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은혜 (엡 2:1~10)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역사의 중심이 되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때를 기준으로 하여 역사를 산정하여 그것을 전 세계 사람들이 다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탄절로부터 A,D의 역사를 쓰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의 시기를 B,C 즉, ‘예수 그리스도 이전’ 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나 타 종교인이나 다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또한 우리가 가장 귀한 영의 양식으로 삼는 이 성경도 그 중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기록이 구약이며, 예수님이 오신 그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이나 사상과 다시 오신다는 재림에 대하여 기록이 신약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그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바로 우리의 해답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인류의 존재의 목적이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풀어주시고 궁극적인 만족을 주실 수 있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요 성경말씀의 중심이어서 우리 인류의 역사와 신앙의 핵심이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구원을 받지 아니하면 참된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문제는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면서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며 동시에 근본적인 과업입니다. 오히려 인간문제의 전부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는 그토록 중대한 사안입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아야할 것은 하나님의 과업이며 동시에 피조세계의 근본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구원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존재를 전재하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는 하나님의 뜻을 보면 우리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리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받는 은혜 중위 가장 큰 은혜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은혜이며 값으로 지불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이 말씀을 우리에게 잘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우리의 모습과 구원 받고 난 뒤의 우리의 모습이 잘 구분되어 나타납니다. 우리는 긍휼에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그 한없으신 은혜로 구원받은 ‘오직 은혜’의 복음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들이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1.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
구원받기 전의 우리는 이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를 따라 가면서 불순종한 자의 신분이었습니다. 아담 하와의 타락으로 인하여 불순종의 자녀가 되었으며 마귀를 따라 섬기며 육체의 소욕에 의하여 인생을 살고 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섬기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떠나서 육신의 정욕에 이끌리어 살아가던 흑암의 권세 아래서 캄캄한 삶을 살고 있던 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살아야겠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참으로 모순되게도 죽음의 지배를 받으며 거기에 메여 있었습니다. 행복하기를 원하는 인간에게 불행이 있었습니다. 의가 다스려지고 평화하기를 원하는 사회에 부조리와 모순과 갈등과 불의가 꽉 차 있었었던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현실이며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자화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육신은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있었을 때는 죽었던 자들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였습니다. 그래서 세상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를 따랐고 불순종하였던 우리였습니다. 그런 우리였던 결과로 우리는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벗어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대상이었던 우리였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욕심에 이끌려 다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며 육체가 원하는 대로 이끌려 다니던 그런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그런 사람들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데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관계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 아니 우리가 사랑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그 무서운 진노의 대상이 된다는 것, 이 얼마나 기가 막히는 현상입니까? 이게 우리였고 이게 우리들의 자화상이었습니다. 얼마나 불행하고 초라한 그런 우리입니까? 우리 자신은 우리를 대단하고 무언가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그런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그걸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면 우리는 그런 초라하고 아무 것도 아닌 죄와 허물로 죽게 되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마는 우리인 것입니다.
2.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4).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런 인간의 초라한 모습을 그대로 두실 수 가 없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보시고 사랑하신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보내셨습니다. 그 이유로 하여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행 4:12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윤리와 도덕적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불가의 수도 같은 방법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나의 힘과 노력으로 아무리 노력하여도 여전히 인간은 구원의 길은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그 사랑이 우리 인간을 진노의 대상에서 구원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형벌을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인간구원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만이 오직 유일무이한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신 사랑의 표시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행하여 주신 유일한 방법이 바로 십자가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십자가는 우리 모두가 너무나 감격하고 감격하면서 대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나는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하지 아니하겠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거듭남과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근거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근거로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십자가가 있을 수 없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우리의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롬 5:6-9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죄가 많고 우리가 연약하여 범죄하여도 하나님은 그 긍휼로 우리를 사랑하시어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희생하게 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3.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6).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며 구원을 받았을 때에 주님은 우리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우리를 낮고 천한 곳에 그냥 두시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죽음의 자리에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계셨으나 그 캄캄한 무덤에 그냥 두시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그를 일으키셨습니다. 