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과 유혹의 방정식 (눅4:1-13)
요즘 들어 생계형 범죄라는 말이 종종 등장합니다.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나쁜 짓을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은 실직하여 돈을 벌지 못합니다.
아이는 배고프다고 울며 보채는데 우유를 살 돈이 없습니다.
엄마는 배가 고파 우는 아이를 보며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슈퍼에 가서 몰래 우유를 훔쳤습니다.
그런데 그만 감시카메라에 걸려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장은 서로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죽했으면 우유를 훔쳤겠느냐며 엄마를 옹호합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남을 물건을 훔치는 것은 도둑질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해서 해석할 때 우리는 상황론에 빠집니다.
어느 입장이 정확하게 ‘옳다’ 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양면성을 우리는 테스트(Test)와 템테이션(Temptation)-유혹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테스트는 우리말로 ‘시험’입니다.
시험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게 시험을 치는 이유는 골탕 먹이거나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의 성취도를 측정하여 부족한 부분을 도와주고, 잘 하는 부분은 더 잘하도록 도와주기 위함입니다.
이와 반대로 템테이션은 ‘유혹’입니다.
유혹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남을 호리어 나쁜 길로 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험과 유혹이 칼로 두부를 자르듯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치루는 시험은 그 자체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학생 중에는 시험 노이로제에 걸려서 공부에 취미를 갖지 못하고,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중도 탈락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시험은 학생을 돕는 보약이 아니라 독약이 됩니다.
결국 학생을 도와주는 테스트가 아니라 오히려 파멸시키는 유혹이 되고 맙니다.
이와 반대로 유혹이 약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습니다.
그때 요셉은 단호하게 물리칩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요”
달려드는 보디발의 아내를 밀어내고 도망칩니다.
결국 요셉은 이 일로 감옥에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감옥에서 요셉을 엘리트로 훈련을 시킵니다.
유혹을 물리친 요셉은 감옥에 가는 고생은 했지만 오히려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
어떤 유혹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잘 극복하면 오히려 득이 되고 축복이 됩니다.
그것을 이기면 오히려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Test(시험)가 됩니다.
반면에 자신을 도와주려는 의도로 행해지는 시험도 잘못하면 자기 파멸로 이끌어 가는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험과 유혹의 방정식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받으신 3가지 시험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언제 시험을 받으셨습니까?
1절에 보면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말씀하십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충만하게 임한 상태입니다.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는 음성을 들은 직후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인정을 받고, 하늘의 대관식을 치른 후에 시험을 받으십니다.
여기서 시험이라는 단어는 ‘페이라조(peirazo)’입니다.
이 단어는 ‘시험해 보다, 시련하다, 유혹하다, 증명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성령님께 이끌렸다는 말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Test(시험)이고, 마귀 입장에서 보면 Temptation(유혹)입니다.
40일 동안의 광야에서의 기간은 시험과 유혹이라는 양면성을 가집니다.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험이나 유혹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좋을 때도 올 수 있고, 나쁠 때도 올 수 있습니다.
성공할 때 올 수도 있고, 실패할 때 올 수도 있습니다.
건강할 때 올 수도 있고, 병들었을 때 올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좋을 때 올 수도 있고, 믿음이 약해졌을 때 올 수도 있습니다.
시험과 유혹은 때와 장소,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옵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시험이 온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후에 시험을 받으십니다.
전쟁터에서 죽은 적군에게는 총을 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자에게만 총을 쏩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시험이 있고, 연단이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만큼 마귀에게 위협적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영적 상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잘못된 사람들에게는 유혹하지도 않습니다.
가만 두어도 계속 죄 짓고, 잘못된 길로 가는데 뭐 하러 유혹하겠습니까?
우리 안에 계속되는 시험이 있고, 연단이 있다면 오히려 기쁘게 여기십시오.
야고보 장로는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1:2-3)
나에게 시험이 있다는 것은 내 믿음이 살아있다는 증거임을 알고 감사하십시오.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시험을 치는 것이 아니라 더 연단하여 정금 같은 믿음으로, 더 놀라운 축복으로 채우시기 위한 과정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험의 교묘함과 집요성>
마귀의 시험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또한 교묘한 방법으로 다가옵니다.
남아프리카 밀림 속에는 부쉬마스터라는 독사가 있습니다.
이 뱀은 몸집이 크고 공격적이며,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리면 20분 이내에 생명을 잃을 만큼 무서운 뱀입니다.
그런데 이 독사는 기어가는 모습이 마치 무지개의 영롱한 빛처럼 너무나 황홀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 아름다움에 반하여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을 때에 갑자기 공격을 해서 생명을 뺏는다고 합니다.
마귀가 유혹하는 것들은 누가보기에도 아름답고 화려합니다.
멋있어 보이고, 매력적입니다. 그것이 바로 함정입니다.
처음부터 머리에 뿔을 달고 다가와서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상식적이고, 매력적이고, 이성적입니다.
예수님이 당하는 시험을 보십시오.
첫 번째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서 먹으라”(3절)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40일 동안 금식하신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생리적으로 굶주린 상태이기에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마귀는 그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듭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추가 옵션을 부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것이 결정적인 옵션입니다.
이미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정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돌로 떡 만드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마귀의 교묘한 함정입니다.
