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방식과 신앙 (고후10:4-6)
근세철학의 시조라 하는 르네 데카르트는 프랑스 중부의 관료귀족 집안출신으로 생후 1년 만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10세 때부터 학문에 깊은 연구에 들어갔던 자로 유명한 명제, 'I think, therefore I am.' 즉 '나는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당신의 생기를 불어 넣어시고 짐승들과 다른생각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의지의 결정을 하게 하시고 지성적인 인격적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원죄를 지은 후 인간의 지성은 죄로 물들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잃어버리고 온갖 복잡한 생각의 사람으로 혼란을 겪으며 사는 오늘의 삶의 정서를 받아버렸습니다.
"사람은 평생 자기 뇌의 10%밖에 쓰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 19세기 미국의 실용주의자요 심리학자이기도 한『윌리암 제임스는"사람의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꿔진다"』는 말을 했습니다.
성경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받는 인간적 오해에 대해변명하는 내용으로 그리스도에게 복종치 않는 사고방식을 견책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다른 성경 구절들과 상황에서도 이와 같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신앙인이 오해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가르침을 볼 수 있습니다. 사고방식과 신앙이라고 하는 사이에 오해가 일어날 수 있는 긴장이 생기는데 이 시간 생각의 차이점과 신앙의 입장 정리를 하면서 참된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고 영감을 얻고자 합니다.
1. 사고방식은 합리적인 이성이고 신앙은 성경이 사유의 출발
사람이 가진 생각의 자유는 사상적인 구조를 벗어날 수도 있고 시공간의 제한 없이 마음껏 사유하는 정신 세계입니다. 때문에 여러 가지 이론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우리는 그 생각으로 철학이라 혹은 종교라고도 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다양한 생각들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엄격히 따져보면 그것은 겸손이라기 보다 개성적인 생각의 주장이 전체적일 수 없으므로 이에 따르는 합리주의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에 가지는 자세일 뿐입니다. 겸손은 가능한데 감추는 것이지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가능함을 인정하는 것은 겸손이라는 도덕적인 말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법을 받아 속죄와 감사의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하나님이 규명하신 법대로 행해야 했습니다.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동행했던 형인 아론의 아들들은제사장이 되어 성전에서 봉사하는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10장에서 그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이 내려주신 불로 분향하지 아니하고 다른 불을 가져다가 분향하다 죽었습니다.
레 10:1-2『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왜 죽었나요? 불이 꺼져서 분향이 안되었나요?불이 약했나요? 왜 그들이 죽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명하신 불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특별한 경우를 보게되는데, 레위 지파 중 고핫 자손은 회막의 일에 참가하여 봉사하되 특히 행진할 때에 증거궤(법궤)와 제사에 사용하는 여러 기구들을 메는 것이 그들의 직무였습니다(민 4:1-15, 7:9). 아론과 그 아들들이 여러 성물들을 정돈한 후에 고핫 자손이 그것을 메되 그 성물을 만지는 때에는 죽음의 벌을 받도록 되어 있었는데, 웃사가 잘못하여 죽게된 것을 봅니다.
삼하 6:6-7『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 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왜 죽었습니까? 하나님의 법궤를 싣고 가던 암소들이 뛰고 있고 금방 법궤를 싣고 가던 수레는 자빠질 것 같은데 붙들어야지 어쩝니까? 그래서웃사가 자연스런 반응으로 법궤 떨어질까 봐 붙들었습니다. 그런데,하나님의 명을 기억치 못하여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형벌로 즉사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신약에 어떻게 나타납니까?
능력을 행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사하였지만 그는 불법을 행한 자였다는 이유로 심판 날 버림을 받게 되는 무서운 경우가 있습니다.
마 7:23『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기독교는 지혜롭게 잘 살아가자는 문화 양식을 가르치는 종교나 사회의 특별한 그룹의 성격이 아닙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신으로 알고 계시된 말씀을 토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참된 가치를 따라 행복을 얻게 되는 종교입니다.
2. 긍정적 사고방식은 기복주의이고 신앙은 하나님 영광주의
20세기 말에 가장 히트를 친 삶의 방식을 위한 용어로는 당연 적극적 사고방식, 긍정적 사고방식이라는 이 말입니다. 노만 빈센트 필(뉴욕 마블 협동 교회 목사, 가이드포스트지 발행인,'적극적인 사고방식'의 저자,종교다원주의자, 프리메이슨 33도)이 적극적사고방식의 대가라면 제 2인자가 되는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 미국 수정교회(Crystal Church)
원로목사, '긍정적 사고방식'의 저자, 종교 다원주의자,프리메이슨 33도)가 말하는 긍정적, 적극적(positive) 사고방식은 삶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부정적(negative)인 사람보다는 화목과 발전을 기대할 수는 있습니다.