그 일으키심에 우리가 함께 일어난 것입니다. 나는 죽고 부활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도 본문 1-2, 3절의 상태에 그냥 있으면 아니 됩니다. 즉 진노의 대상으로 그냥 머물러 있어선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4절 이하로 달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아니합니다. 자꾸만 우리를 어둠의 권세 아래로 끌고 가려는 세력이 잇습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마귀가 우리를 자꾸만 끌고 가고 우리도 또한 우리의 욕심에 끌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고 구원은 받았으나 여전히 세상 풍속을 따라 가는 삶 속에 묻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과감하게 일어나고 달려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죽음을 맞아야 할 우리를 영광스러운 사람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영원한 하늘나라 보좌에 우리를 올리셨으며 우리를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로 인도하셔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아름답고 영화로운 자리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 시간 우리의 눈을 들어 그 영광스런 보좌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라 갈 영광스러운 그 보좌에 우리를 위하여 준비된 자리로 올라가게 되는 꿈을 보시고 그 곳을 향한 열정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한 감방에 두 사람의 수감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에게 어떤 전도인이 끊임없이 전도하였더니 한 사람은 전도를 받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는 감격 속에서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면서 수감생활을 하였습니다. 날마다 감사하며 찬송하며 웃으면서 활기찬 생활을 하는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만일 내가 여기에 들어오지 아니하였으면 주님을 알지 못하고 밖에서 오히려 더 죄를 짓는 그런 사람이었을 텐데 하나님의 은혜라고 감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과 달리 다른 한 수감자는 언제나 한숨을 쉬며 원망하며 불평과 한숨으로 가득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극도로 원망에 찬 나날을 보내며 자기가 그렇게 된 것은 누구의 탓이라며 이를 갈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둘 다 형기를 마치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감사하며 지내던 사람은 그동안 쓴 원고뭉치를 가지고 출판사로 달려갔으나 부정적으로 일관하여 원망하며 이를 갈던 사람은 정신병원으로 실려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엇이 이 두 사람의 운명을 바꾸게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거부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그 사랑을 마음으로 받으며 하나님 앞에 언제나 뜨거움으로 반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에 주님은 그에게 따뜻한 사랑으로 반기며 도우시며 인도하시며 놀라운 사랑으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이끌지 아니하면 하나님께로 올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성령의 이끄심이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있다는 것도 성령님의 인도와 사랑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구원 받아서 복음에 들어오도록 만드시고 인도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이십니까? 이 얼마나 가슴 설레이며 이 얼마나 눈물로 감격하는 그런 은혜의 복음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부르는 찬송이 이것입니다.
4. 그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려 하심이라(7)
한 집사님이 제 사무실에 컴퓨터 정품 한 대를 사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컴퓨터를 설치하고 켰는데 인터넷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쓰던 것은 비록 느리긴 하였지만 그래도 인터넷을 통하여 많은 자료를 얻고 메일을 주고받으며 잘 활용을 하였는데 인터넷이 안 되니 답답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전화국에 전화를 하고 시키는 대로 차근차근히 하였더니 인터넷이 연결되고 원하는 자료들이 홍수처럼 얼마나 빠르게 잘 나오는 지 환상적이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접속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듭난 자,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께 잘 접속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놀라운 신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접속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접속한다는 말은 영어로 plug in입니다. 우리의 프러그를 하나님께 집어넣어야 합니다. 인터넷에 접속하듯 하나님께 우리가 들어가야 하며 하나님 우리 안에 들어 어셔야 합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 오셔야 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은혜가 쏟아지게 됩니다. 그 안에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들이 한없이 쌓여 있으며 예비 되어 있습니다. 접속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접속되면 그 안에서 풍성한 은혜의 삶을 살게 되고 놀라운 생수의 강물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한없는 은혜의 바다에서 풍성한 삶을 사며 부족함이 없는 만족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 할 때에 참 지혜를 얻고 능력을 얻게 됩니다. 프랑스의 정치 철학자인 알렉스 로키빌리 라는 사람이 미국이 어떻게 대영제국을 이겼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조사를 하였습니다. 지하자원, 좋은 대학들, 합리적인 헌법, 정치적인 환경 등 아무리 살펴도 딱히 미국이 영국을 이길 수 있는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미국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진지한 그들의 신앙심에서 오는 지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이 영국을 이기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그 힘은 바로 영적인 힘이로구나 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초자연적이며 초능력적인 인간이해의 범주를 훨씬 넘을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에게 한 성도가 어떻게 하여 사탄을 이길 수 있는 지 그 방법을 질문하였습니다. 그 때에 루터의 대답은 “자주자주 내게도 사단이 찾아와서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네. 그리고 문을 열어 달라고 소리친다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이 나가서 문을열어 주시면서 이 집의 주인은 루터가 아니요 예수요라고 대답한다네. 그러면 마귀는 질겁을 하고 도망을 간다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주인입니다. 거듭나고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이제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주인이 되어서 인도하고 지도하고 이끌어 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주인입니까? 아직도 내 생각, 내 주관, 내 체면 그런 것들이 나를 이끌고 있습니까? 바뀌어야 합니다.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지고 신나는 삶입니까?
결론:
우리는 이전에 공중 권세를 잡은 자를 좇으며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절대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절대은혜가 우리와 함께 합니다. 놀라우신 은혜요 축복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그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바다로 접속하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의 바다에 깊이 묻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사랑으로 안겨 주실 것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시기 바랍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절대은혜에 파묻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출처: 최제봉 목사 설교 중에서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만 바라봅시다. (마14;22-33) (0) | 2022.09.22 |
---|---|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 (롬 8:31-39) (0) | 2022.09.22 |
사고방식과 신앙 (고후10:4-6) (0) | 2022.09.22 |
예배함으로 부흥하는 교회 (요 4:24) (0) | 2022.09.22 |
여러분의 마음 속에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4:16-20) (0) | 2022.09.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