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2월 13일] 땅에 쓰신 글씨(요 8:1~11) - 곽선희 목사
https://www.youtube.com/watch?v=A-LvIxcH5yw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8장 1절부터 11절 말씀까지 적겠습니다. 신약성경 157면입니다. 157면 요한복음 8장 되겠습니다. 아, 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독할 때에 다 같이 주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있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또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던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 여자에게 "여자여, 너를 고발하는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아, 네. 제가 잘 아는 친구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려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차를 급히 몰고 교회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른 차도 아닌데 계속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겁니다. 브레이크도 완전히 밟지 않고 아주 느리게 갔습니다. 참다 못해서 목사님이 속도를 내서 그 차를 따라가서 앞질러 길을 가로막고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나와 가지고 "야, 너 나와!" 하고 운전사를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와 보니 그가 자기 교회의 집사님입니다. "내가 이렇게 부끄러운 일을 당했다"고, "내가 성격이 좀 급해서 종종 이런 실수를 한다"고 그런 이야기를 본인한테 직접 들었습니다. 여러분, 운전 아시지요? 운전하는 사람은 적어도 운전대를 잡았을 때는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수용하는 그런 마음으로 운전해야 합니다. 이제 그럴 수 못하는 사람들을 가르칠 수 없잖아요. 그들을 바로 인도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나 된 도리를 다할 수밖에요. 그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제 아버님이 제게 가르쳐 준 교훈
하나가 있는데 그리 좋은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중요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미친 개를 만날 수 있다. 사람이 미친 개에게 물렸으면 사람 잘못이냐, 개 잘못이냐? 여러분, 때론 미친 개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개에게 물리면 안 되죠. 나의 나 된 도리를 바로 해야 한다는 그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참으로 짜증 나는 나쁜 사람들의 무리들이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들어가서 기도하셨습니다. 모름지기 밤새 기도하고 아침에 나와서 성전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되는데 이렇게 고즈넉한
아침입니다. 참으로 숭고한 아침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이 간음하다 붙들려 온 여자 하나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놓고 "자, 성경이 말하기를, 모세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그렇습니다. **신명기 17장 7절, 신명기 22장 24절. 간음하는 사람들을 끌어다가 돌로 쳐 죽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악을 제하라. 그리하여 다시는 이 도성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라고 모세가 율법으로 말씀해 주었습니다. 이 말씀을 배우면서 "자, 모세가 말하기를 이런 여자를 돌로
쳐라!"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주 중요한 딜레마입니다. 모세의 율법으로 말하면 이런 사람은 돌로 쳐야 합니다. 그러나 로마 사람의 율법이 여기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로서는 사형 집행은 로마 사람만 할 수 있는 겁니다. 유대 사람은 사형 선고도 못하고 사형 집행을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유대 사람의 법과 로마 사람의 법 사이에 딜레마가 있는 겁니다. 유대 사람의 법으로서는 돌로 쳐야 되지만은 로마 사람의 법으로서는 안 됩니다. 이런 딜레마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 앞에 질문을 던진 겁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아주 위험한 질문을 건넨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돌로 칠까요?"라고 물어보게 됩니다. 참으로 짜증 나는 사람들이요, 아주 잔악한 사람들의 질문입니다. 바로 이런 때에 예수님이 보이신 태도. 여러분, 우리도 이런 경우에 당할 때가 많습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요. 이런 딜레마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아시는 일을 보세요. 지혜롭고 온유하고 그리고 권세 있게, 권세 있게 대처하는 것을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먼저 하신 일이 뭔가? 몸을 굽히사 땅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글씨를 썼다는 기록은 편지를 썼다는 말이 없습니다. 딱 한 번 글을 썼는데
땅에다 손가락으로 글을 썼습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람의 감정을 수그러들게 하고 가라앉히려는 것이에요. 격한 감론을 가라앉히는 시간입니다. 사람은 감정이 격해지면 실수를 한다 말이 실수를 하듯 행동에 실수도 합니다. 일단 냉정해야 합니다. 일단 냉정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 제목입니다. 감정적으로 해결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땅에다 글을 썼다는 아주 지혜롭기도 하고 놀라운 조치였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는 보는 것이 있고 듣는 것이 있습니다. 볼 때는 우리가 쉽게 격동합니다마는