1000만부 이상 팔린 '적극적 사고방식'이라는 책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의 사람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게 하는데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긍정적, 즉극적 사고방식은 신학 사상으로 말하면 소위 복음주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행복을 누리자는 목적으로 성경의 근본적인 복음을 벗어난 다른 복음입니다. 사람을 위한 복음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기쁘게 하자는 복음사상은 다른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갈 1: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성경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고 신의 은총을 쉽게 받을 수 있을까를 가르치는 소위 삶의 방식을 위한 글이 아닙니다.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기원,그리고 사후의 세계가 연결되는 영원한 역사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지 인생 70-80의 생애를 위한 삶의 지혜서가 아닙니다.
뉴에이지(New Age)운동이라는 것도 이 사고방식주의의 다른 말입니다.이 운동의 어원적인 말은 점성학에 있어서 물병자리에 해당되는 말로서, 바로 이 시대가 인간이 신이 되고 만물이 신이 되어 모든 것을 지배할 수있는 인간 정신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창조의 신도 없고 궁극적으로 잘되면 그만이다는 삶의 방식을 주창합니다.뉴에이지는 기존 가치와 문화를 배척하고 종교·의학·철학·천문학·환경·음악 등의 모든 영역에 새로운 가치 이념을 추구하는 문화운동입니다. 명상, 요가, 기수련(단학),뉴에이지 음악, 영화 등으로 사람들의 영혼에 기를 빼앗고 있습니다.
뉴에이지는 불교의 정신과 많이 부합되고 또 불교의 신비와 접촉점을 이루며 매우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한국의 불교 조계종『성철 종정 승려는 1987년(불기 2531년)음력 4월8일 에 발표된 법어에 의하면'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당신은 본래 거룩한 부처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 인생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됩니다.』라고 했습니다. 뉴에이지 정신의 그 말로는 사탄의 것으로 결과를 초래합니다.
1960년대에 시작된 개성 ·자율성 ·다양성 ·대중성을 중시한 포스터모더니즘(postmodernism) 즉,탈이념적 사고주의로 전통적 견해를 무시하고 새로운 현대사회에 적합한 개성적 사고주의나,
페미니즘(feminism)은 최근 여권신장을 넘어서서 남녀 성차별이 없는 데까지 이르러 결국 하나님이 지으시며 부여하신 남녀의 특유한 도덕적 개성마저 무너지면서 여성주의적 사고로 문화 전반에 영역을 확대하는 것등은 결국 삶의 방식을 시대에 맞춰 새롭게 적응해보겠다는 진리가 근거가 못되고 시류에 따른 사고방식이다 보니까 상당한 문제점들을 낳고 있습니다.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무엇이 달라지고 잘되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게 가르쳐 준 다른 복음의 전수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것 입니다. 성경은 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딤후 4:1『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우리가 사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우리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존재인가를 알아야 그 삶의 과정을 제대로 밟을 수가 있습니다.
4『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엡 6: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세속주의는 결국 마귀의 욕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일 5:19『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3.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
5『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생각 저 생각들이 어느 날부터 죄로 인해 정상이 아니고 가치에 있어 죽은 거라고 했습니다.
엡 2:1『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신학을 해도, 목회를 해도, 하나님께 복종하고 순종하는 태도가 빠지면 그때부터는 마귀가 역사해서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마귀는 세속주의 자기 영광으로 교만하기 원합니다. 태초부터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모든 생각을 복종시켜야 하는 처지라는 사실만 알아도 성공한 인생입니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순종은 이적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고후 13:8『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삼상 15:22『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딤후 3:7『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옛날보다 예수 믿기 쉬운 줄 압니다. 그것은 환경이 바뀐 것이 아니라 목사들이 잘못 가르쳐서 그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결코 믿음은 사고방식을 적극적으로 가진다고 잘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롬 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암 8:11『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말세가 되면) 마 24: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고전 4:6『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오늘날 교회는 적극적 사고방식, 긍정적 사고방식을 토대로 성경을 해석 하여 사람들에게 믿음이 생각하기 나름인 줄 착각하게 해버렸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할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주님께 어떻게 하면 복종시킬 것인가를 걱정해야 합니다.
본문 5절에,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할 때 여기 사로잡아, 라는 말은 아이크말로티죠(aijcmalwtivzw)는'포로로 하다','사로잡아 데려가다'로 해석되는 말로 우리들의 생각을 전쟁포로 잡아오듯이 강압하여 주님께 복종을 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바른 신앙이 생기고 그래야 바른 신학이 나오고 그래야 하나님의 바른 구원과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신앙은 결코 사고방식의 차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날 얼마나 많은 문제점이 있는가를 반성해봅니다. 또한 우리가 그렇게 물들어 가면서 순종과 믿음보다 잔꾀를 부리는 잔머리 굴리기를 하지 않는가를 비판해봐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참된 지혜는 약 1: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심에 근거하면서 모든 생각을,지성을, 의지를 주님께 굴복시켜 온전한 성도가 되어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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