배우고, 오늘 가르치겠다고 합니다. 말이 급하고,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할 수 없습니다. 진리와 그 자신, 아무 상관도 없는 생을 살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서원한 것을 갚으라(4)"라고 강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한번 말한 것을 번복하고, 실수가 많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사무엘 상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15:22)"---듣는 것이 우선적이라고 말씀함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초대를 받으사 그녀들의 집에 들르셨습니다(10:38-42).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하여 음식을 준비하느라고 아주 부산스럽습니다. 반면에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조용히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혼자 수고하는 것에 심술이 난 마르다는 예수님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라고 청합니다. 그러매 예수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좋은 편--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물론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그보다는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좋은 일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어느 편이 진정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인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인 가정에 심방을 갈 때에 종종 겪는 일입니다. 음식 대접하겠다고 그 주인이 부엌에서 수선을 떨고 인사도 제대로 안 합니다. 심지어는 "우리 예배드립시다"하면 "예배드리세요. 저는 음식 준비할께요."합니다. 도대체 누굴 위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아니, 목사가 배고파서 얻어먹으러 갔겠습니까? 말씀을 듣는 것--그것이 진정한 존경이요 대접입니다. 그것이 전부요 최우선적인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뒤로 미루고 쓸데없는 주변 일에만 신경들을 쓰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바른 예배의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제 1조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듣는 자세가 아주 중요합니다.

저희 교회에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마는, 다른 교회에 가서 설교하면서 보면 팔짱끼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팔짱끼고 비스듬히 앉아서 설교할 테면 해봐라 하는 자세--제일 보기 싫습니다.

도대체 이 자세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30년 가까이 목회 활동을 하다보니 교인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바로미터가 하나 생기더군요. 그것은 헌금도 아니요 봉사도 아니요 기도도 아니요 구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 듣는 자세입니다. 이것이 빗나가면 다 빗나갑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되면, 그 때부터 참 교인이 됩니다. 늦게 오던 사람이 일찍 오고, 뒤에 앉던 사람이 앞에 앉고, 기지개만 켜고 하품만 하던 사람의 눈이 초롱초롱해지고…… 말씀을 듣는 자세가 변화합니다. 말씀을 듣는 이러한 자세가 바로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과 성품으로 이어집니다. 나아가 구원으로 이르게 합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1)"라고 하여 말씀을 듣는 자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강론할 때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멀찍이 들창에 걸터앉아 졸다가 떨어져 죽은 이야기도 있듯이, 이 멀찍이 있는 마음은 좋지 않습니다. 말씀이 있는 곳으로 좀더 가까이해야 합니다. 이 같은 공간성이 필요합니다.

지난주간에도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마는, 저는 중국에 갈 때마다 많은 은혜를 받고 옵니다. 지난번에도 중국에 도착해서 호텔에 앉아 있는데, 제가 온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교포 몇 분이 찾아왔습니다. 저와 만나 잠깐 성경말씀을 듣기 위하여 하룻길을 걷고 너댓 시간 기차를 타고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분들과 만나는 것은 불법이므로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습니다.

그 잠깐동안 성경을 읽어주면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모릅니다. 10년 동안 방송으로만 듣다가 직접 제 얼굴을 보게 되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들 합니다. 몇 권의 성경책과 소망의 말씀, 그리고 카세트 테이프를 받아들고는 더없이 즐거워하면서 다시 그 먼길을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듯 말씀을 사모하고 가까이하려는 모습을 볼 때에 참으로 큰 은혜가 됩니다.

말씀에 가까이하는 것--그것이 성전이요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여기에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까이하여 말씀을 듣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가끔 다른 교회의 장로님이 저에게 "소망교회는 신도들이 새벽기도에 많이 나온다면서요?"라고 물어옵니다. ", 이천 명 정도 나오지요"라고 대답하면 퍽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부러워하면서도 정작 그 장로님 자신은 새벽기도에 잘 나가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집이 워낙 멀어서랍니다. 겉으로는 ", 그래요"라고 대답을 합니다만, 속으로는 교회 가까이 이사를 가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집이 문제입니까? 무슨 핑계가 그리 많습니까? 공기 좋은 곳에 가서 오래 살겠다고요?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말씀을 듣기 위하여 좀더 가까이 가는 마음이야말로 귀하지요.

압구정동에 있는 복덕방 주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희 교회 주변의 집값은 내려가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는 비싸도 좋으니 집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청한답니다. 교회 가까이에 살면서 새벽기도도 나가고 열심히 예수 믿다가 죽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기에 집 값이 내려갈 수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간절한 마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좀더 가까이하여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이 마음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특별히 이것은 존경이요 신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꿀송이보다 더 달게 받아들이고 전적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하인을 다만 말씀으로 치유하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이르셨을 때에 백부장이 나아와 중풍병으로 누워 있는 자신의 하인을 고쳐주십사 청합니다. 백부장은 친히 그곳에 가시어 고쳐주시겠다는 예수님을 송구함으로 만류하면서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하고 아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백부장을 크게 칭찬하시어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노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그 사람이 성경을 많이 압니까? 교리를 많이 압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겠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에게는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순종하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믿음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믿음은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믿음은 선물이요, 성령의 역사요, 은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봅시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겠다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25년이 지나도록 이제나저제나 기다립니다. 어느덧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고 사라는 90세가 되어 단산을 한 지 오래입니다. 바로 그런 때에 세 천사가 나타나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합니다. 아브라함은 기가 막혔으나, 그래도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자기로서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가능함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는 증거를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완전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대로 믿습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믿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성경말씀 그대로 믿는 것이 의로 이르는 길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들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북한을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가슴아픈 일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에 여기저기 다니면서 개인적으로 사람들을 만나 물어보았습니다. 성경책을 보여주면서 성경이란 말을 들어보았느냐, 이것이 무슨 책인지 아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대답은 한결같이 '모른다'였습니다.

하나님이란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들을 길이 없습니다. 하늘 아래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단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니, 이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나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말씀을 들으면서도 넘겨듣고 비껴듣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활짝 열고 가까이하여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믿으십시오. 그리하여 그 말씀이 내 마음과 인격을 지배하고, 내 성품을 지배하고, 나아가 내 운명까지 지배하게 하십시오.

그 진리의 말씀이 내 귀에 들어와 역사할 때에 내가 곧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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