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2월 20일] 구속함을 기다리는 자(롬 8:18~25) - 곽선희 목사
https://www.youtube.com/watch?v=Hq3GjPsqifk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독하겠습니다. 신약성경 로마서 8장 18절로 25절에 있는 말씀 되겠습니다. 로마서 신약성경 250면입니다. 신약성경 250면. [음악] 로마서 8장 18절로부터 봉독하게 됩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봉독할 때에 다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오,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첫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고대하는 이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곧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아멘.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전심전력을 다해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벽부터 밤까지 자나 깨나 항상 전심전력 수도 생활에 힘쓰고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전심전력 할수록 고민은 점점 더 큽니다. 점점 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카톨릭에서는 고해성사가 있습니다. 이렇게 증경에 들어가서 그래서 곧 고해성사 박스가 있습니다. 여기저기 인정을 누르면 그 신부가 나와서 거기에 앉습니다. 그 곁에 되고 자기가 지은 죄를 자백합니다. 이걸 다 아 듣고 나서 그 다음에 신부가
예수 이름으로 죄를 사하노라, 그러면은 아멘하고 사죄 받은 기쁨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고해성사입니다. 그런데 루터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가는 거예요. 가서 또 고백 또 고백하고 또 고백하니까 마지막에 그 신부가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요. 가만히 들어보니까 죄가 특별한 것도 아니에요. 수도원에서 무슨 죄를 짓겠어요? 칼을 가지고 교회를 때려 부수겠습니까? 여자와 간음하는 죄를 짓겠습니까? 무슨 이렇다 할 죄가 없는데도 아, 그놈의 죄, 내 죄, 나의 죄, 나의 죄 하면서 와서 죄를 고백하니까 이 신부가 들어보니깐 그저 갈등에 대한 죄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한 죄요,
또 우리가 게으른 죄요, 확신 없는 신앙 생활하는 것에 대한 죄를 포함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 마지막에 그 신부가 지겨워서 그랬다는 거 아닙니까? 루터야, 죄 좀 모았다 와라. 그러나 루터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것이 루터의 신앙 근본, 종교개혁의 원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아니다!' 여기서부터 그 새로운 온전한 구원, 온전한 구원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우리 구약으로 돌아가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완전히 행하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한마디로 말하면 '왜 휘청거리느냐, 왜 휘청휘청하느냐?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보아도 그렇습니다. 사실은 아브라함은 75세 때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고향을 떠납니다. 이건 큰 모험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곳, 전혀 가 본 일이 없는 모험 땅으로 간 겁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가는 겁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 그만큼 그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고향을 떠나서 그는 약속의 땅으로 갑니다. 그런데도 자세히 맥락을 보면 어디로 가라는 말도 없어요.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루를 일단 걸은 다음에 그 성경대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어요. 하나님 말씀만 믿고 떠나서 사흘 길을 가서 일천 간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마'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순종이 먼저예요. 그 다음에 약속이에요. 이걸 아브라함은 경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식에 대한 복입니다. '너를 통해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자손을 주마. 자식을 준다' 하는 그 약속을 받고 떠납니다. 그때가 75세예요, 벌써. 그런가 하면
전혀 광야 안 돼, 지기 지점도 없는데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준다' 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걸 어떻게 믿고 가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자식을 주신다고 한 것에 대한 약속을 믿었습니다. 땅을 주신다고 하는 데 대한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준다' 믿었습니다. 그리고 안심했습니다. 마는 웬일인지 흉년이 들었습니다. 약속의 땅인데 흉년이 들어서 할 수가 없어요. 그래 그는 하나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어정어정 애굽으로 갔습니다. 약속의 땅을 떠났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신다고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내는 벌써 단산하는 것 같은데 자식이 없어요. 그래서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편법적으로 이스마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째서 약속의 땅을 떠났느냐? 흉년이 들잖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약속의 땅을 지켜야지. 왜 떠났냐? 또 아내에게 '내가 너에게 자식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냥 믿고 기다려야지. 아내가 늙었던, 단산을 하던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질 거라고 믿었어야지.' 그렇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이스마엘이 벌써 열네 살까지 된 다음에 그때 하나님이 또 나타나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내년 이맘때에 네 아내가 아들을 낳으리라. 말이 됩니까? 단산한 지가 언젠데, '내년 이맘때 아들을 낳으리라.' 아브라함의 훌륭한 믿음은 여기 있습니다. 지난날의 잘못한 것 다 인정하고, '내년 이맘때의 아들을 낳으리라.' 그걸 믿었어요. 믿었어요. 엎치락뒤치락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마다 그래, 믿고 다시 시작합니다. 다시 출발합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신앙 생활의 하나의 섭리의 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린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은 항상 이렇게 휘청거릴 때가 있지만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도 좀 더 가까이, 좀 더 온전하게, 좀 더 확실한 믿음으로
갖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아브라함입니다. 오늘 본문 18절 말씀은 대단히 귀중한 말씀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아, 훌륭한 말씀입니다. '이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 소드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이 세상을 떠날 때 이 본문 말씀을 외웠답니다. 또 외우고, 또 외우고, 또 외우는데 전해지는 말대로 스물일곱 번을 외웠답니다. 마지막에 다 외우고 세상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그의 신앙 고백입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과 오늘의 고난, 비교가 안 된다. 미래에 약속된 확실한 영광을 바라보며 오늘의 고난 이것은 다 쉽게 이길 수 있다. 그것이 칼빈입니다.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칼빈이 세상을 떠날 때 쯤입니다. 칼빈의 신학 중에 제일 문제 되는 것은 정의의 예정론입니다. 이 이중 예정론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 때문에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천국 갈 사람하고 지옥 갈 사람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 이겁니다. 아, 그런 얘기를 하니까 아무래도 납득을 하는 분도 있고, 납득하지 않는 분들도 있지 않겠어요? 이것이 늘 문제였습니다. 세상을 떠나기를 임박한 그 시간에 제자들이 물어보았습니다.