듣는 것은 좀 더 집중해야 합니다.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가 하면 읽는 것이 있고 쓰는 것이 있습니다. 책을 읽을 때가 있고 책을 쓸 때도 있습니다. 읽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요? 생각하면서 읽으니까요. 들을 때는 잠깐, 볼 때는 잠깐 스쳐 지나가지만은 읽는다는 것은 글을 보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글을 보기 때문에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가 하면 읽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얼마나 읽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이 너무 많아요. 텔레비전을 보지요, 핸드폰을
보지요, 자꾸 봅니다. 저는 승강기를 탈 때마다 가만히 보면 그 승강기에 타는 젊은이들이 짧고 잠깐 서 있는 동안에도 얼굴을 아래로 하고 궁금한 게 뭘 보나 궁금해요. 들여다봤더니 글도 아니에요. 그런데 이것도 그냥 부지런히 돌리고 저거이 돌리고 계속 돌리면서 산만하게 그렇게 핸드폰을 보는 것을 보면서 아, 저것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거다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보는 것 그저 그러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히려 감정을 격동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듣는 것, 고요히 듣고 좀 더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다음 쓰는 것, 따라만 써 보셨습니까? 책을 쓰기도 하고 편지를 쓰기도 하고
씁니다. 그때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쓰고 그래서 좀 더 냉정, 좀 더 깊은 자기 성찰을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땅에다 글을 쓰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글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래서 냉정함을 되찾도록, 냉정함을 갖도록,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도록, 그 격한 감정 그것을 낮추고 그리고 냉정한 가운데서 생각할 수 있도록 조율을 둔 것 같습니다. 당대에는 글씨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문맹이 많다는 것이지요. 예, 중국은 옛날에 중국이 지금도 한문을 쓰지 않습니까? 그래서 중국이 제일 고민하는 것 중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8만 5천 자가 넘거든요. 그러니까 이거를 그 어려운 한문을 가르치려면 3년을 배워야 제대로 글을 쓸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옛날 1, 2천 년 전 이 때에 글씨를 볼 줄 아는 사람이 몇 사람 없어요. 아주 지성인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 글씨를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땅에다 글씨를 쓰니까 사람들이 "무슨 글을 썼을까?"하고 들여다 볼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보는 사람은 그 사람이에요. 나머지는 보나 마나예요. 그 글씨를 읽을 수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지성인 먼저, 생각이 있는 사람이 먼저 보라고 그랬습니다. 무식한 사람보다 유식한 사람, 생각 없는 사람보다 생각 있는 사람이 먼저 생각하라!
보라, 땅에다 글을 써서 특별히 냉정을 찾게 할 뿐만 아니라 군중 심리를 분산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개별화한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떠들면서 "죽여라! 죽여라! 주자!"하는 그런 마음 말고, 개별적으로 나를 생각하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가 생각할 수 있는 그 냉정함을 붙잡게 해주는 것이죠. 아주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다음 예수님 말씀합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신명기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돌을 던지게 되어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자기 성찰을 먼저 하라는 것이죠. 죄 없는 자,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6장 42절에 보면 유명한 얘기 했지 않습니까?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 사람이 남의 눈에 티를 탓한다고요. 그 들보라는 말이 무언가 궁금했습니다. 봤더니 정말 들보예요. 그 집 궁궐을 뽑아오고 티를 빼 주겠습니까? 말도 안 된 얘기지요. 결코 아, 그것이 내 눈에 있는데 남의 눈에 티를 탓한다. 남을 가르치려고 말아먹고 혼내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들보를 빼라. 그리고 밝히 보고 남의 눈에 티를 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먼저 돌아보라는 것이죠. 특별히 오늘 본문의 중요한 것은 신명기에 보면
신명기 22장 22절에 보면 간음하다 붙들려 왔다 했는데 남자와 여자를 둘 다 끌어다가 돌로 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남자가 없어요. 남자는 어디 가고 여자만 끌려 온 거예요. 여기에 모순이 있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이 여자는 고독한 여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서 따돌림 받는 그런 사람이었다라고 생각이 됩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이 말을 듣고 많은 사람이 가책을 느낄 수 있다. 내가 돌을 던질 만큼 깨끗하지 못해요. 남을 비판할 만큼 내가 의롭지 못해요. 그래서 저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물러가고 여자 혼자 거기에서 엎드려 울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너를 정죄하는 자가 다 어디 갔느냐?"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마라. 네가 옳다는 게 아니다. 너는 죄를 지었어. 그러나 여기서부터 하고, 나를 만나는 시간까지, 주님의 만나는 이 시간까지 말미암아 네가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마라." 이렇게 위로해 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자,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성 프란시스가 있었죠. 지금 그 성 프란시스가 살던 그 기도하던 집을 순례한 일이 있습니다. 성 프란시스가 아주 유명하게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을 때의 얘기입니다.
