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의한 개혁 (요한계시록 22:18-19)
종교개혁은 484년전 즉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수도사였던 마틴 루터가 비덴베르그 성당 대문에 카톨릭의 부패에 관해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부착한 것을 기화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 중에도 직접적인 발단이 된 것은 면죄부 판매 때문입니다. 당시 도미니크 종단의 사제 테첼이 간교한 방법으로 백성들을 선동하여 이 면죄부를 사면 연옥의 고통에서 면제된다고 유혹했습니다. 면죄부를 판돈은 교황 레오 10세가 성베드로 성당 증축에 사용된다고 하였으나 사실 그 수익의 절반은 호헨쫄레른 가문의 브란텐 부르그의 알베르트가 모인츠의 대주교직을 사는데 소용된 빛을 갚는데 쓰여졌던 것입니다. 여기에 분노한 마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Sola Fidei) 외치면서 95개조항의 항의문을 내걸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또한 1517년에 쓴 ‘95개 조항’이라는 글에서는 베드로 성전의 건축을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당시 교황청의 비리와 부패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베드로 사원 신축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돈을 허비함은 불합리하다. 이 사원이 기독교가 공유하는 보화라고 하는 데는 조소를 보낸다. 이렇게 되다가는 로마의 모든 교회, 궁전, 성벽, 다리들을 건축하기 위해서 우리 돈이 허비될 것이다. 우리가 할 것은 먼저 산 성전(Living temple)을 지어야 할 것이다. 다음에는 마을의 교회를 그리고 나중에 베드로의 성전을 지어야 할 것이다. 독일 사람은 로마의 베드로 성당에 갈 수 없지 않은가 교황의 수입은 오늘날 가장 부한 사람의 것보다 더 많은데 왜 그 돈으로 베드로 성당을 짓지 않는가? 양들의 가죽과 살과 뼈로 지을 바에는 차라리 베드로 성당을 재가 되게 버려 두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때 루터가 황제의 소환을 받아 보름스 의회에 서면서 “교황에게 건, 의회에게 건 난 내 신앙을 버릴 수 없다. 그들의 오류가 빈번하며 서로 모순된다는 것은 대낮처럼 분명하기 때문이다……성경의 증거를 받아 확신하는 나는 결코 철회할 수 없다. 내가 여기 섰으니 딴 길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외쳤고 또 보름스에 가는 것은 생명에도 위험이 있으니 가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보름스에 있는 모든 기왓장이 다 마귀가 되어 나를 공격한다 해도 나는 가겠노라”고 당당히 말했던 것입니다. 그 여파가 쯔빙글리나 장 칼뱅들의 믿음과 지력과 함께 유럽을 휩쓸었고 존 녹스로 하여금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하게 했고 요한 웨슬리로 하여금 영국 감리교회를 창시하게 했고 신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당시 종교가 부패했던 것은 성경말씀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수도사들은 복음을 몰랐기 때문에 고행으로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려 했습니다. 또 기도문을 읽어도 그 내용이 어느 성경에 기초한 것인지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1. 그러므로 신앙의 개혁은 말씀운동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중세기 평민들은 대부분 글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말씀에 무지하기도 했지만 가톨릭에서는 의도적으로 성경을 가르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예 읽지 못하게 했습니다. 명분이야 그럴 듯 했습니다. 성경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함부로 읽게 되면 그 뜻을 바로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말씀의 뜻을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에 정규 신학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못하게 했습니다. 중세기 기독교 금서 목록에 성경이 포함되어 있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영국의 틴들이 어려운 라틴어 성경을 많은 사람들이 읽기 쉬운 영어로 번역하고, 독일의 구텐베르크(Gutenberg, Johann Gensfleisch 1394?~1468)가 인쇄기계를 발명하여 성경을 다량으로 인쇄해 내놓게 되자 이들은 사단의 앞잡이요, 인쇄기계는 사탄의 도구라 하여 화형시켰던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 백성들이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개혁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바로 가르치고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살았다면 왜 그렇겠습니까? 우리 나라에 언더우드, 아펜젤러 두 선교사가 발을 딛기 100년 전에 이미 가톨릭이 들어와 있었고 수많은 순교자를 낸 것은 대부분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사가 들어올 때까지 100년 동안 한글로 된 신약성경조차 없었습니다. 그저 기도서나 교리서 같은 책들만 있었습니다. 그러니 신자들이 어떻게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을 바로 배우고 실천할 수 있었겠습니까?
반면에 기독교 초기 중국에서 건너온 이하응 백홍준 등은 이미 중국에서 발행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왔고, 일본에서 들어온 이수정 역시 마가복음을 번역하여(이수정 판) 들여왔습니다. 몇 년 후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가 공식으로 입국했을 때 역시 성경을 품에 지니고 들어온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그러나 성경책이 있어야 읽을 것이 아닙니까, 읽어주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어야 들을 것이 아닙니까? 들은 것이 있어야 실천할 텐데 성경 자체가 없다는 것은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어느 집이나 신자의 가정에는 성경책이 있습니다. 신자의 숫자보다 성경책의 숫자가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이것이 복입니다. 게다가 개역, 새번역, 표준새번역, 공동번역, 현대인을 위한 성경 등 다양한 번역본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톰슨성경을 시작으로 다양한 스터디성경이 나와 그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맹인들을 위한 점자성경과 듣는성경, 시력이 나쁜 분을 큰글성경, 쉽게 지루해 하는 분을 위해 칼라성경, 각종 주석성경이 서점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는 교육혜택을 입어 대부분 고등교육을 받아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웬만한 분들은 영어성경, 일어성경을 해독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에 주신 커다란 복입니다.