지금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 이중 예정론 부정할 마음이 없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칼빈 빙그레 웃으면서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 내가 말하는 게 아니고 내 이성이 말하는 게 아니고 성경이 말하는 것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구원을 말할 때 온전한 구원, 온전한 구원을 향해 가는 길,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이 온전한 구원이지만 거기까지 또 가기 위해서 온전한 구원을 지향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성이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가진 이성 생각 있잖아요. 이 이성이 참 좋은 것이긴 한데, 추리 능력도 있고 비판 능력도 있어요. 이성이 추리도 하고, 이 비판도 하고 다 좋지만은 늘 이 이성의 문제가 뭐냐 하면은 확신이 없는 거예요. 이 확신 없는 이성 이것은 결국은 의심으로 전락하고 마는 거죠. 그래서 이성이 중생을 해야 됩니다. 이성이 중생해야 한다. 그러면은 모든 성경적 진리가 모든 하나님의 역사가 합리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다시 말합니다. 합리적으로 이해돼야 그게 구원받은 것, 구원받은 이성입니다. 여기에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스위스 대학에 가서 강연을 하고 나오는데 아주 젊은 학생 하나가 따라오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는데 질문 중에 하나가 뭔지 아십니까? "교수님, 아주 유명한 신학자고 그런데 한 가지 물어봅시다. 동정녀 탄생, 동정녀 탄생을 칼 바르트 당신은 믿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생리학으로 불가능한 건데, 동정녀 탄생을 믿습니까?" 라고 하는 이 젊은 사람의 질문에 대해서 칼 바르트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한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저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어.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걸 믿고 있어.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냐?
또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어. 천지 창조의 능력을 나는 믿어. 나는 제일 중요한 것은 '로고스 싸르키 에게네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칼 바르트는 수백 번 수백 번 그의 책에서 이것을 인용합니다. 로고스 싸르키 에게네토,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던 이 기적, 이 기적을 믿는 내가 동정녀 탄생,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 그뿐 아니라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될 거 아니냐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는데 우리 보통 사람들 세상에 태어난 같은 방법으로 태어났어야 되겠습니까? 당연히 동정녀 탄생을 통해서 오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받아들여야지. 아,
그렇습니까? 이 루시퍼의 유명한 변론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성이 구원을 받으면 이제 없습니다. 성경이 합리적으로 이해가 되는 겁니다. 성경 이야기가 하나하나가 다 합리적으로 이해가 될 때 구원받은 것이죠. 대단히 미안합니다마는 많은 경우에 교인들도 그렇고 우리 목사들도 그래요. 아직도 이성의 구원받지를 못해서 성경을 읽으면서 이게 완전히 이해가 되질 않는 거예요. 하나님을 그 믿고, 성경도 믿고, 예수님도 믿지만은 이건 이건 이해가 안 된, 이거 홍해가 갈라졌다는 그 이야기가 안 되거든요. 이게 오천 명이 먹은 떡을 먹었다는
이걸 이해가 안 되냐? 알쏭달쏭하니 여전히 묶여 있고, 신앙에 멍에를 지는 거예요. 이성이 중생을 하고 나면 성경 어디를 봐도 아, 옳은 말이에요. 옳은, 이해되지 않을 부분이 없어요. 잠깐 이해가 안 되면 기다리면 돼요. '오늘은 이해가 안 되지만 언젠가는 이해가 될 거야.' 그렇게 받아들여요. 성경을 전적으로 합리적으로 이해하게 될 때 그 이성이 구원받은 것이죠. 그런 다음에는 감성이 또 구원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말하는 대로 항상 기뻐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왜 그랬을까요? 이것이 이제 윤리적 항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마음에는 항상 그런 감사가 있는 거예요.