그의 제자 한 사람이 깊이 기도 가운데 황홀경에 빠지게 됩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아, 하는 화려한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는데 거기 보니까 보좌가 하나 있어요. 의자가 하나 놓여 있는데 빈 보좌가 있어요. 보좌는 있고 사람은 없어요. "아, 이것은 누구를 위한 보좌입니까?" 천사에게 물었더니 천사가 말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성 프란시스가 앞으로 세상에서 떠나서 여기에 와서 앉게 될 보좌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명상에서 깨어났습니다. 마음속으로 존경스럽기도 하지만은 한편 조그만 질투심도 있었습니다. "아니, 저렇게 치우치지 않게 보이는 분인데, 아, 정말 저분이 하늘나라에 가서 그렇게 영화로운 보좌에 앉게 될까?"
참 존경스럽기도 하지만은 질투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하루는 성 프란시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장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했더니 곧바로 대답하기를 "아, 그거 물론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모든 사람보다 가장 더럽고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했습니다. 그 제자가 말하기를 "선생님! 그거 위선이요, 거짓입니다. 선생님은 성 프란시스입니다. 훌륭하신 분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합니까? 세상에 더 정부 많고, 강도도 많고, 간음한 사람도 많고, 세상에 죄인 많은데 제가 가장 큰 죄인이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 위선입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때 성 프란시스가 고요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건 네가 나를 몰라서 그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 볼 때 나는 참으로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더럽고 가장 악한 사람이야. 그렇지 않은가? 알고 짓는 죄가 있고 모르고 짓는 죄가 있거든. 많은 사람은 대부분 모르고 죄를 짓지만 난 알고 죄를 짓잖아. 어떤 사람은 부득이 죄를 짓지만은 나는 자주 죄를 지어. 어떤 사람은 행동에서 죄를 짓고 살지만 나는 마음으로 마음속으로 많은 죄를 짓고 살아. 그래서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세상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나는 악한 사람이다, 은혜를 배반하고 사는 사람이다라고 늘 생각을 하지." 프란시스의 제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과연 선생님은 성자이십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간음하다 붙들려 온 여자, 여기 죄인이 있습니다. 이 죄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자는 누구냐? "죄 없는 자 돌을 던져라." 그 세 아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하고 다 흩어졌다는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 마음속에는 많은 비판이 있습니다. 서로 미움도 있습니다. 오해도 많을 수 있다. 시기심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근본은 내가 나를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 루이스 스미스의 용서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말합니다. "용서함으로 우리는
과거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용서할 때 과거로부터 자유할 수 있고, 또 용서함으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용서한 사람은 평안합니다. 더 볼 것이 없습니다.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용서함으로 미래가 보입니다. 용서한 사람에게는 미래가 보입니다." 아, 우리 앞에 이런 일들은 늘 우리 마음을 어지럽히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그때마다 이런 생각해야 됩니다. 누구를 더 비난하겠습니까? 누구를 더 비판하겠습니까? 누구에게 돌을 던지겠습니까? 하고 생각해야 한다. 이 고독한 여인을 이해할 수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물러갔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마라." 네가 옳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오늘 이 이후로부터 내가 너를 만났으니까, 아니 네가 나를 만났으니까, 아니 내가 너에게 사죄의 은총, 회복의 은총 속에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마라 말씀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을 주께로 불러 주시어 주의 말씀을 볼 수 있고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됨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항상 세상을 비판하며 남을 탓하며, 우리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으나, 주님께서 하신 그 거룩한 역사를
보면서 냉정함을 갖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성찰하면서, 참으로 온유하고 지혜롭고 그리고 담대하고 거룩한 생을 살아갈 수 있게 은총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마음에 정결함을 주시고 우리 마음에 거룩함을 주사 온전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요한복음 8장 1-11절 강해: 간음 중에 잡힌 여인과 예수님의 지혜
제공해주신 글은 요한복음 8장 1절부터 11절 말씀(간음 중에 잡힌 여인의 이야기)을 **강해(설교)**하는 내용으로, 말씀의 내용과 그에 대한 목회자의 해석 및 적용, 개인적인 일화 등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주요 내용을 말씀 본문 해설과 목사님의 교훈 및 적용 두 부분으로 나누어 자세히 요약했습니다.