자식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면 오히려 부모가 칭찬하지 않겠습니까?
마귀는 오늘도 의식주의 문제를 가지고 우리를 시험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 말처럼 먹고 사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정말 곤고합니다.
여기에서 많은 분들이 마귀의 유혹에 걸려 넘어집니다.
이것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신명기 8장 3절 말씀을 인용하여 마귀를 물리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예수님은 여기서 떡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는 데는 의식주의 모든 것이 필요함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선순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세상에는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지혜입니다.
신앙인으로 우리들이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산상 수훈에서 잘 말씀해 주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마6:31)
이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고,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함을 주님은 다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주시는 말씀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6:3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서 순서를 뒤바꾸면 안됩니다.
이성적으로는 먹고 사는 것이 문제일 것 같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 가운데 사는 것이 우선순위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야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이 돈을 많이 벌면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정이 깨지고, 건강을 무너지게 하는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되면 우리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요 성도의 태도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고 어려워도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딱 한번만 눈감고 돌로 떡을 만들라는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 한 번의 유혹이 평생 우리를 마귀의 종노릇하게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34)
오늘을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내일은 더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채우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고 감사하십시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데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믿음으로 기대하고 사모하는 자에게 반드시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로 채우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 주님께서 풍성하게 채우실 것을 믿고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마귀는 천하만국을 다 보여주면서 절을 하라고 합니다.
절을 하면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다 주겠다고 시험합니다.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은 영적인 것입니다.
의식주의 문제를 넘어서면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마귀는 더 고차원적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접근합니다.
사탄에게 절을 하면 천하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매력적인 유혹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단순히 경배의 대상을 바꾸기만 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귀는 우리에게 다가와 속삭입니다.
너의 예배의 대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굳이 하나님만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종교의 폭을 넓히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합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은 절대적 진리를 거부합니다.
기존의 모든 진리들을 상대화시키고, 해체합니다.
다양성을 최고로 여깁니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융합하여 퓨전화시킵니다.
따라서 어느 한 종교만을 고집하지 말고 각자의 종교성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특별히 기독교에 대해서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고 공격합니다.
왜 천주교는 불교와 손을 잡고 일을 하는데 기독교는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느냐고 공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속 좁은 사람들이 다니는 종교인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타 종교를 비방하거나 무시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분들에 대해서 존중해 주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진리와 비진리를 혼합시킬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테이블 위에 마실 수 있는 음료수와 독이 든 음료수가 있다면 자녀에게 네가 알아서 선택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무슨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마실 수 있는 것을 선택하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이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길이 아닌 것을 길이라고,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생명이 없는 것을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종교를 통해서 우리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바른 삶을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부활이 없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마귀의 유혹은 바로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올려놓고 그것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섬기는 행위입니다.
이에대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시험을 물리치셨습니까?
8절에 보면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고,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마귀의 두 번째 영적인 시험을 물리치는 비결입니다.
셋째로, 마귀의 시험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조건을 내겁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이 인정하는 아들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성전 위에서 멋지게 한 번 뛰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너를 지켜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늘의 천사들이 너를 받들어 발가락하나 상하지 않도록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사탄의 세 번째 시험은 바로 명예입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존경을 받고 추앙받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명예를 잃어버리면 그것만큼 비참한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마귀는 바로 그것을 이용합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의 명예는 하늘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명기 6:16절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12절)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맛사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던 것을 인용하십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 다투면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시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헛된 유혹으로 시험치 말라고 강력하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세상의 명예의 유혹을 물리치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을 크게 갖는 것입니다.
믿음의 고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심하고 세상의 화려함과 힘을 좇다보면 금방 명예의 덫에 걸려 넘어집니다.
마귀의 시험과 유혹은 너무나 집요하고 교묘합니다.
한번 도전했다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신하고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주목하고, 공격하려고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직면하는 여러 가지 상황을 시험으로 보느냐 유혹으로 보느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라면 믿음으로 인내함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유혹이라면 하나님의 시험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거친 파도를 만났을 때 휩쓸려 가는 사람이 있고, 오히려 서핑을 즐기는 자도 있습니다.
문제는 상황이나 환경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냐 입니다.
지금도 마귀는 우리를 공격합니다.
의식주의 문제로, 영적인 문제로, 명예의 문제로 접근합니다.
마귀를 이기는 비결은 바로 삶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함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의 모든 쓸 것을 더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날마다 진리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말씀의 능력을 붙잡는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예수님만을 믿음의 주로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만이 마귀의 불화살을 막을 수 있는 방패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고도를 높여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전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한 눈 팔지 않고,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나갈 때 우리는 승리의 깃발을 흔들며 주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미 우리는 마귀의 시험출제 경향을 파악했습니다.
더 이상 시험과 유혹에 낙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험과 유혹의 방정식을 잘 풀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양인순 목사 설교 중에서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습관이 잘못되면.. (고전 10:1-13) (0) | 2022.09.22 |
---|---|
믿고 순종하는 어린이 (0) | 2022.09.22 |
예수만 바라봅시다. (마14;22-33) (0) | 2022.09.22 |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 (롬 8:31-39) (0) | 2022.09.22 |
오직 은혜 (엡 2:1~10) (0) | 2022.09.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