항상 기뻐하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이건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요, 선물이지, 내가 임의적으로 억지로 기뻐하고 기뻐하고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우리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 바로 그런 귀한 감사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므로 다시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거기서부터 그리스도인이에요. 왜요? 그것이 구원받은 감성이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사람의 세계관이요. 그러니까 감사하죠. 이것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 감사가 넘치면 내가 구원받은 사람인 거예요. 만약에
그냥 불평이 나고, 불평이 나고, '왜 하필이면 나만 이럴까?' 이런 생각에 매여 있다면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것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심령으로 볼 때는 모든 것이 감사해요. 범사에 감사해요.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 나갔을 때에 베드로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그러니까 베드로 한마디 합니다. "밤새도록 수고해서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물을 던지라고요?" 보다 한마디를 제가 좀 추가하면 이렇습니다. "밤새도록 헛수고 했는데요. 이제 또 그물을 내려봤자 못 잡을 겁니다. 못 잡을 걸 뭐 하러?" 베드로가 그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씀하시니, 예수님의 체면을 봐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내렸어요. 가득 잡았어요. 깜짝 놀랐어요. 그는 예수님 앞에 굴복, "나는 죄인으로서이다. 나를 떠나소서" 회개하게 됩니다. 자, 그러면 어떻습니까?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던지라' 하는 순간 잡았다, 만선이다! 이제는 이루고 그때부터 기뻐해야지. 이것이 아, 그 사람의 모습이요, 구원받은 감성의 감격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마다 그 속에 기쁨이 있고, 여기에 형통함이 있고, 여기 성공이 있고, 여기에 영광이 있는 것을 보면서 이 구원받은 감성이요, 구원받은 마음이요.
그런가 하면 구원받은 의지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생명력입니다. 행동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말씀을 따라 살다 보면 인내하게 됩니다. 원수도 사랑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순교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것을 다 아 은혜 안에서 정복, 은혜 안에서 해결하고 해답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실제 생활 속에서 주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내가 오늘 살 때 이런 사람을 만나든, 이런 사건을 만나든, 이 모든 사건, 되어지는 일 하나하나 예외가 없어요. 이것이 다 합동하여 선을 이루어요. 억울함이 주어집니다. 손해가 옵니다. 뭐 이런 일,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내 영혼을 단련시켜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가도록 나를 인도하신다' 감사하게 되니 거기서 새로운 의지력이 생기는 거예요. 가난도 이기고, 고난도 이기고, 의심도 이기는 용기가 생기는 것이죠. **'고난의 학교'**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을 [음악]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첫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나는 참고 견딜 것이다' 하는 소망을 가집니다. '나는 견딜 수 있다' 하는 약속을 믿습니다. '나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가?' 몸의 구속, 몸은 온 인격을 말합니다. 온전한 구원,
생각에만 맴도는 게 아니야. 내 지식의 세계에서 만 흐릅니다. 이 구원 이것은 전인적 구원, 내 이성도, 내 감성도 구원받은 거죠. 내 의지도 구원받은 의지. 그러므로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당할수록 '하나님이 나를 보다 더 온전한 세계로 인도하시는구나.' 욥이 고백한 것처럼 '나의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 유익합니다. 더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도록, 내 영혼은 내 부족함을 내 허물을 넘어서 순수한 온전한 자유에 이르게 하시게 위하심이 이 같은 일을 주시는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 미리 감사하며 고난 당하는 순간부터 벌써
넘어서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순교자입니다. 순교자! 이 순교의 언덕을 넘어서 주님 앞에 가서 올 영광을 바라보며 또 고난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감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노니. 여러분 어디까지 왔습니까? 여러분의 구원이 어느 정도에 왔습니까? 한 번 더 깊이 생각하면서 그 온전한 구원을 향해 시작이라도 가야 한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18절 말씀을 다시 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고 점점 확실해질 때
오늘의 모든 문제는 다 안개처럼 사라지는 거예요. "온전한 구원, 몸의 구속을 기다리노니라."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도 주님의 거룩한 보좌에 나와 주의 음성을 듣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저희가 구원을 위하여 여기까지 왔고, 그러나 우리의 이 후회함으로 인해서 거룩한 구속의 은혜마저 의심하며 살아가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이 갈등의 생활을 이제는 멈추게 해 주셔서 온전한 구원에 이르고,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충만함으로 이해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에 붙들려 늘 감사, 감격하는
복된 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온전한 구원에 도달하도록 은총 베풀어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말씀 본문 요약 (로마서 8장 18절-25절)
- 현재의 고난과 장차 나타날 영광: 현재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가 없습니다 (18절).