2. 말씀을 개혁하려는 시도
안타깝게도 우리 주위에서는 말씀을 개혁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대영백과사전(Britanica Encyclopedia)도 1771년 초판 3권의 책으로 만들어진 후 지속적으로 증보판을 발행함으로(현재 색인포함 32권)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자랑거리는 수 천년 동안 한 번도 성경의 수정판이나 증보판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수정 증보가 필요하지 않은 완벽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변의 책인 성경을 자신들의 취향에 맞춰 개혁하려는 시도는 이단들을 중심으로 끝없이 있어왔습니다. 지금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경을 개혁한 ‘신세계역’이란 성경을 쓰고 있습니다. 몰몬교도들은 성경에 ‘몰몬경’이란 책을 한 권 더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소위 제2경전이란 책들을 성경 뒷부분에 붙여 넣었습니다. 여기에는 ‘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집혜서’ ‘바룩’ ‘다니엘 후편-세 아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 ‘마카베오상’ ‘마카베오하’라고 하는 우리가 듣기에 생소한 책들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더나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십계명을 변개(變改)시키고 있습니다. 즉 1,2계명을 한데 묶어놓고 10계명을 둘로 나눈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머리부분만 암송하면 자연스럽게(?)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는 부분이 숨겨집니다. 물론 성경을 보거나 십계명 전문(全文)을 읽어보면 드러나게 되지만 가톨릭의 십계명은 우리처럼 전문을 다 싣지 않고 머리부분만 싣고 있습니다.
유다왕 여호야김이 왕으로 있을 때 여후디와 엘리사마가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드리자 왕은 작은칼로 그두루마리 책들을 베어 화로 불 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습니다(렘 36:24). 지금도 개혁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민주화라는 미명아래 교회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교역자의 영적권위를 밟아버리고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교회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후기 근대주의(Post-Modernism)는 지금까지 내려온 전통적인 진리를 모두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리교 신학대학의 홍정수 교수 같은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리켜 “신의 아들의 죽음이 아니라 특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던 설교자의 죽음”이라고 했고, “예수님의 타살은 동시에 진정한 자살이다”라고 합니다.
모든 종교에 다 그리스도가 있고 다 구원이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 예수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면 독선이라고 하는 종교 다원주의자들도 있습니다. 감리교의 변선환 교수는 “그리스도밖에 구원이 없다는 교회 신학은 또 다른 천동설에 지나지 않는다”(현대사조 2권 1978) 또 “그리스도 예수의 절대성은 서구문화 안에서만 주장될 수 있는 것”(크리스챤 신문 90년 12월 8일) 이라며 “개종을 목적으로 하는 개신교의 선교는 보편적이고 다원적인 선교로 하루 빨리 탈바꿈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지금 감리교에서 제명 출교되었습니다.
여성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여자였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고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고 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 어머니"라고 하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수한 신학교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는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라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로마서 8:15에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1세기가 아니라 31세기가 되어도 우리 구세주는 ‘오직 그리스도’요 영원 불변한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성경’이며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오직 믿음’이며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3. 말씀에 의한 개혁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 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우리는 말씀을 우리 입맛에 맞게 개혁할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한 개혁을 이루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이 완공된 후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에 모이게 하고 학사 에스라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주었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깨닫게 해 주자 백성들은 모두 통곡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지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무지하다보니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범죄했고 하나님의 일에 나태했던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느헤미야 시대의 종교개혁’이라고 합니다. 참된 종교개혁은 말씀에 의한 개혁입니다. 말씀을 바로 깨닫게 될 때 개혁이 이루어집니다. 더 나가 백성들은 과거 자신들이 지은 죄를 고백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결심을 확인하기 위하여 새로운 언약비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습니다(느 9:38 이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29)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히 4:12)한다고 하셨습니다. 까닭에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거나 듣고 배울 때 성령께서는 우리 자신의 죄와 잘못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 때 순종하는 사람은 변화를 받는 것이고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사람은 귀를 막거나 성경을 찢어버릴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는데 계기판에 빨간 경고등이 들어왔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경고등을 무시하겠습니까? 아니면 경고등을 부숴버리겠습니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엄청난 화를 자초합니다. 정말 지혜로운 운전자라면 차를 한쪽에 세우고 그 원인을 찾아내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시각각 여러분과 우리에게 경고등을 보내십니다. 경고등을 안 울리게 고치려 할 것이 아니라 경고등의 신호에 의해 우리 자신의 삶을 고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출처/황의봉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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