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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길 (이사야 50:4-9)

by 【고동엽】 2022. 9. 22.

제자의 길  (이사야 50:4-9)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사망의 골짜기”라고 하는 사막지대가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비행기를 타고 지나가다가 그곳을 본 적이 있는데, 그곳을 “사망의 골짜기”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완전히 사막 지역이어서 웬만한 교통수단으로는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기차도 없고, 자동차나 비행기도 없는 150년 전에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려고 하다가 많이 죽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입니다. 가도 가도 사막 뿐이요, 물도 없는 그곳을 사람들이 지나려고 한 이유는 캘리포니아에 금이 많이 나온다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무작정 마차를 타고 그곳에 들어섰다가, 물과 양식이 떨어지고 사막의 더위를 이기지 못하여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한참 목이 말라 헤매고 있을 때, 신기루를 따라가다가 죽음을 재촉하게 된다고 합니다.
신기루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도 성지 순례를 하다가 신기루를 본 적이 있는데, 관광버스를 타고 광활하게 전개되어 있는 네게브 사막을 지나다 보니까, 우리 버스 앞으로 새파란 물결이 파릇파릇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잔잔하고 푸른 호수가 아름답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건조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신기루 현상이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막에서 이 신기루를 쫓아가다가는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금을 쫓아 사막에 들어섰다가 신기루를 쫓아 헤매며 죽어가는 ‘사망의 골짜기’가 어쩌면 우리 인생과 비슷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정말 우리의 타는 목마름을 해갈해 줄 물이 없습니다. 정치도, 권세도, 문화도, 예술도 다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진정으로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해 줄 물은 아닙니다. 마치 신기루처럼, 한 시대를 풍미하던 사상이나, 학문, 문화도 그냥 왔다가 지나갑니다. 한시대의 산물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으로 우리의 목마름을 달래줄 수가 있겠습니까?
얼마 전에 제 사촌 형이 손자의 결혼식에 주례를 해달라고 해서 ‘한국의 집’이라는 곳에 가서 주례를 마치고 집안 어른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한 할머니가 저에게 “나 모르겠니?”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난 지 너무 오래되어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나 형수야”라고 하였습니다. 제 사촌이 열 여섯 명이라, 누가 누구인지 잘 분간하기 어렵기도 했지만, 벌써 40년이 훨씬 넘었으니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니 모든 것이 그렇게 허무하기만 합니다. 저는 그 형수님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생각되는데, 그 고왔던 모습이 지금은 온데 간데 없이 주름살 많은 노인의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청춘도 금방 지나갑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렇게 다 지나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덧없이 지나가는 인생 속에서 신기루와 같은 헛된 것을 따르며 인생을허비하는 경이 많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사막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기루가 아니라,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시는 분입니다. 종려주일을 맞은 오늘, 주님이 주시는 생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생수를 마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닫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가신 길은 세상의 욕망을 따라 가는 멸망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겉에서 보기에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 조차도 예수의 가시는 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요, 메시야로 오신 이가 어찌하여, 영광의 길을 버리고 고난의 길로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종종 왜 예수께서 그 고난의 길을 가셨는지, 왜 우리가 그 길을 따라 가야하는지 알 수 없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뒤를 따르려면 먼저 주님으로부터 듣고 배워야만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되기를 바라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여기서 “학자”란 히브리어로 “리무드(limmud)"인데 이는 "배우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라마드(lamad)”의 수동태로서, ‘배우는 사람’, 즉 ‘제자’(disciple)를 의미합니다. 학자란 이처럼 언제나 스승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대학 교수들은 한번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박사 학위는 공부하는 방법을 알았다는 증명일 뿐이며, 계속해서 공부하지 않으면 학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의 물을 마시기 위해 우리는 모두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가 되려면 날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는 데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학구적인 집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이 분은 새벽기도 시간이나, 성경공부 시간마다 열심히 참석하시는데, 항상 필기도구를 준비하셔서 중요한 것은 꼭 적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은 학생시절에 공부 잘 하셨겠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말하기를, “제가 학생 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듯이 공부했으면, 무엇이 되어도 되었을 것입니다.”하고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분은 비록 세상적인 학자는 되지 못하셨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은 신앙적인 학자가 되셨으니, 오히려 더욱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침마다” 깨우쳐 주셔서 마치 학자처럼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사야처럼, 아침마다 주의 음성을 듣고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벽기도를 나오시는 분은 새벽기도를 통해서, 못나오시는 분이라도 아침마다 시간을 정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꼭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학자의 수준에 이르는 주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이제 듣고 배운 자는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본문에서도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것을 알게 하시고”(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학자같이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학자처럼 말하도록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학자처럼 말한다는 것은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유식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지혜는 세상의 학문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입니다(잠 1:9).