- 피조물의 탄식과 소망: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며, 허무한 데 굴복하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는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입니다 (19-22절).
- 성령의 첫 열매를 받은 이들의 탄식: 성령의 첫 열매를 받은 우리 성도들조차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고대합니다 (23절).
- 소망으로 얻은 구원: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보이는 것은 소망이 아니며,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랄 때는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24-25절).
🎙️ 설교 내용 상세 요약
이 설교는 로마서 8장 18절 말씀을 중심으로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 위한 과정과 신앙인의 자세를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구약의 아브라함의 예시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1. 😓 종교개혁의 뿌리가 된 마틴 루터의 고뇌
- 수도 생활과 죄책감: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전심전력으로 수도 생활을 했으나, 노력할수록 죄책감에 더 시달렸습니다.
- 반복되는 고해성사: 루터는 카톨릭의 고해성사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했고, 신부는 그에게 특별한 죄가 없음에도 끊임없이 죄를 고백하는 모습에 고통스러워하며 "루터야, 죄 좀 모았다 와라"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 '이건 아니다'라는 깨달음: 이 극심한 죄책감과 고해성사의 무의미함에서 루터는 새로운 온전한 구원을 깨닫게 되었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근본이 됩니다.
2. 🚶♂️ 아브라함의 불완전한 믿음의 여정
-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완전히 행하라(완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7장 1절).
- 위대한 순종과 불완전한 행동:
- 75세에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약속만 믿고 떠난 것은 훌륭한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순종이 먼저, 약속이 나중)
- 그러나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자 하나님께 묻지 않고 애굽으로 갔고, 자식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는 편법을 사용했습니다.
- 다시 시작하는 믿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내년 이맘때 네 아내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불가능한 약속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지난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말씀을 믿고 다시 출발합니다.
- 믿음의 섭리: 아브라함의 예는 믿음이 항상 휘청거릴 때가 있지만, 모든 과정을 통해 더 온전하고 확실한 믿음으로 나아감을 보여줍니다.
3. ✨ 현재의 고난과 장차 나타날 영광
- 칼빈의 신앙 고백: 종교개혁자 칼빈은 세상을 떠날 때 로마서 8장 18절 말씀을 스물일곱 번 외우며 장차 나타날 영광과 오늘의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음을 고백했습니다. 미래에 약속된 영광을 바라볼 때 현재의 고난은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 이중 예정론에 대한 변론: 칼빈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이 이중 예정론에 대해 묻자,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이지 내 이성이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4. 💫 온전한 구원으로 가는 길 (전인적 구원)
온전한 구원(몸의 구속)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 가는 것을 지향하며, 우리의 전 인격이 구원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 구원 영역 | 핵심 내용 | 예시/설명 |
| 1. 이성의 구원 | **이성의 중생(중생)**을 통해 성경적 진리와 하나님의 역사가 합리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 칼 바르트가 동정녀 탄생을 묻는 학생에게 말씀이 육신이 된(로고스 싸르키 에게네토) 기적을 믿는데 동정녀 탄생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일이라고 설명한 것처럼, 성경이 전적으로 이해될 때 이성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
| 2. 감성의 구원 | 구원받은 심령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윤리적 의무가 아닌 은사/응답). | 불평이 아니라 감사가 넘칠 때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순종했을 때 만선(滿船)의 기쁨과 함께 회개한 것처럼, 말씀에 대한 감격이 기쁨과 형통함으로 이어집니다. |
| 3. 의지력의 구원 | 말씀은 **생명력(행동력)**으로 나타나 인내, 원수 사랑, 순교까지 가능하게 하는 힘입니다. | 어려운 일, 손해, 억울함을 겪을 때도 '하나님이 내 영혼을 단련시켜 더 가까이 인도하신다'고 감사하며 새로운 의지력이 생깁니다. '고난의 학교'의 가르침처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온전한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
5. 🙏 결론 및 기도
-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할 수 없으며, **온전한 구원(몸의 구속)**을 기다려야 합니다.
- 우리의 갈등의 생활을 멈추고, 이성이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감성이 감사와 감격으로 충만하며, 의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사는 복된 생활이 되도록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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