1. 📜 요한복음 8장 1-11절 본문 해설
- 배경: 예수님께서 밤새 감람산에서 기도하신 후 아침에 성전으로 돌아와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시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와 예수님 앞에 세우고 질문했습니다.
- 질문: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신명기 17:7, 22:24에 근거).
- 의도: 이 질문은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치라' 하면 로마의 법(사형 집행권은 로마에 있음)을 위반하게 되고, '치지 말라' 하면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는 딜레마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 예수님의 첫 번째 행동 (냉정함을 위한 조치):
-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쓰셨습니다.
- 의미: 이는 흥분된 군중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그들의 시선을 분산시켜 각자가 냉정함을 되찾고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한 지혜롭고 놀라운 조치입니다.
- 예수님의 두 번째 행동 (핵심 선언):
- 묻기를 그치지 않자 예수님께서 일어나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신명기 율법상 죄 없는 증인이 먼저 돌을 던지게 되어 있음)
- 적용: 이 말씀은 남의 눈의 티를 탓하기 전에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돌아보라는 교훈(누가복음 6:42)과 연결되며, 자기 성찰을 촉구합니다.
- 율법의 모순 지적: 신명기 22장 22절에 따르면 간음한 남자와 여자를 둘 다 돌로 치게 되어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남자 없이 여자만 끌고 온 모순을 지적합니다.
- 결과: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부터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모두 물러갔고, 예수님과 여인만 남았습니다.
- 용서와 회복:
- 예수님은 여자에게 "너를 고발하는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라고 물으셨고, 여인이 "없나이다"라고 답하자,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는 지적하지만, 사죄와 회복의 은총을 주심)
2. 🙏 목회자의 교훈 및 적용
- 분노 조절과 지혜:
- 급한 성격 때문에 운전 중 시비를 걸었던 목사 친구의 일화를 통해 냉정함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 예수님이 땅에 글씨를 쓰신 것은 감정의 격동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는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함을 알려줍니다.
- 보고 듣고 쓰는 것의 중요성:
- 보는 것은 감정을 격동시키기 쉽고, 듣는 것은 좀 더 생각하게 하며, 쓰는 것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깊은 자기 성찰을 할 수 있게 합니다.
- 예수님이 땅에 글을 쓰신 것은 군중 심리를 개별화하여 각자가 냉정하게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생각하도록 돕는 지혜로운 방법이었습니다.
- 죄인 의식과 겸손:
- 성 프란시스가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라고 고백했던 일화를 소개합니다.
- 이는 **"알고 짓는 죄," "자주 짓는 죄," "마음으로 짓는 죄"**를 인식하며 스스로 가장 큰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깊은 자기 성찰과 겸손의 태도를 강조합니다.
- 비판과 자기 성찰:
-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비판, 미움, 시기심 등은 내가 나를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자가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남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누구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 용서의 능력 (루이스 스미스의 책 인용):
-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의 속박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으며, 용서한 사람에게는 미래가 보입니다.
'◑Comprehensive◑ > Seonhe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2년 02월 27일] 그치지 않는 고통(롬 9:1~8) (0) | 2022.10.22 |
|---|---|
| -[2022년 02월 20일] 구속함을 기다리는 자(롬 8:18~25) - (0) | 2022.10.22 |
| -[2022년 02월 06일] 예수를 바라보자(히 12:1~8) (0) | 2022.10.22 |
| -[2022년 01월 30일] 하나님을 아는 지식(호 6:1~6) (0) | 2022.10.22 |
| -[2022년 01월 23일]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5~30) (0) | 2022.10.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