‘학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대상을 이사야는 “곤핍한 자”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와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이사야에게 ‘학자의 혀’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말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 당시에도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곧 해방될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아니라, 그들이 제멋대로 지어낸 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위로의 말이라 해도 그 말을 듣고 아무도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릴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사탕발림이요 거짓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곤핍한 자에게는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곤핍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곤핍한 자, 곧 가난하고, 병들고, 억눌리고, 소외되고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능력이 됩니다. 우리도 이번 총동원 주일을 앞두고 전도초청에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곤핍한 인생들에게 참된 위로와 소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나 자신을 죽이고 겸손하게 그들과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그렇다고해서 그 사람들 앞에서 주저하거나 주눅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이 초청에 응하게 되면 구원을 얻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장래에 광명이 비치게 됩니다. 이런 구원의 자리에 초청한다는 것은 대통령의 초청보다 귀한 것입니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연례국가 조찬기도회에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인들이 한 번이라도 참여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압니다. 그래서 여행경비를 다 부담하고서라도 그 자리에 참석하는 티켓을 구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총동원 주일에 초청을 하는 것은 그보다 더욱 영광스러운 자리에 초청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자리, 생명의 자리에 초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담대히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3.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유대 관원들에게 붙잡혀 빌라도에게 넘겨졌을 때,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함부로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과 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끝까지 비폭력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이렇게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무력함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기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이렇게 당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어떤 대적도 감히 예수님을 넘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고 하시며, 끝까지 무저항적으로 대결하셨습니다.
왜 예수께서는 끝까지 무저항 비폭력으로 일관하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①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하면 악순환만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어떠한 경우에도 비폭력으로 끝까지 대해야 합니다. ② 예수님은 폭력을 당하는 자의 고통에 동참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신이 높은 곳에 군림할 뿐, 인간의 고통과는 무관합니다. 인간을 장난감 다루듯이 하기도 합니다. 일방적으로 운명의 짐을 지워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소식을 복음이라고 선포합니다.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 예수님이신데, 그분은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시며 같이 아파하십니다. ③ 예수께서 한 마리의 어린 양처럼 십자가의 고통을 말없이 당하신 것은,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카네기는 시장실에 들어가서 별로 좋지 않은 그림 한 점이 벽의 제일 중요한 자리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노가 비스듬히 놓여 있고, 낡은 거룻배가 썰물이 빠져나간 모래 위에 쓰러지듯 뉘여 있는 모습은 절망스럽고 처절한 인상마저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밑에는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시장은 자기가 세일즈맨으로 있었던 젊은 시절 거듭되는 실패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절망과 좌절 속에 있었을 때, 이 그림을 보고 ‘지금은 비록 절망의 상황 속에 있지만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 그러면 배는 물 위에 뜨고 힘껏 노를 저을 수 있겠지’ 하는 확신이 생겼다고 말했습니다. 시장이 된 뒤에도 날마다 그 그림을 바라보면서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는 소망을 가지고 산다고 했습니다. 카네기는 시장의 말에 감동을 받아 언제나 고난의 끝을 생각하며 현재의 고난을 소망으로 바꾸는 삶을 살기 시작했고, 결국 강철왕이라는 별명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헬렌켈러는 “나는 나의 역경(逆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 나의 일, 그리고 나의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고 했는데, 이때 우리가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받는 고난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총동원 주일에 작정한 사람들을 초청할 때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로버트 슐러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무사 항해를 보장하시지는 않지만, 무사 도착을 약속해 주십니다. 주를 위해 이정도 고난은 감수할 수 있다는 결단과 함께,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인은 많지만, 제자는 흔치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 그 말씀을 전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비록 그 길이 고난이 길이 될 수도 있겠지만, 톨스토이의 말처럼 고난이 지나가면 반드시 단맛이 스며듭니다. 강남교회 성도 여러분 모두가 고난의 길도 마다하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기로 결단하는 제자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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